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사람들 -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
제 가 2009년 10월부터 올린 글이 숫자 ‘만’ 많아져 어느새 500번째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500이란 숫자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 혼자 조그만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주제를 ‘노무현의 사람들’로 택했습니다.
인간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를 사랑했던 진짜 남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님이 이번 글의 주인공이십니다.
저와 평생을 같이한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아내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노무현 대통령 사랑하는 거
1/10 정도만 저를 사랑해 보세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색깔이 달라서 그렇지
저는 아내도 무지무지 사랑합니다.
살다 보니 ‘팬클럽’이란 게 다 생깁디다.
이 모든 게 평생 동지이자 친구인 그 남자 덕이지요.
그 남자 덕(?)에 죄없이 큰집도 들락거렸지만
저의 단심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그런 걸 보면 세상은 아직 살 만하지요?
.
저는 전라도 부안에서 태어났지만
젊어서부터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답니다.
그 당시엔 지방색이 대단했습니다.
말도 마세요.
그 편견과 냉대!
정치꾼들이 지방색을 부추겨 정치하던 그 시절,
망국적인 지방색이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때,
저는 아주 특별한 남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이익을 좇아 부나비처럼 떠도는 정치판에서
당선이 확실한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를 팽개치고
‘전라도당’이라고 눈길도 주지 않는 부산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바위에 계란 던지듯
지역감정에 도전하는
‘무모(?)하고도 허술한 이상주의자’인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며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깨야 나라가 살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무모한 남자와 무한한 정서적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정치인을 키우고(?) 싶어
제 발로 그를 찾아가 후원인을 자청했습니다.
당신을 돕고 싶다고….
제가 인재를 보는 눈은 있지요?
자신의 영달이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채워주는 게 정치다’
라고 말하는 그 정치인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모든 사업가가 그러하듯
이익창출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제법 탄탄한 사업체들을 일궜습니다.
지나고 보니 하늘이 제게 많은 물질을 주심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남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후일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강금원의 후원이 아니었으면
난 대통령은커녕 예전에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 경선 승리!
대통령 선거 승리!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號’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수구세력들은 기득권의 판을 흔들었다는 죄명으로
그 남자를 권좌에서 밀어내기 위해 무모하게도
‘탄핵’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백그라운드인 시민들은 그를 구해냅니다.
.
옆에서 그 남자의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떠나지 않은 것은
그가 가는 방향이 항상 옳았고
흔히들 호남 사람들 신의 없다고 폄하하는데
‘신의 있음’을 제가 증명하고도 싶어서
힘닿는 데까지
아무 조건 없이 그 남자를 도왔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떠난다 해도
그 옆에 최후로 남아있는 한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대한민국 최고의 권좌에 올랐습니다.
남들이 저보고 그럽니다.
의리의 사나이라고.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전두환엔 장세동이 있고, 노무현엔 강금원이 있다’라고….
그런데 비교가 좀 거시기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좀 섭합니다.
장세동은 강자와 개인의 이익을 따랐고
저는 그 남자가 추구했던 약자의 편에 서는 정의감을 따랐다고나 할까요?
그 남자는 외롭고도 험난했던 5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마침내 胎를 묻은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생애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그를 보며 저도 참 좋았습니다.
그냥 바라만 봐도 덩달아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그가 그렇게 맘 편히 휴가를 즐긴 건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둘이 동심으로 돌아가 풀 썰매도 타고
딸랑딸랑 꽃마차도 타고…
이래 봬도 1호 차랍니다.
레일바이크도 타보고…
그리고 맨발로
냇가에서 물수제비도 떴습니다.
전임 대통령의 가치를 늦게 깨닫고
멀고 먼 봉하마을까지 와 준 방문객들에게
평생지기인 그를 대신하여
마음을 담아 머리 숙여 감사를 전합니다.
마음 같아선 한 분씩 안아 드리고 싶다니까요.
너무 감사하고, 예쁘고, 고마워서….
제 맘 아시지요?
존경하는 이기명 선생님과
퇴임 후 시민으로 돌아가 소소한 행복을 즐기던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그리운 시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녀석 결혼식 주례를 그 남자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흔쾌히 승낙을 했지요.
계절도 아름답고 복닥거리는 도심보다는
제 소유의 골프장 잔디밭에서 하면 근사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친절하신 조선일보께서는
이 골프장 결혼식을 무슨 부도덕한 일처럼
‘친서민을 표방하던 참여정부 인사가 골프장 결혼식이 웬말이냐?’
사설까지 동원하여 비난하였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편안하고 좋은 내 집 두고
불편한 남의 집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라는 말인지요?
즈네들이 하면 뭐든지 용서가 되고
이쪽 사람들이 양주만 마셔도 뉴스로 만드는
참 대단한 찌라시입니다.
참 놀라운 건 찌라시들의 선동에 눈이 가렸던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그 남자의 가치를 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미어터지게 봉하마을에 몰려들었습니다.
솔직히 그 남자도 놀랐고
저도 놀랐습니다.
저는 그가 추구했던 가치가 늘 옳았기 때문에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할 줄은 알았지만
그 시기가 그렇게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퇴임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니
검은 손이 서서히 그를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저는 그로부터 물질의 도움을 받은 게 없습니다.
그에게 폐가 될까 싶어 재임 기간 중에
사업체도 키우지 않았고
세무감사 꼬박꼬박 받았고
그의 재임기간 중
제 골프장이 전국에서 세금도 제일 많이 납부했답니다.
설마 지방에 있는 제 조그만 골프장이
전국에서 가장 성업 중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지요?
이유는 단 하나.
힘없는 국민들 외엔 아무 기반도 없는 그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의 왼팔인 안희정이
정치적 타겟이 되어 직업도 없이 놀고먹으니
그를 포함한 ‘그 남자의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힘 있는 자들에 줄을 대는 이권청탁도 아니고
먹고 살라고 대준
이른바 ‘생계형 지원’인 셈이지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사는 데 힘이 들면
대장을 닮아 자존심이 억수로 센 사람들이지만
자칫 검은돈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치졸하고 더러운 자들이 그걸 죄로 만들더라구요.
제 회사들은 주주가 저 혼자입니다.
수많은 투자가들인 주주들의 돈을
개인 돈처럼 쓰면 안 되는 그런 회사가 아니고
‘1인 주주’인 개인사업체입니다.
제 돈을 제 맘대로 좀 썼습니다.
그게 죄가 되나요?
제가 마약을 했습니까?
도박을 했습니까?
이권청탁을 했습니까?
그 남자를 지키고 싶어
그 주변의 백수된 사람들 먹고살라고 도와줬습니다.
또 그 남자가
퇴임 후 꿈인 농촌을 살리고 싶어해서
봉하마을 개발비로 70억 원 정도 투자했습니다.
제가 무슨 이익금 배당받으려고 투자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농촌에서 무슨 떼돈이 쏟아집니까?
임기 중에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있다 해도 그런 힘 쓸 사람도 아니지만
더구나 퇴임 후 무슨 힘이 있다고
그걸 ‘공금횡령’이란 흔하디흔한 이름으로 둔갑시켜
정치 검사들이 저를 교도소에 보냅디다.
‘악성뇌종양’을 앓고 있는 제가
자기 때문에 죄도 없이 수감되는 걸 보고
그는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 했습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았다’고….
야비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그 남자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옥죄는데 기가 찼습니다.
찬란하고 아름답던 봄날!
‘봄날이었는데도 봄인 줄 몰랐던’
어리석은 국민들을 울리며
그가 영원한 세계로 떠났습니다.
검은 손의 최종 목표가 자신임을 알았기에
죄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렇게 치졸한 방법으로 죽음으로 내몰 줄이야…!!!
4際 때 뇌종양 수술을 마치고…
아직도 그 남자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어 슬펐습니다.
‘당신의 뜨거웠던 삶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힘든 고통도 나누려 했습니다.’
영원한 친구 강금원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자고 했던
‘평생의 동지’였고 ‘친구’였던 그에 대한 마음을
박석에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아픕니다.
저 노란 꽃길을 따라 떠났을까요?
내 삶을 바쳐 사랑한 사람!
보고 싶은 사람!
당신의 선택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해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내 영원한 동지
노!
무!
현!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강금원이라는 사람
“강 회장은 리스트 없어요?” “내가 돈 준 사람은 다 백수들입니다. 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돈을 왜 주었어요?” “사고 치지 말라고 준 거지요. 그 사람들 대통령 주변에서 일하다가 놀고 있는데 먹고살 것 없으면 사고 치기 쉽잖아요. 사고 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도와준 거지요.” 할 말이 없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의 수족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서 백수가 되었는데, 나는 아무 대책도 세워 줄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기가 딱했던 모양이다. 강 회장이 나서서 그 사람들을 도왔다. 그동안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한 일도 없는데 다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강 회장이 계속한다. “지난 5년 동안 저는 사업을 한 치도 늘리지 않았어요. 이것저것 해보자는 사람이야 오죽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렇게 하면 내가 대통령님 주변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에 일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강 회장이 입버릇처럼 해오던 이야기다. “회사일은 괜찮겠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지난번에 들어갔다 나오고 나서 직원들에게 모든 일을 법대로 하라고 지시했어요. 수시로 지시했어요. 그리고 모든 일을 변호사와 회계사의 자문을 받아서 처리했어요. 그리고 세무조사도 다 받았어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다시 덜컥 구속이 되어버렸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든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강 회장이 나를 찾아온 것은 내가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였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은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 전화로 물었다. “1년에 5천만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 회장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한테 눈곱만큼도 신세 질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첫 마디를 이렇게 사람 기죽이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눈치 안 보고 생각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장수천 사업에 발이 빠져서 돈을 둘러대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자연 강 회장에게 자주 손을 벌렸다. 당시 안희정 씨가 그 심부름을 하면서 타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정치인이 정치나 하지 왜 사업을 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 구박의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직접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2000년 부산 선거에서 떨어졌고, 2002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는 장수천 빚 때문에 파산 직전에 가 있었다. 강 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강 회장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다. 아예 그럴만한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퇴임이 다가오자 강 회장은 퇴임 후 사업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강 회장의 생각에는 노무현이 중심에 있었고, 나의 생각에는 생태 마을이 중심에 있었다. 결국 생태마을 쪽을 먼저 하고 재단은 퇴임 후에 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그렇게 해서 주식회사 봉하가 생겼다. 이름이 무엇이든 우리가 생각한 것은 공익적인 사업이었다. 70억이라고 하니 참 크게 보인다. 그런데 강 회장의 구상은 그보다 더 크다. “미국의 클린턴 재단은 몇억 달러나 모았잖아요. 우리는 그 10분의 1이라도 해야지요.” 이것이 강 회장의 배포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기가 어렵다. 꼭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강 회장 혼자서 부담을 해야 할 형편이다. 강 회장은 퇴임 후에 바로 재단을 설립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좀 천천히 하자고 했다. 강 회장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미안하고 모양도 좋지 않으니 출연할 사람들을 좀 더 모아서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퇴임 후 바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각종 조사와 수사가 시작되고,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도 시작되니 아무 일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모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재단은 표류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 취직이라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봉하에 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봉하에 강 회장은 매주 하루씩 다녀갔다. 그런 강 회장이 구속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그의 건강을 걱정한다. 제발 제때에 늦지 않게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09년 4월 1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