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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대의 장창(張昌)의 난이 끼친 영향, 그리고 8왕의 난
게시물ID : history_32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晉世祖司馬炎
추천 : 6
조회수 : 136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12/24 13:25:35
장창(張昌)은 의양(義陽,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남부에 있는 신양시(信陽市) 신야현(新野縣).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 맹장 위연(魏延)의 출신지이다) 출신의 만족(蠻族)이다. 이 자가 303년에 수천 명의 무리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 들었다.
 
장창의 출신지인 의양은 당시 형주 관하에 속해 있었다. 이때의 형주 방면군 사령관은 사마흠(司馬歆)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이 자는 그의 성씨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의의 손자였다. (사실, 사마의에게는 사마사, 사마소 형제 이외에도 몇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더 있었다는 아들들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여음왕(汝陰王) 사마준(司馬駿)은 중달의 7남이다. 사마흠은 그 사마준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 자가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각박했다는 것이다. 결국, 현지의 만족들은 이같은 각박한 정치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장창이 반란을 일으킨 배경은 꽤 복잡하다. 실은 그 해(303년) 연초에 조정에서 조서가 내려왔다. 현지에서 민병들을 동원하여 익주(益州)로 가서 현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조서의 내용이 상당히 과격했다. 그것도 (민병들을) 하루빨리 닦달해서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나가는 지역의 경계 안에서 닷새 넘어서 머무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현지의 상급 관리들은 면직시킨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나쁘게 말하자면 ‘한순간이다. 안 그러면 너 한방에 갈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이것은 완전히 협박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이 조서에서 내린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당장 관직에서 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원정 나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모두 가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형주 관하의 여러 고을들 중에서도 특히 강하(江夏) 일대는 대풍작이었다. 그래서 타지역에서 유입되어 온 수천 명의 유민들이 밥을 얻어먹으러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주변은 곧 유민들로 인해 불안과 동요로 심해지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탄 장창은 현지의 주민들을 유혹하여 현지에서 반란군을 모집한다. 이때, 여러 유민들과 병역 기피자들 대다수가 장창 측으로 몰려들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장창은 반진(反晋)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특, 이류 형제의 유민반란군에 이은 또다른 대형 유민 집단 반란의 서곡이었다.
 
반란의 배경과 초반 과정에서는 이미 교재에 나와 있으니, 여기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초반에 관군이 장창군과의 교전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거듭한다. 그 후, 장창군이 벌써 번성에까지 진출하자, 사마흠은 이들을 막으러 출격하였으나, 장창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후, 장창군은 형주 북부 지구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거듭하였고, 그들을 잇달아 격파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는 관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한 적도 있었다. 이 무렵, 장창의 유민 반란군은 세력이 점차 강대해져서 급기야는 형주, 서주, 양주, 예주 등지 일대의 경내를 대부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관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결국 장창군은 참패한다. 장창은 남쪽으로 달아나 숨었다가 이듬해 304년에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 장창의 난은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팔왕의 난과도 적잖은 관련이 있었다. 장창의 난의 원인을 제공한 형주 방면군 사령관 사마흠은 8왕의 한 사람이었던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막상 사마경이 패망하자, 자신도 연좌될 것을 두려워한 사마흠은 역시 8왕의 한 사람이었던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과 관계를 맺는다. 당시 사마영이 대장군으로 있었다. 장창의 난이 일어나자, 사마흠은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그들을 토벌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또 8왕의 한 사람이었던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가 사마영과 사이가 벌써 나빠지자, 사마흠과 사마영이 서로 짜고 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그래서 사마흠의 출진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결국, 사마흠은 부하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스스로 출격했다가 장창군과 교전 끝에 살해당한 것이다.
 
역시 8왕의 한 사람인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도 이 장창의 난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조정에서 장창 토벌군을 발동했을 때, 사마옹에게 조서가 내려졌었는데, 직속 부대 및 옹주(雍州)군을 이끌고 가서 장창을 토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사마옹은 이 조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급기야 옹주군은 자사(刺史)가 직접 지휘하여 장창 토벌전에 나섰다. 여기서 사마옹은 또 한 번 소란을 피운다. 옹주자사를 압박한 사마옹이 그 군대를 탈취해 버렸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사마옹의 농간과 훼방으로 전투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관군이 초반에 장창군에 밀리고 형주 일대 및 그 주변의 경내가 거의 다 장창군의 수중에 넘어가 버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두 사례는 8왕 사이에서 권력 투쟁을 둘러싸고 얼마나 암투가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이들 8왕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 헐뜯고 물어뜯으며 자신들의 기득권만 챙기느라 정신없었고, 오로지 권력 투쟁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반란 진압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장창의 난 같은 유민 반란 사건이 터지자 나 몰라라 하고 뒷전으로 새 버리기 일쑤였으니, 권력이란 존재를 둘러싼 암투는 그야말로 치열하고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8왕의 이러한 암투는 장창의 유민 반란군 세력을 점점 강대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던 것이다. 물론, 반란군의 수령인 장창이 8왕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벌인 반란이 8왕의 난으로 인해 더욱더 불길이 올랐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같은 정황으로 보아 당시 서진 조정의 정치가 얼마나 심각할 정도로 문란하고 부패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때는 백치(白痴) 황제로 유명한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의 치세였다. 황제가 백치였기 때문에 아주 무능할 대로 무능해 있었다. 더구나 귀족들은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고, 사치에 빠져 허세만 부리는 등 서진 조정은 그야말로 무능과 부패의 극치였다. 그러니, 각지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끔찍한 실상들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이민족들이 대거 유입되어 오면서 사회적인 혼란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 갔다. 급기야 사회적 유동 현상이 도미노 같은 부비트랩처럼 잇달아 터져나가 중국 대륙을 난세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팔왕의 난도 8왕이 서로 권력 투쟁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외의 일에는 신경쓰지 않다가 장창의 난을 만났고, 급기야 이 두 반란이 서로 합쳐져 서진의 멸망에 일조했던 것이다.
 
결국, 장창의 난은 팔왕의 난의 진행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또다른 유민반란군의 봉기들과 유민들의 강남 지방으로의 대거 유입을 잇달아 발생시키는 부비트랩이 되었던 것이다. 그 부비트랩은 잇달아 터져 나가면서 수많은 여파를 몰고 왔다. 그리고 그 여파로 형주, 익주를 포함한 화북, 화중 지방 사람들이 대거 떼지어 강남 일대로 유입되면서 당시의 중국 대륙은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특히, 이 반란에서 파생된 장창의 부장 석빙(石氷)의 난은 강남의 토착민들에게 크나큰 위협을 가져다 주었으며, 나중에는 사회적 유동 현상으로 이어져 동진(東晋)의 건국 및 그 이후의 수많은 정치 사건들과 전쟁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만다. 훗날, 왕돈(王敦)과 소준(蘇峻)의 반란이 진압되고 난 이후에 이르기까지 장창의 난이 남긴 수많은 후유증은 채 가시지도 못했다.
 
장창의 난은 영가의 난 및 이민족들의 대거 유입 등의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과도 연계되어 서진을 멸망으로 몰아간 대사건 중의 하나의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유민(流民)이란 존재는 참 무서운 것이다. 한 번 옮겨가기 시작한 인구 대이동은 역사에 크나큰 파장을 몰고 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대재앙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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