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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은 늙다리 소, 농사꾼이라네
게시물ID : readers_322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빗속을둘이서
추천 : 3
조회수 : 19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9/05 2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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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가난해서 약 한번 못 써본 채 아버지 여의고서는 더 궁해졌으므로
빈부 격차에는 바닥이란 완충재가 없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어머니가 형이랑 일군 밭 덕에 배고픔은 모른 게 복이다
김 나는 감자, 옥수수죽 호호 불며 형 한입 나 한입 나눠 먹고 자란 내 사춘기는 행복한 맛을 살았노라
가장이니 잘 먹여야 한다고 어머니께서는 농사일 바빠도 매양 여물 쑤었고
나는 형과 함께 나들이 겸 자주 풀 메러 나가서 반경 오십 리 안으로 안 들쑤신 데가 없었다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며 더위 식히기도 하고
수수꽃 늘어진 고갯길을 낙화보다 느리게 걸으며 보폭 맞췄음이 선하다
감나무밭 내다보이는 언덕에서 서녘의 황금 노을 만끽하는 게 호사였고
형 품에 기대 한뎃잠 들면 촉촉한 별빛 아래서 좋은 꿈을 꿨다
가난했지만 배불렀고 철이 덜 들어 많이도 웃었다

내 어머니는 25년생 소띠, 농사가 천직이라 하셨네
팔자에 게으름이 뭔 놈의 원수인지 고되게 흙만 일구다 쓰러지셨다
약 한번 못 쓴 게 한이 돼봐서 밤새워 울다가 살림이라도 내다 팔게 장날을 봐뒀다
주워다 고쳐 쓴 고물을 어떤 팔불출이 후한 값 치르겠냐만, 형은 다 알고 속아줬겠지
달구지에 한가득 싣고 읍내 가는 길에서 한참을 눈물로 방황했더라는 옛날이야기다

부모님 제사 지내고 오는 열차 안에서 덩달아 생각이 난다
묘라도 있었으면 찾아뵐 텐데
가난이 시켰다고 늙은 형을 거죽으로도 못 쓴단 천대 받게 해가며 푼돈에 넘겼다
평생 동고동락한 가족을 어찌 팔 수가 있나
그 몹쓸 짓 해낸 자신이 참으로 밉고 밉길래 웅크린 벌레가 되어
숱한 밤을 외양간에서 쓸쓸히 잠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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