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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소설] 레테
게시물ID : readers_328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국백휴
추천 : 3
조회수 : 22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12/22 14: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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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이나 청각보다 깨질 듯한 두통이 한발 먼저 기상을 알려왔다. 매일 아침 이런 식이다. 어젯밤에도 술을 마셨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주위를 둘러본다. 가장 먼저 곰팡이에게 잠식당해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벽지가 보이고, 천장 바로 밑에 붙어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다리, 레깅스, 청바지, 스타킹, 꼬불꼬불한 털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굵은. 제길.
 

잔뜩 구겨진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가구들이 낡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열려진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욕실을 제외하고는 청소한 흔적도 없다.
 

상관없다. 냉장고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그만이다. 냉장실을 열어 술과 부패가 시작된 정체 모를 음식물을 비집고 물을 꺼냈다. 컵 한가득 물을 따른 뒤, 가벼운 손놀림으로 냉동실을 열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분명 고기로 꽉 차 있어야 할 냉동실이 텅 비어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벌써 다 먹었을 리가 없으니, 친구 놈들 소행이 틀림없다. 찌꺼기만 처리해주기로 해놓고, 알맹이도 전부 다 가져간 것이 확실하다. 내가 잠든 틈을 노린 것이겠지.
 

분노를 넘어 살의가 피어올랐다. 개X식들, 죽여버릴까? 시야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아니야, 아니야. 친구를 죽여서는 안 된다. 찌꺼기를 직접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맞이하기 싫었다.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작은 한숨과 함께 후드를 꺼내 걸쳤다. 어차피 손질이 끝나면 더러워질 몸이니 한꺼번에 씻을 생각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며 후드 밖으로 삐져나온 앞머리만 대충 정리했다. 빛나는 외모에 만족하며 냉장고 옆에 곱게 세워져 있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
 

택시를 타고 인근에 위치한 달동네로 향했다. 사람이 사는 집인지, 비어있는 집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외형은 엉망이었다. 주로 노숙자나, 방황하는 청소년, 파산한 가정이 찾는 곳이다.
 

경찰이라 하더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흔한 CCTV도 없는 동네이니 사냥터로는 적격인 셈이다. 택시에서 내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 의욕 없이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는, 그러나 싱싱하게 살아있는 초식동물의 냄새가 코를 두들겼다. 행복하다.
 

우선은 연기를 위해 몰입이 필요했다. 나는 육식동물이 아니다. 너희와 같은 초식동물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주소가 적힌 포스트잇을 손에 쥔 채 두리번거리며 비탈길을 올랐다. 영락없는 초식동물의 행색이었다.
 

얼마나 올랐을까? 작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함정을 파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캐리어를 옆에 세워둔 채 털썩 주저앉았다. 목적을 얻기 위해서라면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쯤은 참을 수 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행운에 황급히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던 소리는 나를 확인할 수 있는 모퉁이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이어졌다. 그때야 고개를 들었다.
 

횡재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오랜만에 질기지 않은 야들야들함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오려 했지만, 애써 틀어막았다.
 

저기. 혹시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좀 바쁜데, 일단 어디 봐요.”
 

그녀는 포스트잇을 건네받기 위해 다가왔다.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와 인상이 구겨졌다. 붉게 물들인 긴 생머리에 빨간 립스틱, 가슴이 드러나는 딱 붙는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쳤다.
 

화류계 여자인 듯싶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구겨진 인상을 편 뒤 그녀와 눈을 맞췄다.
 

다행히 가까운 곳이네요. 저를 따라오세요.”
 

미리 챙겨놓은 벽돌로 아무 의심 없이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가냘픈 그녀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직업이 주는 편견과 달리 순진한 여자였다.
 

!”
 

느닷없는 숨소리에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니, 초등학생도 안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두려운 표정으로 입을 막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배부터 시작해 가슴, 얼굴,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런 애X끼한테 뒤를 잡힌 상황이 치욕스럽기도 하고, 즐거운 사냥시간을 방해당한 것이 열 받기도 했다.
 

여자의 피가 묻어있는 벽돌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이는 겁을 먹은 채 주저앉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도 착한 녀석이었다. 어미를 찾는답시고 뒤돌아 도망가지도, 시끄럽게 울어 재끼지도 않으니 말이다.
 

***
 

욕실로 돌아와 캐리어를 열고 오늘의 사냥물을 꺼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이와 여자라서 구겨 넣으니 간신히 두 마리 모두 넣을 수 있었다.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보니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향수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여자부터 빨리 씻기기 위해 입에 붙여놓은 테이프와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얼른 옷을 벗겨 한쪽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아무 감흥은 없었다. 호랑이는 토끼와 사슴 같은 존재하고는 짝짓기를 맺지 않는다.
 

샤워기를 틀어 얼굴을 향해 물줄기를 뿜어냈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더니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황스러운 것이리라. 지금부터가 클라이맥스다. 육식동물의 우리에서 눈을 뜬 초식동물의 반응은 언제 보아도 흥미로웠다. , 이제 나를 즐겁게 해줘!
 

하지만 여자의 행동은 예상을 빗나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에도, 샤워기를 들고 눈을 빛내고 있는 내 모습도 그녀에게는 아무 충격도 주지 못했다. 몸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기어가 입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꼬마야, 꼬마야!”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아이의 몸을 흔들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미약한 신음과 함께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살려주세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요?”
돼요, 아주 잘 돼요. 원하시는 만큼 제 몸을 탐하셔도 좋고, 죽여도 상관없어요.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고, 소리치지도 않을게요. 제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빠르게 내뱉어대는 말을 듣고 있자니 혼란이 찾아왔다. 내가 아는 화류계 여자들은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이고, 돈만 밝혀대는 알기 쉬운 족속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행동은 마치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몸을 날리는 어미의 모습이 아닌가.
 

이 꼬마, 알아요?”
몰라요.”
그런데 왜 자신을 바쳐가면서까지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여자는 처음으로 시선을 회피하며 입술을 질겅거렸다. 나는 아직도 뿜어져 나오는 샤워기를 껐다. 정적이 찾아왔다. 불편하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하다.
 

고개를 한 번 흔들어 생각을 지운 뒤, 욕실 바닥에 놓여있는 칼을 꺼내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여자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망한 인생,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먼저 세상을 떠난 제 동생이 딱 저 정도 나이였어요. 동생은 잃었지만, 저 아이만은 살리고 싶어요. 제발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랬군요.”
 

눈물을 흘리며 빌고 있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해준 뒤, 아이의 심장을 찔렀다.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 좋은 손맛을 느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서열은 내가 위건만, 자꾸 저 여자에게 끌려가는 듯한 모습에 기분이 나빴다. 그 바람에 별미인 아이의 염통을 훼손시켰지만, 위엄을 보여줬으니 충분했다. 그녀는 힘겹게 기어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아이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알몸을 적셨다. 문득 생리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작게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미안해, 미안해 가람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 내 눈앞에서 아이가 죽어 나갔어. 이번에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가람아. 미안해 아이야. 내 잘못이야. 이번에도 내 잘못이야.”
 

그녀는 횡설수설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뭐가 미안한지, 왜 그녀의 잘못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왜 옷을 벗고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 다가간 여자였다. 이어진 아이의 죽음.
 

자신의 가슴에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끌어안고 정신을 놓아버린 듯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고통의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눈물. 이제껏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것도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아이를 위해 흘리는 눈물.
 

새빨갛게 적셔진 타일과 그녀의 하체, 그곳에 떨어지는 여자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피의 색깔이 옅어지는 것은 내 착각일까?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연해져 가는 피의 색깔만큼 내 마음도 모두가 읽어버릴 듯 투명해질 것만 같았다.
 

공포감에 휩싸이며 오한이 몰려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천천히 다가가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런데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여자는 부릅뜬 두 눈을 맞췄다. 빨갛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이 악마, 쓰레기, 살인마, 정신병자 새끼! 너 같은 건 살아있을 필요가 없어. 지옥에나 떨어져. 죽어! 죽어버리라고!”
 

손이 떨려왔다. 어째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도대체 왜. 이제까지는 항상 1명씩만 사냥해왔었다. 그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 여자는 달랐다. 2명이라 그런가? 초식동물도 뭉치면 육식동물에 대항할 용기를 얻는 건가?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대로 칼을 내리꽂았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진 여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피가 얼굴에 튀어 지저분해졌지만, 지금 내 머릿속만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
 

문이 열리고 친구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나는 사냥을 하고, 이들은 찌꺼기를 처리해준다. 그 대신 수고비 명목으로 고기를 일정량 받아가는 것이다. 일정량. 그렇다 일정량이다. 갑자기 비어있던 냉동실이 생각났다. 한마디 쏘아붙일까 생각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식탁 위에 부위별로, 취향별로 알맹이를 분류해놓았다. 이들의 몫이다. 내 몫은 없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친구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냥은 끝났다.”
 

동요하며 웅성거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들은 굉장히 담담했다. 마치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반응. 혼란스럽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들은 머리를 감싸 안고 있는 나를 향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할당량을 챙겼다. 물론, 찌꺼기도 함께였다. 비소를 머금으며 하나둘 집을 빠져나갔다. 뭐지? 마치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몰려왔다. 입술을 깨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참은 채 무언가에 이끌리듯 침대로 향했다.
 

***
 

시각이나 청각보다 깨질 듯한 두통이 한발 먼저 기상을 알려왔다. 매일 아침 이런 식이다. 어젯밤에도 술을 마셨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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