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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센 - 3
게시물ID : lovestory_327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검은날개
추천 : 0
조회수 : 63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1/11 14:10:35
읍내 목욕탕의 일은 농사일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출근을 한다는 점과 남편의 형과 항상 대면한다는 것이 이내 걸리긴 했지만 매달 들어오는 50만원이라는 돈은 내게 있어서는 그렇게 적은 돈이 아니었다. 
또 단 한 번도 월급이 밀리는 법도 없었다. 
고정수입으로 인해 나는 3년짜리 적금통장을 만들어 매달 10만원씩 저축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또 집안 살림을 하는 것이 더 수월해 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돈을 동생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한 달,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고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농사일이 끝나면 항상 읍내로 나가 내게 전화를 걸어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먹고 싶은 것이 없다고 말을 전화를 끊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먹고 싶은 것이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려고 하면 어느 덧 목욕탕 앞에 와서는 내가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을 내보이곤 했다. 
이런 일들을 영길엄마에게 말하면,

“천생연분이네!! 우리 영길아빠는 나 영길이 가졌을 때 먹을 걸 말해도 늦었다고 안사다 준 적이 많고, 사줘도 이상한 것을 사다줘서 막 싸우고 그랬는데 새댁 남편은 용하네. 점집 차려도 되겠어.”

라고 말을 해줬다. 
영길엄마는 한국 생활을 하면서 사귀게 된 단 한명의 친구이다. 
목욕탕에 자주 오는 읍내 여자로 나이는 50대 정도 되어 보인다. 
펑퍼짐한 몸매를 가졌고 항상 파란색에 꽃무늬가 들어가 있는 몸빼바지를 즐겨 입었다. 
또 파마를 했는데 너무 오래 풀지 않아서 그런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곱슬거렸다. 
그 부분을 지적하면 영길엄마는

“이게 양키들 사이에 유행하는 아프로파마여.” 

라며 넉살을 떨었다. 


근무시간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뜨거운 물에 몇 시간씩 찜질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단골손님이다. 
하루는 옷장 키를 주면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새댁, 쉬엄쉬엄 일해. 그러다 코피 쏟아지겠네.”

라고 말하며 영길엄마가 느닷없이 삶은 계란 하나를 내게 줬다. 
그리고 몇 시간동안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한 것이 연의 시작이 되었다. 
영길엄마는 목욕탕 앞 슈퍼마켓주인이었다. 
3년 전에 물건을 들다가 허리를 다쳐서 몇 달간 고생을 했는데 수술을 할 상황에 이르렀지만 시골에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그 큰돈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침을 맞거나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경제적인 타격으로 인해 그만두고 하루에 한 번씩 목욕탕을 찾아 찜질을 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해하며 산다고 했다. 
영길엄마는 마치 이야기보따리 같았다. 
슈퍼마켓을 운영해서 그런지 동네에 모르는 소문이 없었다. 
하루는 영길엄마가 내게 이야기 하나를 해 줬다.
 
“6년 전에 새댁처럼 외국인 여자를 부인으로 삼았던 사람이 있었어. 동네에...”

영길엄마는 좌우로 눈을 흘긴 뒤 말을 이어나갔다.

“홍이네 알지? 왜, 노랑머리 쌍둥이 데리고 다니는 남자 있잖아. 감나무 옆집 사는 남자. 몰라? 하긴 요즘에는 집에서 잘 나오지를 않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다. 사실 홍이네로 눈이 파란 여자 한명이 시집을 왔었어. 소련에서 온 여자라는데 키도 엄청 크고 예쁘게 생겼었어. 홍이아빠가 무슨 보물 다루듯이 애지중지 하면서 알콩달콩 살았는데 한 1년이 지났나? 애를 가지게 된 거야. 그 때가 홍이아빠가 나이가 서른여덟인가 했지? 난리가 났지. 마을 사람들 죄다 불러놓고 잔치를 버렸어. 음식도 먹이고 선물 주고 아주 난리 브루스를 쳤는데, 세상에 아이 낳고 산후조리 다 끝나갈 때쯤에 야반도주를 한 거야 글쎄. 처음에는 홍이아빠가 농사일이랑 가게까지 다 때려치우고 오토바이 하나 사서 서울까지 몇 달 동안 이 잡듯이 뒤졌는데 결국 못 찾았잖아. 이제 나이 사십 넘어서 결혼 하려고 해도 애가 2명이나 있는데 어찌 하겠어? 국제결혼 하겠냐고 물어보면 그건 절대 안한다고 그런다네. 상처가 엄청 컸었나봐. 하루는 술을 엄청 먹고 애들한테 물건을 집어 던지더래. 그 때 애들한테 저주 받은 애들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그 지랄하는 걸, 홍이아빠 형이 겨우 뜯어 말렸다고 하잖아. 그런데 홍이아빠가 집어던진 물건에 홍이가 머리를 맞아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하잖아. 에휴, 불쌍해라.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뭐 어째든...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 맞다. 생각났어. 에고, 내 정신 좀 봐. 나이 처먹으니까 기억력도 가물가물해. 호호호호. 아무튼 그래서 홍이아빠가 1년 전부터 집 밖에 잘 나오지도 않고 애들만 돌보고 있어. 홍이아빠 형님 집에서 농사일 하고, 애비랑 애미가 철물점 일을 대신해 준다고 해. 새댁도 공항에서 일도 있었지만 말이야. 지금 미움 받는 건 다 그 파란 눈 여편네가 도망 쳐서 피해 보는 거야. 새댁도 혹시나 야반도주 해버릴까, 혹시나 해서 가족들이 걱정하는 거야. 떡두꺼비 같은 손주 낳으면 이제 별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나 잘하고 그래.”

영길엄마는 손바닥으로 내 팔을 툭툭 치며 걱정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임신 8개월째를 지내고 있을 때였다. 
정말 영길엄마의 말처럼 집에서는 조만간 손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경사를 벌였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나를 대했다. 
또 나를 그렇게 싫어하던 시형도 목욕탕 일은 그만두고 몸조리를 잘하라고 말해주며 보약을 한 첩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쌍둥이를 낳게 되었다. 
두 아이는 모두 건강했고 둘 다 남편을 닮아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목욕탕 일을 도우며 지내다 보니 어느 덧 한국에 온지도 3년하고도 절반이 지나있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큰딸 설희가 “아빠”라고 말을 한 것에 신이나 몇 날 며칠이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다녔다. 
또 다시 시간이 흘렀고 가을이 다가오자 농사일이 바빠졌고 나는 목욕탕 일을 그만두고 다시 논으로 나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에효. 나라에 쌀이 넘쳐나 쌀값이 폭락하고 있다는데 우리 다른 일이나 알아볼까?”

남편은 한숨을 푹푹 쉬며 다른 일이 없는지 찾아보며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시아버지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한마디씩 거들곤 했다. 
동네에는 추수철이 다가왔지만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큼 기쁜 마음으로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과수원은 과수원대로, 논은 논대로, 밭은 밭대로 모두가 울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쌀이 제일 문제였다. 
계속해서 쌀값이 폭락했고 다음 해 모내기를 할 돈은 둘째 치고 당장 생활비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유기농이다 뭐다 하면서 이것저것 다 해보지만 결국 돈만 지출할 뿐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남편은 내게 항상 말했다.
 
“내가 다른 건 다 지키지 못해도 당신만큼은 꼭 지켜낼게. 혹시나 어딘가에 당신이 숨어있다고 해도 내가 꼭 찾아서 당신 행복하게 해줄게.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당신 곁에 있어줄게. 약속해.”

그런 말을 들으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를 위한 대답이었다. 
사실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는 관계도 거의 가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같은 이불을 덮고 있을 뿐 서로 완전히 남남이었다. 
그가 몸에 기대거나 만질 때면 이내 남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잠이 청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처음에는 조르고 달래보던 남편도 내가 몸을 돌릴 때면 그냥 묵묵히 잠을 청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유난히 음산했던 새벽, 3년간 넣어놨었던 적금통장과 비상금으로 모아놓은 돈을 들고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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