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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지향성
게시물ID : phil_32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올때메로나
추천 : 2
조회수 : 8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28 12:37:49

힘의지는 목적지향적이다. 그런데 이 목적은 힘의지 안에 내재하고 있다. 즉 '더 많은 힘'이다. 의지의 이런 특징을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존재의 가장 내적 본질" 혹은 "세계의 가장 내적 본질" 혹은 "물자체"로서의 의지 개념과 차별화시키고 싶어한다.(A.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WWV) Ⅰ, §7; 2,37, Ⅱ, Kap 18)

"힘에의 의지"가 "의지"의 한 종류인가, 아니면 "의지"라는 개념과 동일한 개념인가? 그것이 갈망한다인가? 아니면 명령한다는 것인가? 쇼펜하우어가 생각하는 의지인가? 의지가 "물 자체"라는?" : 나의 명제는 이렇다 : 기존의 심리학의 의지는 정당화되지 않은 일반화이다. 그런 의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특정한 의지가 다양한 형식들로 형태화된다고 하는 대신에, 사람들은 의지의 내용과 어디에로?를 삭제함으로써 의지의 특성을 없애버린다…(KGW Ⅷ 3 14[121], 93쪽)

모든 생기를 내부로부터 나오는 동인으로 소급하려고 하는 쇼펜하우어는 의지에서 그 답을 찾는다. 의지는 "자연 전체의 현재적인 기체", 모든 개별적인 사물에 "근원적인 창조력"이다.(WWV §25) 즉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인 의지는 곧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서의 의지를 그는 "물 자체(Ding an sich)"로 인정한다 : "모든 표상은, 모든 대상은 그 어떤 종류이든 간에 현상이다. 물 자체만이 유일하게 의지인 것이다."(WWV§21)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힘Kraft 개념에 포함시키던 기존의 표상방식에서 벗어나, 힘을 그 본성상 의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WWV§22, §25) 이렇게 해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곧 힘의 형이상학이 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작은 문"이면서도 동시에 그 문을 통해서 스스로를 열어보이는 "모든 사물의 좀더 내적인 본성"이라고 생각한다.(WWV Ⅱ Kap 18) 의지는 물자체인 동시에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배후에 놓여 있는 ens realismum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현상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가장 명료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쇼펜하우어는 물자체와 현상을 구별하면서도 칸트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칸트의 구분에서 현상의 형식을 주체에, 즉 표상의 초월적인 조건들로 환원시킨다고 본다. 그래서 칸트는 우리 밖에 있는 인식불가한 물자체가 우리 안에서 지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채, 로크에 의해 유혹당해 물자체를 그냥 원인으로서만 상정해버리며, 우리 지성의 표상을 위한 재료들을 자극하는 외적 원인으로 말해버리고 말았다고 비난한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칸트비판이 정당한지는 여전히 문제거리이지만, 그는 적어도 표상들로서의 현상은 그것의 형식과 질료면에서도 주체개념들이라는 입장을 취하며 칸트와 자신을 구분짓고 싶어한다. 그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적 일원론을 지향하고 있다. 의지는 hen kei pan이고, 반면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의지로서의 세계가 어떤 표상적인 도구에 의해 보여지는 것으로서 제공되는 것이다. 어쨌든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에서 의지보다 더 잘 보증되고 더 포괄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심리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나 의지는 제일실재인 것이다.

이런 실재를 니체는 한갓 "편견"(KGW Ⅶ 3, 34[61], 159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실재성의 "창백한 그림자"(KGW Ⅴ 1, 6[254] 594쪽)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힘의지와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싶어한다. 니체의 이런 엄중한 판단은 쇼펜하우어의 기념비적인 의지의 형이상학의 배경 앞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니체는 여전히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적 이원론자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이 "정통적인 쇼펜하우어주의자는"는 아니었다.

단지 의지라는 것을 없애버리면, 질료나 물질이나 실체나 내적이고도 외적인 사실들, 나, 목적, 정신, 존재마저도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 니체의 전략이었다. 그는 의지라는 것을 형이상학의 최후의 보루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지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던 형이상학적 토대를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통해 공격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너무 빨리 판단해버린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J. Salaquarda, "Nietzsches Metaphysikkritik und ihre Vorbereitung durch Schopenhauer", in : Krisis der Metaphysik, 259-282쪽)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성적 인간의 "내적인 규정 근거"였으며, 쇼펜하우어에게는 모든 존재자의 "일차적이면서도 근원적인 것"이었던 의지는, 니체에게는 모든 역동적인 관계들의 일차적 원천이 된다. 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의지의 "힘의 급작스런 분출이나 폭발"(KGW Ⅶ 1, 16[20] 532쪽)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에게 의지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고 잃어버리는 의지들이며, 이미 다른 의지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것들은 힘의 증대를 추구한다. 의지의 이런 "내용"과 "목적"을 없애버리게 되면, 의지의 성격 역시 없애버리게 되며, 내용과 목적이 사라진 의지는 그야말로 "한갓 공허한 개념"(KGW Ⅷ 3 14[121], 93쪽)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의지의 지향성을 니체는 다음의 유고에서 다시 한 번 명백히 한다 :

"원한다"는 "갈망한다", 추구한다, 요구한다가 아니다 : 이것들로부터 의지는 명령의 아펙트Affekt des Commando's에 의해 구분된다. "원한다"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무엇을-원한다 Etwas-wollen만이 존재한다 : 목표는 인식론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상태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 인식론자들이 생각하는 "원한다"는 "생각한다"만큼이나 나타나는 일이 없다 : 즉 순전히 허구이다.(KGW Ⅷ 2 11[114], 296쪽)

의지는 의식적인 목표지향적 성격을 지닌다. 의지의 지배추구활동은 의지의 지향성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목표 없는 의지는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 목적추구적 성격이나, 지향성(Intentionalitat)은 오히려 의지의 기능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을-원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한단어"로 이해해야 하며, 어떤 특정한 것에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의지의 분석적인 함의인 것이다.(V. Gerhardt, Vom Willen zur Macht, 231쪽) 의지가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목표 또한 있다. 그리고 "무엇을-원한다"는 곧 "힘-원한다"와 다르지 않다. 모든 의지는 힘의지이고; 의지 자체는 자신의 가장 내적인 본질상 항상 힘의지인 것이다.

힘은 고정적인 중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힘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된다. 그런데 어떤 것이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지 자체가 모든 생기의 근본에 놓여 있는 "원초적 형식의 아펙트"(KGW Ⅷ 3 14[121], 92쪽)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힘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불합리한 질문에 불과하다. 원초적 형식의 아펙트 자체가 자신의 활동성 안에서 스스로를 인지하게 하고, 그 자체가 스스로 작용하는 힘의지인 것이다. 힘을 원하는 것은 힘생기에 내재하는 목적이고, 이 목적은 의지의 본성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더욱 강해지고자 원하는 것은 생기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하는, 그리고 그 생기과정을 종결짓게 하기 위한, 생기과정 자체에는 결여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의지의 힘은 외부의 목적부여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전적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힘의 증대라는 합목적적인 운동을 한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힘의지의 합목적적 성격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힘의지의 이런 특징이 생기과정의 외적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을 지양한다는 점에서, 슈페만과 뢰브의 지적처럼 니체의 입장을 "반목적론적 목적론(ateleologische Teleologie)"이라고 부를 수 있다.(R. Spaemann/R. Low, Die Frage Wozu?, Munchen-Zurich 31991, 194 /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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