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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본 관동대지진에 대하여
게시물ID : humorbest_3235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징징!
추천 : 75
조회수 : 8648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1/11 15:22:47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1/11 13:40:19

관동대지진은 192391일 오전 1158분 부터 발생한 5분간격으로 3번에 걸쳐 발생한 대지진을 말합니다.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이 지진은 진도 7.8, 7.3, 7.2의 규모였으며 지진 후,

간토 지역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아궁이에 붙어 있던 불들이 삽시간에 일본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집들에 옮겨 붙기 시작했으며, 이는 거대한 화마를 만들어냈죠.

 

 

 

이 사태로 정부는 마비 되었고. 게엄이 발표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앗습니다.

 

치안유지를 위해 각 경찰서에 공개 공문 등으로 치안유지에 힘써줄 것을 당부 하는 한 편. 내무성에서.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전문이 발송됩니다.

 

 

 

이미 이 전부터 치바현에 설치됐던 조선인 수용소에 일본 헌병대 스파이를 잡입시켜

조선인들의 행동을 감시했던 사실이 금번 나고야시에 살고 있는 이토오(伊藤)씨 부부가 보관했던 자료로 확인된 것으로 나타났죠.

 

지진 발생 당시 헌병대에 근무했던 남성의 유족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조선어가 가능한 헌병 3명을 사복 차림으로 조선인 수용소에 파견해 조선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유효한 자료를 얻도록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자료는 등사판 인쇄 등 212장의 문서입니다..

 

일본은 당시 불황에 접어들어 실업자가 날로 늘어났고. 여기에 일본 공산당이 창당하는 등 노동자 농민의권익 투쟁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발생한 대재앙은 국가의 기반을 전복할 만한 위기 상활이었고. 때마침 2.8 독립 선언과 3.1일 운동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민족 감정이 나빠져 있는 것을 이용해 조선인을 지진재해로 인한 폭동을 막기 위한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죠.

 

마치 자신들의 권력적 기반이 휘청거리면 딴나라당에서 잘 쓰는 북풍이나 총풍처럼. 일본 역시 자신의 악재를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 했고. 그 제물로 조선인이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악의적으로 외곡된 일본 신문과 학살되는 조선인

 

내무성에서 발표된 전문은 거기서 끝난 것 만이 아니라.

 

각 신문들은 조중동처럼 앞뒤 안가리고 무조건 자신들의 호회와 정부의 발표를 앞다퉈 공개하고 퍼트렸으며 악의적으로 왜곡했습니다.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하여 우물에 독을 타고 살인을 하며 강간과 방화, 약탈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때문에 일본인들은 이러한 소문의 진위여부를 떠나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양민을 학살하는 자경단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스스로 학살을 해 나가가기 시작했죠.

 

무기가 없는 사람들은 죽창과 곡괭이를 들고. 칼이 잇는 사람은 일본도를 들고. 군인과 경찰은 총을 들고.....

 

그렇게 ....

 

조선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단지....

 

강제로 징집되어 왔다는 이유 만으로....

 

 

 

공부하러 왔다는 이유로.

 

단지 조선의 복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강제로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그들은 영문도 모른채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조선식 복장이 아닌 조선인을 구별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힘든 1550(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이란 발음을 시켜

 

만약 어눌하거나 발음을 더듬거렸다면 조선인으로 몰아 죽였고.

 

일본 본토 발음이 아니라면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몰아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잔악했습니다.

일부 조선인은 살려달라며 경찰서의 유치장 안으로 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본인들은 유치장 안까지 뒤져가며 철저하게 학살하였으며. 경찰은 이들을 보고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결코 이들을 막거나 제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찰과 반대의 세력인 야쿠자나 비공권력 기관에서 조선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국민은 조선인과 외국인을 떄려죽이는 학살의 향연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말리기는커녕 자신의 세력에 불만이 있던 더불어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피의 대 숙청이라 할 수 있었죠....

 

우물은 피로 물들어 마실 수 없게 되고.

 

도쿄를 흐르는 강인 스미다와 아라카와 강은 시체와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땅에는 묻지 못 할 만큼의 시체가 널렸다고 합니다.....

 

 

 

자경단의 폭력이 국가를 위협한다고 생각이 되자...

 

일본 정부는 그제서야 사태를 수습하였지만...

 

자경단원에게는 증거 불충분이라는 면죄부로 모두 풀어주게 되지요.....

 

결국.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내놓은 내무성도. 신문사도. 찌라시도. 죽창과 곤봉으로 학살을 저지른 일본인들도. 킨 칼로 학살에 가담했던 무사나, 군인들도. 총으로 조선인을 죽여 댔 던 경찰도...

 

그 아무도 영문도 모른 체 죽어야 했던 조선인들의 죽음에 대해선 ...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습니다.......

 

현재 나오는 피해자의 추정수는 20000여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일본극우 정치가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도지사 같은 경우는

최근 한국인 소매치기를 비롯해 불법 외국인들이 도쿄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다며

유사시 이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망언을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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