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일 새벽 5시, 안산 합동분향소에 세워진 붉은색 버스 두 대는 '천만 인의 약속' '세월호 가족버스'라는 간판을 달았다. 사람들은 노란색 손수건, 유인물, 서명지 따위를 차에 싣느라 분주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와 국민대책회의가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전국 서명운동에 나섰다. 동부권(창원-김해-부산-울산-포항-대구-청주-원주-의정부)과 서부권(여수-순천-광주-전주-대전-아산-수원-인천-부천)으로 나눠, 전체 10박11일로 전국을 순회하는 여정이다. 동네 시장 같은 곳도 구석구석 방문해 특별법 제정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한다. 첫날 서명운동 버스에 탑승한 이들은 2학년10반(서부권)과 7반(동부권) 유가족이었다(일정은 각 반 대표가 제비뽑기를 통해 정했다).
지난 5월13일 시작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은 7월4일 현재 250만명가량이 참여했다. 7월 중순까지 1000만명을 목표로 한다. 세월호 특별법 초안은 진상 규명에 집중돼 있다. △진상 규명 전 과정에 피해자 가족 참여 보장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진상조사기구의 구성과 조사 권한 행사 △진상 규명 결과에 근거한 관련자 처벌 등이다.
ⓒ시사IN 신선영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학부모'라는 피켓을 든 한 학부모가 서명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손목에 찬 노란색 팔찌 '리멤버(remember) 0416'을 보며 2학년7반 민우의 아버지 이종철씨는 "한곳(특별법 제정)만 보고 간다"라고 말했다. 이미 서울과 부산, 대전, 인천 등으로 서명을 받기 위해 돌아다닌 '경력'이 있었다. 2학년7반은 가장 많은 학생이 돌아오지 못했다. 수학여행에 나선 34명 학생 가운데 33명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동병상련인지 유가족끼리 단합이 잘 되는 편이라고 참석자들은 입을 모았다. 연두색 티셔츠를 반 셔츠로 정해 유가족이 뭉칠 때마다 입고 다닌다. 이날도 연두색 티셔츠를 맞춰 입었다. 학부모 22명은 전날 분향소 당직을 한 터라 한숨도 못 자고 바로 경남 창원행 버스에 올랐다.
오전 11시까지 버스는 목적지인 경남도청에 도착했다. 경찰이 입구를 막으면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도청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할 수 없다는 경남도청 측과, 10여 분 기자회견만 하겠다는 유가족 측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기자들이 몰리자, 도청 측은 입구를 텄다. 정인이 아버지 이우근씨는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기자회견문을 힘없이 낭독하면서 자주 멈칫거렸다. "눈물이 나려고 하잖아, 참는다고 참아도 잘 안 된다."
이날은 아들 정인이의 생일이었다. 세월호 가족버스가 출발한 까닭에 하루 앞당겨 7월1일, 아들의 생일상을 차렸다. 안산시립 납골당 하늘공원에는 2학년7반 희생자 33명 가운데 15명이 나란히 안치돼 있다. 납골당을 갈 때마다 부모들은 뭐든 15개씩 챙겨 갔다. 요구르트 15개, 콜라 15캔과 치킨, 피자, 케이크….
낮 12시에는 민주노총의 도움을 받아 STX조선해양 공장을 방문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커다란 쇳덩이 배가 시선을 압도했다. "세월호는 이 배보다 더 큽니다"라고 한 노동자가 말했다. 성복이 아버지 박창국씨는 "이렇게 튼튼한 새 배를 탔다면 사고가 안 났을 텐데…"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그는 아이의 장례를 치른 5월5일 이후 생업을 포기하고 전국의 서명운동 현장을 누빈다.
공장 내 식당 세 군데로 유가족이 흩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에게 서명을 받기 위해서다. 미래관 1층 식당에서 박씨는 '천만 인의 서명' 피켓을 들고 외쳤다. "세월호 유가족…입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유가족이라는 단어를 한숨에 말하지 못했다. 울음이 북받친 듯 피켓에 얼굴을 묻고, 목을 가다듬기를 반복했다.
유가족들이 직접 서명을 받자, 서명지가 빼곡하게 채워졌다. 한 시간 남짓 사이에 1250여 명이 동참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이렇게 버틸 수 있습니다." 유가족은 허리를 90°씩 굽혔다.
창원 시내로 나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번화가인 의창구 정우상가, 성산구 대동백화점, 성산구 이마트,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으로 각각 흩어졌다. 지나가던 시민 한두 명이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세월호 너무 시끄러워요." "경제도 어려운데,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해요?" "총 맞아 죽은 군인이 억울하지, 너희는 보상이라도 받잖아." 유가족들은 그런 소리를 한 귀로 흘리려고 애썼다.
"우리 아들 잘생겼지? 효자였어"
민우 아빠 이종철씨는 서울 대학로에서 서명을 받을 때 젊은이들은 잘 해주었지만, 어르신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만 좀 해라, 보상금 얼마나 받으려고 그러느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참고 추스를 수밖에 없는 건 '내 새끼가 왜 죽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이유는 그것 하나다.
ⓒ시사IN 신선영 이동하는 틈틈이 학부모들은 자녀의 사진을 꺼내 봤다. 이종철씨가 아들의 학생증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나쁜 말'이나 서명을 피하는 것보다 더 가슴 미어지는 일이 있다. 교복 입은 또래 학생이 서명하는 걸 지켜볼 때다. 창원시 성산구 이마트 앞에서 이씨는 교복을 입은 10대 청소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2학년7반 엄마 아빠가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교생 선생님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과 국화 수십 다발이 놓인 교실 사진이 피켓에 부착돼 있었다. 그는 아들 민우의 학생증을 지갑에 품고 다닌다. 이날 네 군데에서 진행한 서명운동에 2000명가량이 참여했다.
장마 영향권에 접어들면서 경남 지역에는 빗줄기가 거셌다. 저녁 7시부터 정우상가 앞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빗물이 흐르는 인도에서 얇고 작은 은박 돗자리 하나에 의지한 채 시민 200여 명이 자리를 지켰다. 민수 아버지 김기웅씨는 "힘이 없어서 아이를 잃었다. 당신의 아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4월16일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밤 10시. 모든 일정이 끝났다. 지역 시민단체가 마련해준 한 횟집 건물 2층 방 네 개에서 유가족들은 또 한뎃잠을 잤다. 불편한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날들이다.
이튿날인 7월3일 오전 7시, 유가족들은 창원시 위아사거리와 창원병원 앞에 서 있었다. 지하철이 없는 창원에서는 자동차로 이동하는 시민이 많다. 유가족들은 도로를 바라보고, 자동차를 향해 플래카드를 들었다. 강민이 아버지 나병만씨는 승용차에서 내려 신호등을 건너는 한 초등학생을 쭉 바라보았다. "우리 아들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그는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기자에게 강민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키가 커." "잘생겼지?" "효자였어." 아들 자랑을 하던 그는 금세 침묵했다. 오전 10시,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마련된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날 참석한 언론 매체는 네 군데뿐이었다. 기자들이 질문 서너 개를 던진 뒤 간담회는 20여 분 만에 끝났다. "잊지 말라는 호소는 때때로 벽 앞에 부딪히는 것 같다"라고 한 유가족은 말했다. 이들은 김해를 거쳐 부산에서 서명운동을 한 뒤, 7월4일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다.
같은 날 2학년8반 유가족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부산으로 떠났다. 7월12일까지 세월호 가족버스는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