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War] 현상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은 대부분 이 영화를 둘러싼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수사들을 겨냥하고 있다. 파시즘을 지적하는 것은 민족주의를 지적하는 것으로 오인되고 있으며, 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을 "파시즘"이라는 호명으로 표시하는 논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현상이 보여주는 위기는 단순히 민족주의의 과잉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성들을 안고 있다. 나는 이것이 박정희시대 이래로 꾸준히 토대를 만들어온 한국 파시즘의 완성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군부통치 시대의 대중 동의가 수동적 측면에 (가능성으로서의) 자발성이 덧대어졌던 것이라면, 자유주의 진영의 정치적 승리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물적 조건을 거친 현재의 대중들은 거시정치적 차원이 아닌 미시정치적 차원에서부터 파시즘적 습속들을 체득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특징은 반(反)지성주의이다. [D-War] 현상은 그 옹호자들이 보이는 민족주의적 속성을 보기 이전에 그들이 보이는 반지성주의를 봐야 한다. (심형래와) 그 옹호자들이 적대적 집단으로 상정하는 "충무로"는 충무로 자본이나 막연한 충무로 영화 인력들이 아니라 충무로의 여론을 주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평론가 집단과 평론가적 면모를 보이는 감독 집단이다. [D-War]가 주도하고 있는 노이즈마케팅은 대부분 이들 "영화지식인" 집단에 대한 피해의식을 자극하고 있으며, 옹호자들의 주된 공격대상은 기자, 평론가, (독립영화) 감독ㆍ제작자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반지성주의는 10년전 [용가리]를 런칭할 당시의 "신지식인" 현상과도 연결되는데, "식지식인"이란 다름 아닌 반(反)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에 권력의 토대가 되던 (학적) 지식을 "낡은 것"으로 놓고, 이러한 학적 지식이 없음에도 열정과 노력으로 새로운 지식을 낳았다는 영웅신화가 그것이다. 이 영웅신화는 98년 당시에도 이미 형성중에 있던 반지성주의를 자극하면서 유행어로 성공한다.
반지성주의는 민족을 논하기 이전에 계급의 문제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론』에서 주목했던 대중의 자발적 파업은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혁명가 집단과의 조우에 성공하지 못했고, 10년 뒤 동일한 대중들은 국가사회주의당의 지도에 따라 지식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독일 대중은 계급 의식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적대의 대상은 자본이 아니라 지성이었던 것이며, 이는 사적소유보다 지식권력이 (아마도 습속의 측면에서) 더 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무튼 대중은 자본의 타파 대신 군림하는 국가(자본)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반지성적 카리스마에 대한 승인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그 카리스마를 지닌 입지전적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전제적 통치를 대중은 욕망했던 것이다.
심형래의 전략은 이러한 파시즘의 반지성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닮았는데, 그는 "충무로"로 표상되는 영화 지식인 집단을 적대의 대상으로 놓으면서, 실제의 "충무로"인 쇼박스 자본과 공고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충무로 자본에 의해 외면받았던 힘든 과거를 극적으로 강조하면서 자신의 출발이 미약했음을 강조하는데, "충무로" 감독들이 지식 권력을 바탕으로 "쉽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그 알리바이로 제시된다. (영화에 대한) 학적 지식이 아니라 그저 열정과 노력만으로 지금의 고지에 도달한 입지전적 인물로 이해되는 심형래는 그러나 충무로 자본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장에서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획득한다.
들뢰즈/가따리는 파시즘에 대한 고찰에서 그것이 증오와 파괴를 통한 죽음에 대한 욕망임을 지적한다. 파시즘 역시 욕망이지만 그것은 욕망의 잠재성, 욕망의 변용능력을 거세한 욕망이다. 그 욕망은 국가, 민족, 가족, 혈통 등 "거대분자"를 향한 욕망이며, 이것이 국가주의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양상들은 욕망의 표출임에는 분명하지만, 죽음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D-War]의 "승리의 길"과 국가-되기의 욕망, 피랍자들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위신과 국익 추구를 우선시하는 욕망, 그리고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자신의 아이돌에 흠집을 내는 대상에 대한 통제불가능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멤버십을 확인하는 욕망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죽음의 욕망은 확인된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창출한 공간은 생성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죽음의 욕망, 파시즘으로의 가능성 역시 함께 열었다. 문제는 이를 조장하는 "거시권력"이 아니라(그런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분자적으로 움직이며 상호 의사소통하는 미시적 블랙홀들이다.
우리는 심지어는 파시즘이 몰적 절편들 및 그 중심화 모두와 구분되는 분자적 체제를 함축한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파시즘은 전체주의적 국가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그러나 파시즘을 그 자신이 고안한 개념에 의해 정의할 이유는 없다. 전체주의적 국가들, 즉 스딸린주의적이고 군사독재적 유형의 국가들이 있다. 이 국가들이 파시즘적이지는 않다. 전체주의적 국가라는 개념은 거시정치적 수준에서만 적용된다. 즉 경직된 절편성과 특정 양태의 전체화 및 중심화에만 적용된다. 이에 반해 파시즘은 분자적 초점들이 상호작용 속에서 번성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초점들은 국가사회주의 국가(National Socialist State)에서 서로 공명하기 시작하기 이전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뛰어다닌다. 농촌 파시즘, 도시 혹은 동네 파시즘, 청년 파시즘, 참전용사 파시즘, 좌익 파시즘, 우익 파시즘, 배우자 파시즘, 가족 파시즘, 학교 파시즘, 사무실 파시즘―이러한 모든 파시즘은 미시적 블랙홀에 의하여 정의되는데, 이 블랙홀은 자립적인 것으로서 다른 블랙홀들과 의사소통하다가 마침내 거대하고 일반화된 중앙 블랙홀에서 공명하게 된다. 전쟁 기계가 각 블랙홀마다, 각 구석마다 설치될 때에 파시즘이 존재한다(There is fascism when a war machine is installed in each hole, in every niche). (214) (들뢰즈/가따리 『천의 고원』발췌, 정남영「들뢰즈와 가따리의 파시즘관」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