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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역사적 근거 드디어 발견
게시물ID : sisa_3284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달려라왕땅시
추천 : 1
조회수 : 30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2/12/20 17:43:57


그래 문제는 쪽수 많은 경상도인데 왜 그리 한나라당에 열광할까?

가 저의 의문이었어요. 한나라당 출발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싶었습니다.


제가 머리가 나빠서 쉬운 글을 읽어야 이해가 되거든요.

뒤지고 뒤지다가 찾아냈습니다. 짧은 글이라 완전 고맙고 보물찾은 기분.


박정희 시절부터 지역차별정책을 통해 정권의 이익을 

도모함
====> 그 시절부터 경부고속도로 부산항. 대구섬유단지
수도권을 제외하면 가장 집중적으로 산업화의 헤택을 받은곳.
또  정치경제적으로 헤택을 받으며 상도 사람들이 승승장구
윗자리를 차지한것.
산업화를 우리가 해냈다는 경상도 사람들의 자부심.


퍼온 데


그 당시 10대들이야 아무 생각없을 거고, 가난한 고졸 이하의 20대 이상 사람들은 

철저히 언론통제속에 세뇌됐을 거고 그들이 지금의 50대 이상 세대이며, 

소수의 대학생들(문재인 등등)만 당시 정권의 실체를 알고 지금까지 싸워온 거지요.

그러했습니다. 




이번 대선은 다수의 무지 : 소수의 지식인의 대결이었습니다.

또한 다수의 경상도 : 소수의 나머지 지역의 대결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전라도 차별 안 했더라면 전라도도 광주항쟁, 피칠갑이 없었을 거고 한나라당 지지했겠지요.


박정희가 경상도 차별 했더라면 경상도도 부산항쟁 발생했을 거고 민주당 지지했겠지요. 

부마항쟁 때 피칠갑을 안 하는 바람에 쪽수 많은 경상도가 한나라당 골수 팬덤이 됐습니다.


참고로 부마항쟁에서 얼마나 피해가 있었나 살펴봅시다.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시위인파는 5만명으로 불어났다. 폭발한 민심은 도심 곳곳에서 방화를 일으켰고 
공공건물에 대한 습격은 이튿날도 계속됐다.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은 시위대의 집중 타격 대상이었다.
10.16-11개 파출소 파괴, 방화
10.17-21개 파출소 파괴, 경찰차 6대 전소
부마항쟁에 구속자 1500여명 가운데 학생은 수십명에 불과했다.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운 계엄령 앞에 결국 부마항쟁은 막을 내렸다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부마항쟁의 심각성을 보고하자

박정희는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마사태 같은 것이 있으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차지철도 박정희를 거든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결론 : 70년대 재미를 봤던 고졸 이하의 가난한 수많은 부산,대구 사람들이 지금껏 생존하면서 나라를 뭉개고 있다.

          인간은 배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초졸 노동자 전태일은 정말 깨친 인물이다.

          결론이 존나 쿨해.




덧붙여 : 그들의 자녀들인 20-40대도 불안해. 

           이번 지지율을 보라. 

           20-30대 : 30%가 수첩 지지.

           40대 : 40% 수첩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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