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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펌,브금주의]검은 커튼이 쳐진 고시원 - 完
게시물ID : humorbest_3268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계피가좋아
추천 : 11
조회수 : 3336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1/25 19:40:12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1/24 23:25:37
(4) 퇴 실 “으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부자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커튼에 투사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30분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꿈...? 이마의 땀을 닦으려고 하는 데 손에 잡힌 뭔가가 이마를 간지럽혔다. 불을 켜보니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손가락에 얽혀있었다. 저를 어서 이곳에서 꺼내주세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수미라는 여자는 끊임없이 나에게 뭔가를 알리려 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꿈속에서 여자의 그림자가 시작된 곳은 옥수수밭 쪽이었다. 예전에 창민이 가져다 주었던 옥수수가 생각났다. 사람의 머리털같이 긴 털을 가진 옥수수. 씹으면 비릿한 피 맛이 났었다. -왜 고시원뒤쪽 주차장있지? 그쪽이 30년 전엔 다 텃밭이었어. 당시만 해도 그쪽에 김장독을 묻어서 맛이 더 좋았는데 건물 주인이 바뀌면서 요샌 할 수 없이 교외로 나가서 묻어. 감자탕집 아주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쪽에 무언가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풍향계처럼 일제히 그 곳을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오늘만 이 악몽같은 밤을 이겨내자. 그리고 내일부턴 누가 뭐래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거다’ 나는 다시 한번 악몽을 꾸기로 결심했다. 방안은 꿈 속과 마찬가지로 정전. 창 밖을 내다보니 구름 사이로 한쪽 짜리 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내 방문앞에서 서서 잠시 생각했다. 그 이상한 성경이나 아키실론이라는 괴상한 풀도 그렇고 이 고시원 녀석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수상하다. 내가 비밀을 파헤치러 다닌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몰랐다. 나는 내 방문에 걸려있는 스파이더맨이 그려진 타월을 잡았다. 헉..헉.. 땅을 파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차장 옆에 있는 컨테이너 창고에서 가져온 삽으로 벌써 30분이 넘게 옥수수밭을 헤쳤지만 아직 발견되는 것이 없었다. 꿈속에서 본 위치를 기억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막상 와보니 첫 삽을 어디로 넣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주위가 너무 깜깜하다. 정전으로 주위는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아까의 악몽을 다시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 속에 갇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달빛에 의지해서 30-40cm깊이로 이곳 저곳을 파헤치기 시작한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삽 끝에 뭔가 길쭉한 끈이 걸렸다. 주위를 더 파보니 조그만 신발 한 켤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며칠 전 텃밭에서 만났던 꼬마가 신었던 그 빨간 운동화였다. 정신없이 그 주위를 더 팠다. 잠시 후 삽 끝에서 쨍 하는 금속성 소리 짜릿한 반동이 전해졌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강력한 반응이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 흙을 더 파내자 검고 반질반질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김장용 항아리였다. 수미의 몸이 묻힌 곳이 바로 이곳이구나. 수미의 원혼이 그 안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제 두려움을 넘어 어서 이 일을 내 손으로 끝내야 한다는 의무감조차 들고 있었다. 스르릉..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드러내자 뚜껑이 항아리 몸체에 긁히면서 유난히 큰 소리가 났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검은 구멍에서 역겨운 흙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꿈속에서, 혹은 환각 속에서 몇 번이나 맡았던 그 냄새였다. 바닥이 없는 동굴이 입을 쩍 벌리고 나에게 입김을 내뿜는다. 어서 너도 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없이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둠의 속삭임에 이끌려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 깊은 어둠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툭. 손 끝에 뭔가가 걸린다. 차갑고 단단한 표면. 더듬어서 그것을 만져보았다. 반질반질한 구면을 따라 오뚝 솟은 무엇과 그것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움푹 꺼진 굴곡이 느껴졌다. 그 아랫부분을 더듬으니 살짝 윗입술이 들리며 그 속에 있는 단단한 이가 느껴졌다. 죽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여자의 머리통은 몸통과 분리되어있었고 항아리속의 남은 공간은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머리카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머리통을 두 손으로 잡고 항아리에서 꺼내었다. 검은 구멍에서 푸르스름하게 경직된 여자의 얼굴이 달빛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꿈 속의 모습과는 달리 여자의 두 눈은 감겨있었다. 하얀 피부는 15년 전의 시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곱게 보존되어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 15년이나 갇혀있던 여자의 영혼. 몇 년 동안이나 최선을 다해 공부했으면서도 시험을 눈 앞에 두고 죽어야 했던 여자의 원한. 어쩌면 이수미의 영혼은 이 좁은 곳에 갇혀 매일 매일 시험을 보는 꿈을 반복해서 꾸지 않았을까. 그리고 누군가 이 좁은 곳에 갇힌 자신의 영혼을 꺼내주길 바라면서 매일 밤 고시원 창문을 기웃거린 것은 아닐까. 항아리 속에는 목이 절된된 수미의 몸통이 있었다.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것처럼 손톱이 구불구불 자란 손이 달빛에 언뜻 보였다. 수미의 긴 머리카락은 항아리 속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서 주의의 흙속으로 뻗어나가 있었다. 두 손으로 잡아당겨보았지만 땅 속에 박힌 머리카락은 칡뿌리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고시원 건물을 향해 거대한 식물의 뿌리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게 자랄 수 가 있을까.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죽은 후에도 자란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뒤 피부가 수분을 일으면서 수축해서 나타나는 과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아니 죽은 사람의 머리가 계속 자란다고 치면 수미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죽은 뒤 15년동안이나 계속해서 자라났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 머리카락은 주차장 지하를 가로질러 어디까지 뻗어있는 것일까. 일부는 옥수수의 줄기로 파고들어가 그 열매가 되었을 것이다. 또 일부는 건물 내벽까지 파고들어 혈관처럼 얽히고 설켜 건물 곳곳에 그 촉수를 드리웠을 것이다. 내 방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던 머리카락은 아마도 중앙냉방장치를 통해서 들어온 수미의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누군가 자기가 이곳에 묻혀있음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15년동안 끊임없이 보낸 그녀에 구조신호였던 것이다. ‘오늘 하루만 더 이 좁은 곳에서 참아주세요. 내일은 반드시 밝은 곳으로 꺼내드릴게요.’ 나는 마음속으로 사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수미의 얼굴을 다시 항아리 속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당장이라도 어둠 속에서 수미가 두 눈을 부릅뜰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선 경찰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김장독을 묻을 때 항상 그렇듯이 파낸 흙을 메워 넣을 때는 흙이 약간 모자랐다. 흙을 보충하려고 옆의 땅에 삽을 찔러 넣었었을 때 삽 끝에 또다시 작은 울림이 있었다. “이제 모든 걸 알겠어. 이 미친 새끼들!”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패한 남자의 잘린 머리였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삽질을 할 수록 항아리가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항아리 속에서는 몸통과 목이 분리된 부패한 시체들이 한 구씩 드러났다. 고대 중국의 인간젓갈같은 모습이었다. 얼굴들은 손에 기묘한 십자가 목걸이를 들고 있었다. ‘어서 경찰에 알려야해’ 이렇게 되면 귀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어서 이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당장 챙겨야 할 것은 핸드폰과 지갑이었다. 하지만 고시원에 올라갔을 때 내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서성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강동윤이었다. 놈들은 내가 텃밭을 파헤친 사실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핸드폰과 지갑은 포기하자. 일단 밖으로 나가서 공중전화를 걸던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리던지 하자. 그러나 그 계획도 곧 무산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난 총무와 창민이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란이었다. 일단 몸을 숨겼다가 기회를 타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두 번째 통로를 경유해서 돌아가려고 벽에 몸을 잔뜩 붙인 채 까치발로 이동했다. 우당탕.. 발에 뭔가가 걸려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누군가 그곳에 세워두었던 쓰레기통과 빗자루가 쓰러졌던 것이다. 그 소리에 동윤과 총무가 일제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나는 재빨리 양쪽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는 두 번째 통로로 뛰어 들어갔다. 노란 후레쉬 불빛이 천천히 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통로 쪽에서 숨죽인 발자국소리와 톤을 낮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숨긴 곳은 입구에서부터 5번째 방이었다 .내 옆에는 낯선 고시생 한명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침대 속으로 뛰어들어도 세상 모르고 자는 것을 보니 분명 약을 먹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위에는 총무실에 있던 커피잔이 있었다. 삐걱..첫번째 방 쪽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방을 하나 하나 열고 조사할 생각인가. 삐걱..두번째 방. 숨이 막히고 식은 땀이 났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는 대번에 들키고 만다. 문 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청각을 자극했다. 귀신이 방문을 하나씩 두드리고 다닌다는 괴담보다 훨씬 무서웠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들키면 나도 텃밭에 묻힌 그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삐이걱..세번째 방문. 소리가 원근감을 가지고 성큼 성큼 다가왔다. 이제 내가 있는 곳 까지는 불과 두 방 밖에 남지 않았다. 자꾸만 오줌이 마렵다. 이를 하도 꽉 깨물어서 어금니뿌리가 시큰거렸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도 바로 지금! 끼이이이..4번째 방문을 여는 소리! 수군거리는 소리 중간 중간 욕설이 섞여있다. 어떡하지..방문을 여는 순간 내가 먼저 공격을 하고 도망갈까. 무리다. 상대는 3명이다. 더구나 한명은 힘이 센 동윤이다. 1대 1이라고 하더라도 맨손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기. 뭔가 무기가 될 만한 날카롭고 뽀족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방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이라곤 두툼한 하드커버의 법전과 문구용 가위밖에 없었다. 법전은 너무 크고 무거웠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가위를 집어 청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저벅..저벅..저벅..드디어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바닥..벽..책상 위..천장..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려 이 극한의 상황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끼이이이..마침내 내가 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검은 그림자가 스윽 들어오더니 불빛으로 방안 이곳저곳을 비추었다. 문 뒤, 책상 위, 침대. 상대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불빛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빌어먹을, 제발 그냥 가라, 움켜쥔 손이 땀으로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검은 그림자는 저벅 저벅 걸어 들어와서 이불 끄트머리를 잡았다. 그냥 가라니까! 화악- 남자는 거침없이 이불을 젖힌다. 그러나 남자가 발견한 것은 커다란 베게뿐이었다. 남자가 잠시 투덜거리더니 방 안을 몇 번 더 훑어보고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옆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점 점 더 멀어졌음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나무늘보처럼 매달렸던 쇠봉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총무의 말은 사실이었다. 쇠봉은 튼튼해서 사람의 체중에도 끄떡 없었다. 아슬아슬 했다. 남자가 조금만 더 머물렀어도 손의 땀 때문에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나는 열려진 문틈 사이로 동정을 살피다가 놈들이 9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입구 쪽으로 이동한다. 어쨌든 이 밀페된 곳에서 벗어나 입구까지만 도달하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다. 여차하면 뛸 생각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녀석들은 아직 9번방을 수색 중이었다. 지금이라면 내가 유리하다. 막 입구를 향해 돌진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동윤이 내 바로 앞에서 후레쉬 불빛을 들고 웃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졌다. 콱. 동윤이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으드득..어깨가 뽑힐 것 만 같다. 발 뒤꿈치로 동윤의 앞발을 찍었지만 꿈쩍하지도 않았다. 아악! 다음 순간 동윤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윤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가 뒷주머니에 숨겨두었던 가위로 그의 손등을 찍어 버렸던 것이다. 뒤에서 총무와 창민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등에 꽂힌 가위를 뽑으려는 동윤을 어깨로 밀쳐내고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내 뒤에서 고함소리와 거친 발자국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 거리에선 내가 한발 빠르다. 놈들과 상당한 거리차를 두고 입구 손잡이를 잡는 순간 해냈다!는 희열이 밀려왔다. 덜컹..덜컹..아뿔싸! 입구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놈들이 양손잡이를 쇠사슬로 얽어매어 자물쇠로 잠궈 버렸던 것이다. 완전히 갇혔구나. 입에서 저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눈앞의 위기에만 집착해서 긴장을 놓아버린 나의 불찰이었다. 놈들은 내 바로 등 뒤까지 순식간에 추격해 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내 방을 향해 뛰어갔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내 방문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어서 이 문 열어! 부숴버리기전에!” 동윤이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방문을 발로 걷어찼다. 시간이 얼마 없다. 나는 일단 형민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야 나야 준영이, 여기 지금 고시원이거든? 어서 와줘, 빨리!” “야 지금 몇 신 줄 아냐? 나도 잠 좀 자자.”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중요한 일이라구. 내 목숨이 걸려있어! 가능한 한 빨리! 믿는다!” 나는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친구의 부탁을 못들은 척 할 리는 없는 녀석이다. 조금 있으면 내가 아는 누군가가 온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든든해 졌다. 게다가 녀석은 이 사건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경찰이 나를 미친 놈 취급해도 어느 정도 나를 변호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쾅 쾅 쾅 쾅..방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욕설은 계속 되었다. 세명이 달라붙어서 번갈아가며 미친 듯이 문에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우지직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문이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와들 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112를 눌렀다. 제발 받아라..제발..뚜우 뚜우..통화중이다. 개새끼들! 세금은 받아서 어디다 쓰는거야! 나는 핸드폰을 닫았다가 열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이 새끼 어디로 갔어?” 옆 방에서 동윤과 총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부순 방은 비어있는 옆방이었다. 사람은 선입견에 따라 행동한다. 나는 아까 방을 나서기 전 내 방에 있던 스파이더맨 타월을 떼어서 옆방에 걸어두었다. 내가 방을 비운 사이 놈들이 내 방을 함부로 뒤질까봐 그랬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방 번호보다는 문 가리개로 방을 구분하는 습관을 가진 녀석들을 멋지게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잠시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 것에 불과했다. “개수작부리지 말고 빨리 문 열어!” 얕은 수에 속은 게 분해서 인지 놈들은 더욱 거칠어딘 발길질로 내 방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거듭 112를 눌렀다. 신호음..드디어 사람이 받았다! “네 신림2동 경찰서입니다..말씀하...” 여자 경찰관이었다. 그러나 막 도움을 청하려는 순간 팟! 하고 핸드폰의 배터리가 나가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다. 아침에 분명히 충전을 해 두었는데. 필사적으로 전원버튼을 눌러봤지만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문 밖에서 발길질이 멈추고 낮게 읖조리는 주문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주문 소리 때문에? 시간이 없다. 곧 총무가 여벌의 열쇠를 찾아서 올 것이다. 아니 그전에 방문이 먼저 부서질 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곳은 어딜까. 나는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2층 높이. 과연 내 발목이 견뎌낼 수 있을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듯이 들썩거렸다. 잠시 움직임이 멎었다. 무엇을 하려는 거지? 우투투투- 천이 뜯기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창민이 위쪽 창문의 방충망을 뜯어내고 그쪽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동윤이 밑에서 무등을 태우고 있을 것이다. 창민의 얼굴은 화장이 뭉개져서 귀신과 같은 형상이었다. 입가의 붉은 립스틱이 뺨으로 번지면서 마치 피를 묻히고 있는 것 같았다. “씨발..진작에 네가 문을 열어주면 서로 좋잖아, 응?” 여자같은 목소리로 거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체가 창턱에 접히자 창민의 얼굴에 피가 쏠려 붉어졌다. 벌써 창민의 상체가 반이나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침대위로 올라가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창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짙은 보라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으로 내 얼굴과 팔뚝을 마구 할퀴어 대었다. 흉기에 베인 것 같이 팔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곳이 뚫리면 끝장이다! 피가 눈에 스며들어 사방이 온통 붉게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창민의 턱과 어깨를 밀어냈다. 다음 순간 나는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창민이 하얀 이빨로 내 손등을 물어뜯었다. 내가 왼손으로 창민의 관자놀이를 후려치자 창민이 떨어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나의 손등에서 살점도 한조각 떨어져나갔다. 섬뜩한 통증이 엄습했다. 창민은 내 방 안쪽으로 떨어져 신음소리를 냈다. 창민은 비틀거리고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놈들이 방안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채비를 했다. 막 창틀에 올라가 양 손으로 커튼을 잡고 뛰어내리려고 하는 찰나, 나는 커튼의 감촉이 낯익음을 깨달았다. 아아..왜 지금껏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매일 수도 없이 보고 손으로 만졌으면서도 어째서 몰랐을까. 이 고시원에 감도는 요기가 나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까. 모든 것이 눈 앞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내방의 검은 커튼은

바로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벌컷! 마침내 내 방문이 열렸다. 동윤과 총무가 내방에 몰려들어온 순간, 나는 두 손으로 커튼을, 아니 머리카락을 감아쥐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당. 빌어먹을.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착지할 때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손바닥도 마찰열로 화상을 입어서 시큰거렸다. 우당탕탕..계단을 내려오는 거친 발자국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대가 조여드는 것 같아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바람 새는 듯한 쉰 목소리가 고작이었다. 핸드폰을 작동하지 않게 한 이상한 힘으로 놈들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어쨌든 큰 길 쪽으로만 나가면 된다.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아직 행인 한 두명 쯤은 있을 것이다. 직접 도와주지 않아도 좋다. 최소한 경찰에 연락만이라도 해준다면..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막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경찰보다 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혀..형민아!” “준영아! 어서 타!” 스쿠터를 타고 온 형민이 엄지손가락으로 뒷자리를 가리키며 재촉했다. “어서! 시간이 없어!”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 녀석이라면 어떻게 든 해 줄 것이다. 안도감으로 힘이 다 빠진 나는 스쿠터에 타자마자 기절하듯 형민의 등에 쓰러졌다. 다음 순간. 나는 뒤통수에 불이 번쩍 하는 충격을 느꼈다. 왜..? 그런...?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몸을 돌린 형민이 바이크 헬맷으로 내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쳤던 것이다. 도대체 네가..왜..천천히 정신을 잃어가면서 나는 형민의 목에 걸린 갈고리 십자가 펜던트를 보았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주문소리..말린 쑥을 태우는 듯한 역겨운 아키실론 냄새..간신히 눈을 떠보니 주위는 어둠속에서 몇 개의 촛불이 나를 둘러싸고 타오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며 손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비닐이 깔린 고시원 침대 위에 끈으로 손발이 꽁꽁 묶여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겨진 알몸에는 검은 물감으로 온갖 기괴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소매가 긴 검은 색 옷을 입은 늙은 여자가 두 손을 위로 올리며 하늘을 우러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해서 잠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늙은 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원장이었다. 원장 외에도 총무와 창민, 동윤, 형민이 촛불을 들고 나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원장은 그릇에서 하얀 가루를 꺼내 내 얼굴에 뿌리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짜다. 소금이다. 지금 무슨 의식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겠지. 내가 처음 이곳에 온 그날처럼 고시원 사람들은 모두 수면제가 든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잃고 있을 것이다. 현관에 있던 흙 묻은 운동화들. 아마도 내 옆방 남자도 내가 잠든 사이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옥수수밭에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이승을 떠나지 못한 억울한 영혼이 벽을 두드리며 밤마다 도움을 요청한 것이리라. 그제서야 왜 총무가 처음에 나를 고시원에 들이기를 꺼려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옆방에서 자신들의 의식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미..미친 새끼들..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몇 사람을 죽여왔어..” 나는 눈알을 최대가동범위로 움직여서 방안을 살폈다. 비닐이 쳐진 곳은 침대뿐이 아니었다. 벽과 천장까지 빈틈없이 덮은 번들거리는 비닐이 촛불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이내 그것의 용도를 깨달았다. 피가 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이 자식들은 정말로 나를 악마의 제물로 바칠 셈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온 몸이 떨려왔다. 침대 다리가 덜컹거리며 떨린다. 오줌보를 제어할 능력이 사라지며 하체에 뜨듯하고 아늑한 느낌이 왔다. 살고싶다. 살고 싶다..이성이 증발하고 오직 그 한마디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장님 이것을..” 창민이 커다란 은대접을 들고 왔다. 원장은 대접에 손을 넣고 피로 범벅이 된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것은 주차장에서 만났던 그 꼬마의 잘린 머리통이었다. 반쯤 뜬 눈에서 눈동자가 위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주르륵..꼬마의 머리에서 쏟아지는 피로 원장은 내 알몸 주위에 육망성을 그렸다. 비릿한 핏줄기가 내 가슴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야 했다. “쿨럭..쿨럭..이 미친 녀석들..꼬마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나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발악을 했다. 살아오면서 이때처럼 신의 존재를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을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는 일정해. 누군가가 복을 받으려면 그 댓가로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거야” 원장이 말했다. 이 곳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합격률 뒤엔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키실론의 향은 마취효과가 탁월하지. 아프지는 않을거야.” 원장이 커다란 칼을 내 명치에 가져다 대었다. 갈고리 모양의 은색 칼이었다. 차가운 금속의 저온이 피부를 뚫고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스윽..칼 끝의 갈고리가 나의 가슴을 지나가자 나의 피부는 너무도 맥없이 좌우로 벌어지며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앗다. “아..하느님..” 원래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자 나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15년 전 수미를 죽일 때도 그 년도 똑같은 신을 찾더군. 하지만 내가 그 년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라서 죽였을 때 그 년이 찾던 신은 어디에도 없었어. 그 년의 목을 잘라서 피를 마시고 그것을 항아리 속에 넣어 묻을 때조차도! 너희들의 신은 영원한 방관자야. 너희들이 어떤 고통을 받든지 상관하지 않아. 잘했다고 상을 주는 일도, 못했다고 벌을 주는 일도 없지. 하지만 우리의 신 사탄은 달라. 자신의 종들에게 현세에서의 복과 부귀와 영광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야!” “만왕의 왕, 주중의 주 사탄이여! 영원하소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두 손을 들고 소리쳤다. 15년전 이수미를 살해한 이후 이 녀석들은 이런 식으로 매년 몇 명의 고시생들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피의 의식에 참여한 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판 댓가로 매년 시험에서의 합격을 약속받았을 것이다. “나의 신의와 주의 생령은 이 피에 깃드소서. 그리고 그것을 어둠의 힘에 바칩니다.” 원장이 성배에 담긴 아이의 피를 꿀꺽 꿀꺽 들이마셨다. 나머지 사람들도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마셨다. “제물로 바치는 뜨거운 피를 흠향하소서” 원장이 갈고리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얀 이빨사이로 빨간 피가 흘러내리는 섬뜩한 모습이었다. 원장이 막 내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도님. 그 일은 주의 은총을 입은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형민이었다. “세상의 헛된 정보다 사탄님을 택한 그대에게 우선으로 첫 번째 칼의 영광을 주겠노라. 주께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마시라. 그리하면 그대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리라.” 원장이 형민에게 칼을 건네어 주었다.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쥔 형민은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은 광기로 희번뜩이고 있었다. “혀..형민아..너까지 도대체 왜그래? 정신차려 임마! 나야, 니 친구 준영이라고!” 나는 발버둥치며 형민의 정신을 돌리려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누군지는 너무도 잘 알아. 나는 지금 제정신이야. 너와 같이 공부하고 밥을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정상이야.” “네가 어째서 이런 악마들의 모임에 있는 거야? 넌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잖아!” “닥쳐! 기독교의 신이 나에게 해준 일이 뭐가 있지? 나도 학창시절부터 온몸을 바쳐 그를 믿고 섬겼어. 하지만 나에게 남은 게 뭐야? 시험에는 매년 떨어지고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는 어이없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그토록 선량하신 분이었는데! 후후..기도하라고? 구하고자 하는 자는 문을 두드리라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뱀을 주겠느냐고? 내가 그를 섬긴 댓가는 바로 절망이었어!” 형민이 칼을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나는 그 병원복도에서 사도님을 만났지. 그후로 몇 달에 걸쳐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는 세상에서 어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탄이야 말로 내가 찾던 참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허울뿐인 천국이나 지옥은 존재하지도 않아. 무지한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한 위선자들이 지어낸 것에 불과해. 정작 그 치들은 그런걸 믿지도 않지. 알겠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실 뿐이야.나의 새 주인이신 사탄님은 나에게 현실에서의 진정한 복을 약속하셨어. 어머니의 병이 기적적으로 완치된 것도 모두 그분의 힘 덕분이야. 그리고 이제 너만 제물로 바치면 나도 시험에 합격할 수 있어!” “그 따위 시험 때문에 친구까지 죽일 셈이야? 정신 차려 이 자식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애원의 눈물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절망의 눈물임과 동시에 잘못된 광신에 빠져든 형민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나도 친구인 너를 죽이긴 싫었어. 네가 없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제물로 선택되었겠지. 그래서 그토록 이 곳에서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던거야. 누구의 탓도 하지 마.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형민아! 형민아 살려줘 제발!” 나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민이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동작에 맞추어 남자들이 기괴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아 이 모든 게 연극이었으면. 지금이라도 형민이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며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갑자기 찌잉- 주문소리를 듣고 있자 머리 한 구석이 아파오며 숨이 막혔다. 언젠가 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몽환적인 주술소리. 숨을 헐떡거리며 내 목을 조이는 욕심과 광신으로 추하게 일그러진 젊은 여자의 얼굴. 내 목을 조여드는 나 자신의 긴 머리카락. 천장의 형광등. 온갖 기억들이 두서없이 나의 머릿속에서 플래쉬 불빛처럼 터졌다. 숨을 쉴 수가 업어..살려줘..살려줘 제발..닥쳐..너희들의 신을 불러봐..지금이라도 구해달라고 불러보란 말야..역겨운 향료냄새.. 아아 밉다...자신을 위해 남을 짓밟는 이 사람들이 밉다..죽어서도 복수하고 싶다...그 짧은 순간 죽은 수미의 기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수미와 일체가 되어 그녀가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기억들이 나에게 되살아나는 것일까. 수미의 15년전 기억들이 어떻게 내 체내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머리카락. 매일 나의 몸을 조금씩 파고들던 머리카락들. 그 속에 수미의 기억의 조각들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수미는 자신의 원한을 담은 머리카락들을 날마다 조금 씩 내 몸속에 찔러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몸속에 남은 머리카락의 뿌리들은 나의 몸속의 핏줄 속을 돌고 돌아 마침내 나의 뇌에 박혀 신경과 동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남긴 흔적들로부터 지금 부활하고 있었다! “사탄이여 만세!” 막 형민이 내 가슴의 문양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그때였다. 내 몸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내 머리의 모공 하나하나에서 검은 것이 사방으로 일제히 분출되어 나갔다. “으악 이게 뭐야!”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남자들이 얼굴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났다. 형민도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몸부림쳤다. 그의 손은 나의 머리에서 뻗어나간 검은 머리카락으로 칭칭 감겨있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들이 형민과 원장, 그리고 남자들을 옭아매었다. “이..이 괴물..” 형민은 나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휘릭. 머리카락 한 다발이 내 의지에 따라 내 손발을 묶고있던 끈을 간단히 잘라내었다. 나는 형민을 노려보며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억난다. 모든 것이 서서히... “괴물들은 바로 너희들이야! 나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15년 동안이나 그 좁은 곳에 가둬두었지. 나는 죽어서도 하루도 쉴 수 없었어. 매일 목이 졸리는 고통에 혀를 늘어뜨리며 나를 구해줄 사람을 찾아 이곳을 떠돌아야했어.” 나의 목소리는 어느새 여자의 톤으로 변해있었다.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면서 두피가 뜯어질 것처럼 긴장되었다. 손가락 끝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며 손톱이 피부를 찢으며 꾸불꾸불 자라났다. 나는 준영으로서의 기억을 그대로 보존한 채 수미의 의식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이미 준영이라고도 수미라고도 할 수 없는 복합 인격체가 되었던 것이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되살아났다. 15년 전. 이수미라는 이름의 여자였던 나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머리카락 속에 기억을 담는 능력이었다. 그전부터 어떤 사물에 손을 대면 그 사물에 대한 인상이 머리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물론 아주 구체적인 정보나 장면까지는 아니어도 불길한 사연이 깃든 물건이면 어김없이 음울하고 슬픈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물건에 깃든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은 그 대상이 내 몸의 일부분일 때 더욱 구체적으로 향상되었다. 옛날부터 손톱이나 머리카락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있다는 말이 있다. 신체의 일부분인 손톱이나 머리카락에는 내가 생활하면서 겪는 모든 정보에 노출되어있고 어떤 형태로든 그 흔적을 간직하게 마련이다. 모의고사를 보다가 잘 기억이 안 나던 문제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풀면 이상하게도 답이 잘 떠오르곤 했다. 공부를 할 때의 정보가 머리카락 속에 입력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책을 펴놓고 보듯이 아주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답 두개를 놓고 망설일 때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음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기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남들보다 조금 기억력이 좋은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다. 같이 공부를 하면서 만나게 된 단짝 친구 경란은 유난히도 내 머리카락을 부러워했다. 시험에 합격을 하더라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몇 년째 긴 머리를 자르지 않아 지저분하다며 누구나 손가락질하던 나에게 그런 경란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나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모든 자료를 공유했다. 심지어 수년간 정리한 노트까지도.성격이 활달한 경란과는 공부파트너로서도 잘 맞았지만 무엇보다 음악적인 취향이 같았다. 당시 나의 유일한 취미는 레코드판에 담긴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내 방에서 헤드폰으로 레드제플린의 음악을 들으며 머리를 맞대곤 했다. 그랬던 경란이 시험을 얼마 앞두고 마녀로 변한 것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경란이 나의 머리채로 나의 목을 휘어감고 조를 때 나는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필사적으로 나의 모든 기억, 영혼, 그리고 원한을 내 머리카락 속에 집결시켰다. 언젠가 나의 원혼이 머리카락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그의 몸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길 바라며. “아아아아! 죽어버렷!” 다음순간 내 상상속에서의 경란은 순식간에 늙은 마녀의 얼굴로 일그러졌다. 틈을 탄 원장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나에게 돌진했던 것이다. 다음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땡그렁..바닥에 떨어진 칼에는 그녀의 두 손이 그대로 붙어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원장의 두 손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바닥과 벽의 비닐위에 마구 뿌려졌다. 채찍처럼 휘두른 나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머리카락이 손이나 발처럼 내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손목이 잘린 원장은 짐승같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목을 휘어감아 공중으로 들어올리자 원장의 두 발이 공중에 떴다. 원장은 숨을 헐떡이며 손목만 남은 두 팔을 버둥거리며 내 머리카락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항상 혼자뿐이던 나에게 넌 친구를 하자며 접근했지. 난 그때 뭣도 모르고 행복했어.” 스스스스-뻗어나간 머리카락은 그녀의 목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얼굴 전체가 머리카락으로 시커멓게 뒤덮힌 원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내가 머리카락을 조이자 처절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난 나만이 꿈꾸던 빛나는 세계가 있었어. 모두의 비웃음을 이기고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어. 그 모든 것을 너는 너의 욕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망쳐버렸던 거야.” “우..웃기지 마. 누가..너같은 것한테 관심을 가졌을 줄 알아? 넌..그 분의 제물에 불과했을 뿐이야..” 머리카락 뭉치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너의 친절한 겉모습에 속고 말았지. 하지만 너에게 살해당하고 영혼만 남은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하지만 이제야 이 남자의 몸을 빌어 나는 살아났어. 이제 네가 당할 차례야” 머리카락을 더욱 세게 조였다. 비명소리도 찢어질 듯이 날카로와졌다. “죽어.” 한번 더 머리카락에 힘을 주자 으적..으적..두개골이 아스러지는 소리가 나며 뇌수와 섞인 진득한 핏물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와작..그나마 구체를 유지하던 형상이 완전히 으스러져지며 좌아악..핏물이 쏟아진다.. 머리카락을 풀자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구겨진 고깃덩어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살과 턱뼈, 이빨이 한데 뒤섞여 피 떡이 되어있었다. 시뻘건 고깃덩이의 어디서도 그 아름다웠던 보조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으아아아...용서해줘..난 아무 죄도 없어..저 여자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갑자기 총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머리카락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총무는 바닥에 닫기도 전에 머리카락에 얽혀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악 사탄님! 이방인들로부터 저희를 구원해주소서.” 총무가 공중에 뜬 채 울부짖었다. “그래, 너희들의 신이 지금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아..안돼..이..이러지마..” 머리카락에 두 손을 꽁꽁 묶인 형민이 나의 의지에 따라 바닥에 칼을 집어 들었다. 팔에 힘을 주며 저항했지만 수미와 일체가 된 나에게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칼을 집어든 형민은 남자들을 향해 칼을 들어올렸다. 첫 번째 대상은 창민이었다. 쉭- 칼이 공기를 가르자 벽에 한줄기 피를 흩뿌리며 창민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창민은 몇 번 쿨럭거리며 피섞인 기침을 토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형제여 이러지 마시오!” 동윤과 총무가 애원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동윤의 다부진 몸도 이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쉬익-형민의 칼이 다시 한번 위 아래로 움직이자 암녹색 창자가 동윤의 배에서 뭉클거리며 쏟아져나왔다. 나의 머리카락들은 촉수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의 창자를 휘감고 마구 뽑아내었다. 못 쓰게 된 카세트테이프처럼 마구 뽑혀져 나온 창자가 터지면서 벽과 바닥에 피와 더러운 오물이 쏟아냈다. “끄아아아아악” 자신의 내장이 뜯겨나갈 때마다 동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다. 폐가 터져나가는 것 같은 처절한 비명이었다. 마침내 위장과 혀까지 배를 통해 뽑혀 나온 후에야 동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나의 머리카락이 형민의 두 팔을 조종해 칼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총무는 잠시 후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직감했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안쓰럽게 떨고 있었다. “준영아..이..이러지마..우..우린 친구잖아? 그렇지?” 형민이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보며 애원했다. 역겹게도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나도 조금 전까진 그런 줄로 착각했었지.” “용..용서해줘..나도 사실은 그들의 조종을 받고 있었어..내 의지가 아니었다구 흐흐흑..” “네 말은 믿을 수 없어.” “정말이야. 내 말을 믿어줘. 내가 뭣 때문에 친구인 너한테 그렇게 까지 했겠니?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어머니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 말야..주..준영아..제발 이..이러지마..” 형민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 맹렬한 분노에 억눌렸던 측은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되살아났다. 준영으로서 형민과 함께 했던 학창시절과 추억들이 생각났다. 함께 밴드를 하며 울고 웃었던 기억, 엠티에 가서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 여자와 헤어져 낙담한 형민의 등을 두덕여 주었던 기억 등등. 생각해 보면 나는 형민와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형민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손목에 감은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 스스슥..머리카락들이 수축되며 다시 나의 모공 속으로 들어왔다. 방안을 뒤덮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일제히 철수하자 시체와 피로 범벅된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그 남자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나는 형민과 총무를 남겨두고 뒤돌아서서 손 문손잡이를 돌렸다. 손톱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목소리도 어느덧 원래의 남자 톤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형민의 손으로 총무를 처리하고 형민만 입을 다물면 된다. 이것이 목숨을 살려주는 댓가로 형민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바로 그 때, “사탄님 만세!” 형민이 고함을 지르며 내 등 뒤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그를 향해 순간적으로 뻗어나간 검은 기둥은 형민의 몸을 휘감고 공중에 들어 올려 그대로 총무를 향해 내던져버렸다. 퍽. 두개의 두개골이 맞부딪혀 박살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는 다시 피의 폭죽이 터졌다. 그로 부터 일 년이 지났다. 그 기묘한 사건은 신흥 사이비종교집단의 집단 자살극으로 언론에 알려졌다. 나는 야만적인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쳐진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형사와 언론의 집요한 취재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주차장 옥수수밭에서는 사람의 두개골과 절단된 신체부위등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유가족들은 집단 위령제를 지냈다. 특히 수미가 이 사건의 최초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장터에서는 무당까지 불러 수미의 혼을 달래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화장터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마치 검은 뱀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한편 사탄을 섬기는 흑마술 단체의 교주가 원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매년 고시합격자를 배출했던 S고시원도 문을 닫고 말았다. 사건 이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총무실에서 발견되었던 ’라구엘의 서‘는 사탄과 그의 72악마들을 불러내는 의식이 기록된 일종의 흑마술서였다고 한다. 또한 텃밭에서 발견된 ’아키실론‘이라는 식물은 사탄교의 인신공희에 사용되는 아프리카산 식물이었는데 그 성분이 대마초보다 중독성과 환각성보다 훨씬 강력해서 제물은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그때 고시원에서 보고 들었던 이상한 것들은 ’아키실론‘의 향에 의한 단순한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수미의 간절한 의지에 의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확신을 할 수 없다. 끔찍했던 그날 밤 이후 내 몸에 들어왔던 수미의 영혼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 형민을 향해 뻗어나간 검은 머리카락뭉치가 내 몸에 남겨진 수미의 마지막 흔적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뿜어져 나간 이후 나는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응급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장에서는 기묘한 문자들이 몸에 그려진 채 알몸으로 기절해 있는 나와 5구의 처참한 시체, 엄청난 양의 피와 피에 엉겨붙은 기괴한 머리카락 뭉치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상했던 것은 고시원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검은 커튼이 단 하루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떠들어댔지만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수미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아마 내 방 벽에 있었던 기괴한 낙서들도 수미가 내 몸을 빌어 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한바탕 못된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 지나고 그날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무렵, 나는 옷 수납상자의 바닥에 숨겨두었던 레코드판을 다시 꺼내었다. 음악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깡그리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앨범 자켓을 열었을 때 그 곳에서는 레코드판 대신 동심원 모양으로 말려있는 한 타래의 머리카락이 나왔을 뿐이었다. 검은 커튼과 마찬가지로 레코드판 역시 한줄기의 긴 머리카락이 동심원으로 골을 이루며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꺼번에 지난 15년의 세월이 지나간 듯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수미는 자신이 좋아했던 레드제플린의 음악과 함께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나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이제 목적을 달성한 그것은 검은 커튼과 마찬가지로 한줌의 머리카락으로 흩어져 있었다. 15년동안 그 좁은 곳에서 나오고 싶었던 수미의 한이 풀리면서 머리카락을 고체로 응축시켰던 불가사의한 힘도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으리라. 그날 밤 이후 고시공부는 접었다. 끝없이 누군가를 이기고 위로 올라가야만 하는 생활에 진저리가 났다고나 할까. 사회는 이런 나를 위해 ‘낙오자’라는 말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다. 안정적인 직장과 고정된 수입을 포기한 대신 다시 깁슨 기타를 둘러맸다. 그리고 하루 종일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와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기타를 칠 수 있는 즐거움을 얻었다. 요즘 나는 작은 클럽에서 동료들과 연주를 하며 받는 적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어쩔 땐 돈 대신 맥주를 받는다. 소녀들 3-4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팬클럽도 생겼다. 풍족하진 않지만 마음 깊숙이 삶의 충만감이 느껴진다. 언젠가 나의 성공을 위해 남을 짓밟고 싶어질 때, 나는 검은 커튼이 쳐진 그 고시원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인생을 나눌 때 비로소 나의 삶도 완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것이다. 합주가 혼자 힘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듯이 말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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