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매력(1) 사람은 상대적이다. 역시, 항상 그러했다. 인생은 끝이 없을 것 같은 계단을 오르는 행위다. 내가 얼마나 많이 올랐는가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를 보는가. 아직도,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위를 바라보는가.아니다. 우린 아래로 시선을 내려 올라온 계단을 바라본다. 지금의 내 위치보다도 오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보며 위안 아닌 위안과 그 위안 속의 안도를 얻는다. 앞으로의 내 글이 그러하다. 사람은 상대적이다. 자신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선 나보다 행복하지 못한, 힘든 이의 삶을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우린 이기적이게도 안도한다. 나는 그래도 저 사람에 비해 괜찮은 편이구나.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 하지만 여기서 그 생각으로 멈추지 않길 바란다. 그 생각이, 그래, 저 사람도 하는 데 나라고 못할 것인가로, 그 의지로 발전되길 바란다. 나의 글이 그 상대적 우월감과 그 우월 의식에 따른 안도감, 그리고 그 안도를 통한 발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 과거는 미화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미화가 덜 되고 있는 나의 어렸을 기억부터 더듬어 보아야겠다. 어렸을 때 오빠와 나는 자다 깨는 일이 많았다. 그 이유는 거의 세 가지였다. 첫째는 빚쟁이가 찾아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소리 때문에, 둘째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부리는 난동 소리 때문에, 셋째는 내 옆에 있는 엄마가 사라질까봐.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오빠와 나는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이 있다. 의족을 낀 아저씨는 의족을 빼서 의족이며 다른 살림살이며 여러 가지를 엄마에게 집어던졌고, 무서운 눈동자를 굴리며 우릴 떨게 하였고, 엄마에게 가래침을 뱉었다. 오빠와 난 소리도 지르지 못했고 장애인들에게 당하는 엄마를 지켜봐야 했다. 빚 때문이라고 했다. 매번 사업을 새로 시작하고 망하고 시작하고 망하고를 반복하던 사업병에 걸린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엄마는 가래침도 맞아야 했고, 의족도 맞아야 했고, 눈알을 빼서 던진다는 협박도 당해야 했다. 그런 빚쟁이가 가고나면 아버지가 등장했다. 미싱 일을 하면서 오빠와 나를 키우는 엄마에게 아빠는 돈을 달라고 했다. 돈이 없으면 아버지는 난폭해졌다. 어떻게 돈이 있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폭력이며 사기며 여러 차례 경찰서에 들어갔고 그 때마다 합의를 하며 아버지를 빼온 것은 어머니 주머니 속에서 나온 돈이었는데. 관절염에 걸린 손으로, 몇 년 째 하혈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 큰 병원을 찾지 못하는 그런 나의 엄마는 그렇게 오빠와 나 때문에 힘겹게 살았다. 그런 힘겨움을 우린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엄마가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하지만 엄만 혼자서 살아질 용기도 없었다. 연탄을 사용하던 시절, 엄마는 오빠와 나를 앉혀놓고 연탄가스로 같이 죽자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깨어나야 했다. 혹시 연탄가스로 엄마가 사라지지 않을지, 오빠가, 내가 사라지지 않을지 일어나 냄새를 맡은 후 엄마가 내 옆에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잠에 들었다. 난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더 어렸을 때 기억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가 2학년인 것은 이때부터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두 번씩만 들어오셨고, 빚쟁이가, 아버지가 찾아오시지 않는 나머지 날은 우리 세 명의 가족에게 찾아온 평온한 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행복의 순간도 매번 빚쟁이들과 아버지가 무참히 깨버리고 가곤 했지만 말이다. 나는 2학년이고, 오빠는 5학년이던 그때, 우습게도 우린 엄마와 아버지가 언젠간 이혼하실거란 걸 알았다. 아니 이혼을 하시길 바랐다. 2학년이던 내 눈에도 나의 부모님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빛나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점점 작아졌고, 아버지는 점점 포악스러워졌다. 이혼을 하시면 엄마가 죽지 않아도 된다. 이혼을 하면 빚쟁이도 찾아오지 않고, 아버지도 엄마에게 돈을 뺏고 때리지 않을 것이다. 이혼만 하면 내가 잠을 자다 깨야 하는 세 가지의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 이혼, 이혼, 이혼. 우리 부모는 이혼을 해야 한다.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내 마음 속에 우리 가족은 항상 3명이었다. 엄마, 오빠, 나. 엄마는 내게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선생님이었고 친구였다. 작은 체구였지만 엄마는 내게 너무도 큰 사람이었다. 이방인이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우리가족은 행복했다. 7시 30분쯤에 퇴근하는 엄마가 오기 전에 오빠와 나는 방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한 후에, 엄마를 마중 나갔다. 엄마 손을 잡고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함께 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 주말이 되면 일찍 일이 끝난 엄마와 과자 파티를 했다. 몇 천원어치 과자를 사다가 쟁반에 담아 놓고 먹었다. 그리고 같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내 걸음으로 40분쯤 가야 하는 도서관이었지만 행복했다. 내 옆에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엄만 텔레비전보다 라디오를 좋아했고, 그 라디오보다 책을 좋아했다. 100만원도 되지 않는 월급이면서 100만원도 넘는 책을 잔뜩 사주셨다. 오빠와 난 학원에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에 엄마는 우리가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책을 많이 사주신 것이리라. 그런 소중한 책이었는데, 엄마가 죽어가면서 번 돈으로 산 책이었는데, 새로 등장한 새엄마에 의해 그 책을 모두 버려졌다. 집에서 책을 읽고, 엄마와 함께 도서관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지금 학생들이 생각하면 어이없겠지만 나는 학원이 너무 가고 싶었다. 친구들이 모두 다니는 학원, 남들이 다 하는 것이기에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떼를 쓸 수 없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면 아버지 대신 찾아오는 경찰들 때문에, 엄마는 나를 학원까지 보낼 여유를 갖지 못하셨다. 당시 나는 매달 8000원의 용돈을 받았다. 그 용돈을 1년 가까이 모아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서 반에서 1등을 하면 한달 더 수강료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난 두 달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오빠와 난 우리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철이 든 아이들이었다. 엄마가 힘들어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엄마의 어깨에는 아버지와 빚쟁이들이 쌓여있었다. 오빠와 나까지 쌓이는 순간 엄마는 사라질 것 같았다. 내게 엄마는 항상 위태로웠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던 그 해, 엄마는 이혼을 했다. 우리가 살던 집에 우리가 아닌 이방인이 들어왔다. 이제 가족이 아버지, 오빠, 나로 바뀌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집에서 나갔다. 우리들의 친권은 나의 가족이 아닌 이방인이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생이 되던 해까지 내가 아버지를 만난 시간은 채 한 달이 되지 않을 텐데, 친권이란 이름으로 내 부모를 자기네 마음대로 정해버렸다. 이혼 하던 날 아버지는 나와 오빠를 불러 치킨을 사주었다. 아빠가 왜 이혼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엄마가 바람이 났단다. 아침에 일을 가 저녁 7시 30분이면 집에 와, 우리와 밥을 먹고 잠이 드는 엄마가, 주말이면 우리와 과자를 먹고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와 잠을 자던 그 엄마가 어느 틈에 바람이 났단다. 너희 엄마가 잘 따르던 박언니라고 알지? 그 여자랑 카바레에 가서 바람이 났어. 엄마랑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박언니와 카바레에 가서 바람이 났단다. 그래, 믿어주자. 믿어주는 척이라도 하자. 이제부터 내 아버지라지 않느냐, 내 가족이라지 않느냐. 이맘때 아버지는 관광버스를 하셨다. 본인 소유의 관광버스를 가지고 사업을 하셨는데, 우리와 함께 잘 살려면 일을 하고 와야 한다고 했다. 관광일은 원래 한 철이라 지금 많이 벌어야 한다고, 너희끼리 며칠만 지내고 있으라고 했다. 집이 갑자기 커졌다. 방 두 칸짜리 집이 이렇게도 커질 수 있구나. 2학년 때 살던 집에서 아버지 합의금을 내고 더 꼭대기로 올라가 얹은 집이 이렇게 컸었구나. 집엔 오빠와 나 둘만 남았다. 엄마도 돈을 벌어 우리를 찾아온다고 했고, 아빠도 돈을 벌어 우리에게 온다고 했다. 온다는 사람은 둘이나 됐는데, 우리는 우리밖에 없었다. 오빠와 나. 엄마는 가끔 전화를 걸어 우셨고, 나는 그런 엄마를 달랬다. 우린 잘 지내고 있어. 아빠가 용돈을 6만원이나 줬어. 오빠는 얼마 준줄 알아? 9만원을 줬어. 대단하지? 그러니 걱정 하지 마.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엄마가 이혼한 거 잘한 일이라 생각해.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 괜찮대두. 나는 전화기를 잡고 전화를 건 엄마도, 전화를 받는 나도 위로 했다. 두 달 가량을 오빠와 나는 방치된 채 시간이 지나갔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우리 집에, 이 작은 집에 가정부라는 사람이 왔다. 그 가정부는 집도 청소해주었고, 밥도 해주었다. 며칠 뒤 그 가정부는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며칠 뒤 그 가정부는 새엄마가 되었다. 간단했다. 엄마가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기 전까진, 엄마 말을 빌리자면 오빠가 2살이 되던 그 때부터 아버진 엄마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으니, 15년이란 세월이 걸렸는데, 아버지가 새엄마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시간은 보름이면 충분했다. 아니 열흘이었던가. 가정부, 새엄마, 가정부, 새엄마. 새엄마에겐 아이는 없었고, 얼떨결에 생긴 오빠와 나에게 모성애 또한 있을 리 없었다. 우리에게 아줌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는데, 아줌마라고 부른 날이면 아버지한테 맞아야 했다. 아버진 참 쉬운 논리를 가졌다. 낳아만 주면 아버지인거고, 새엄마라고 소개만 시키면 우린 바로 엄마라고 불러야 했으니까. 엄마가 그리웠는데 차마 말을 못했다. 오빠도 나도 정이 그리웠다. 그래서 그 가정부에게, 아니 새엄마에게 차차 적응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우습다. 적응하고 있으면서, 나조차도 그 가정부에게 엄마라고 부르고 있으면서 오빠가 엄마를 잊을까봐 무서웠다. 계란프라이를 해서 밥을 먹으면서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엄마가 오빠는 흰자 끝이 살짝 탈 때 줘야 좋아한다고, 나한테 오빠 계란프라이 할 때 그렇게 해주랬어. 엄마가 나한테 꼭 그렇게 해주라고 말했어.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게, 새엄마에게 들리지 않게, 우리들의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고, 우리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 나는 나에게, 오빠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잊지 않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는 오빠와 내게 그 여잔 가정부가 아니고, 새엄마도 아니고 앞으론 우리들의 진짜 엄마니 엄마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요했다. 아버지에게 맞던 엄마, 엄마 빈 자리는 우린 아버지의 폭력으로 채워졌다. 엄마는 알지 못해야 해. 엄마는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린 잘 지내고 있는 거니까. 엄마가 당신은 돌보지 않으면서, 죽어가면서 모은 돈으로 겨우 얻은 우리의 보금자리. 아버지는 그 뒤 세금도 월세도 아무것도 내지 않아 보증금을 다 까먹고 우리는 빈 몸으로 쫓겨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매달 준다는 그 용돈은 한 번뿐이었고, 새엄만 우리에게 밥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아버지와 새엄마, 오빠와 내게 갈 곳이 서울 하늘 이 큰 곳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와는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 그 집에서 나오면서 나와 오빠는 우리가 살던 보금자리도, 돈을 많이 벌어 데리러 온다던 엄마도 잃었다. 아버지는 그 여자와 우리를 데리고 돈을 벌어온다던 그 관광버스로 갔다. 그 관광버스에서 우리는 잠을 잤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고, 근처 화장실에서 씻으며 학교를 다녔다. 급식을 하던 시절이 아니라 친구들의 밥을 같이 먹지 않으면 이틀에 한 번 밥을 먹기도 했다. 성장기였던 나이, 사춘기였던 그 때 나는 많이 비참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난 집이 없다고, 난 버스 안에서 자고, 그 버스를 타고 학교에 온다고. 차라리 죽었으면, 차라리 엄마가 연탄가스로 죽자할 때 죽었으면, 차라리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아니, 엄마가 이혼하지 못하게 하지 말라고 할 걸.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엄마는 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 후회, 후회. 두 달 정도 버스에서 살았다. 머릿속에 버스에서 살던 그 시기의 기억들은 꼬여있다. 처음 텔레비전에서 부분기억상실증을 이야기할 때 나는 낯설지 않았다. 내 기억이 그러하니까. 부분, 부분, 조각, 조각. 그 때의 시절을 다 기억한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시간이 흐르길 바랐고, 또 시간이 흐르길,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길 바랐다. 그래도 끝이 보이지 않았던 그 순간순간들을 내 스스로 지워 내려갔다. 두 달 정도 버스에서 살고 나는 아버지 후배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주공임대아파트. 15평은 될까. 방 두 칸에 작은 부엌, 베란다가 있는 그 집에 원래 살던 그 가족 3명과 우리 가족 4명, 총 7명이 살게 되었다. 우리가 쓴 방은 작은 방, 그 방엔 작은 이층 침대가 있고, 이층 침대 옆엔 당시 아버지의 키로는 다리를 채 뻗지도 못 할 공간이 있었다. 오빠와 내가 이층 침대를, 아버지와 새엄마가 그 밑에서 잤다. 그 집엔 엄마가 없었다.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는 엄마의 빈자리를 너무도 잘 보여줄 만큼 지저분했다. 바퀴벌레, 바퀴벌레, 바퀴벌레. 새엄마와 난 집을 치우기 바빴고, 그 집과 함께하면서 없는 돈은 더 없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집에 사는 약간 모자란 언니와 친해졌고 새엄마가 주지 않은 밥 대신, 언니가 사주는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고 며칠을 먹었다. 가끔 해주는 새엄마의 밥이 눈물 나게 고맙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 수업을 받다 학교에서 쓰러졌다. 나는 쓰러지기 전에도 울고 있었고, 쓰러진 후에도 울고 있었다. 내 상황이, 내 현실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현재가 계속 되어 미래가 될 거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졌고, 그 날 담임선생님과 한의원에 갔다. 영양실조에요. 몸이 전체적으로 많이 안 좋네요. 심장도 간도 위도 장도 나쁘단다. 몸이 너무 허약해져 전반적으로 몸 전체가 안 좋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침을 맞고, 뒤 돌아 또 침을 맞기를 몇 주를 했다. 성장기의 아이가 영양실조라니. 담임선생님은 퍽 당황하셨으리라. 병원을 나왔다. 배고프지? 선생님 집에 가서 밥 먹자. 그 말에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밥을 먹을 수 있는 거구나. 며칠을 새엄마 눈치를 보며 지내야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었던 밥, 그 밥, 그 밥. 불가능의매력 (2) 나는 어렸을 때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빚쟁이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아버지가 와서 엄마를 때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엄마가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래, 결국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내 기도가 어려웠는지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내 기도가 부족한걸까. 그럼 딱 한 가지만이라도,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그런데 역시나 들어주지 않으셨다. 엄마는 항상 아팠고, 이혼 하신 후 가끔 만날 때도 엄마는 아파보였다. 하나님은 없다. 예수님도 없다. 있다면 이렇게 까진 하실 수 없다.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잔인할 수는 없다. 매일 매일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기도도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착한 우리 엄마, 나도 아니고, 나 아프지 말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착하디착한 우리 엄마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기돈데. 그것도 들어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하나님은 있을 리가 없다.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정말 하나님은 없으니까. 있을 수가 없는 거니까. 그리고 우습게도 새엄마는 무속 인이었다. 새로운 신이 생겼다. 새엄마가 모시는 그 할아버지 신에게 빌어보자. 엄마 얘기만 하면 그 할아버지 신이 새엄마에게 말할지도 몰라. 할아버지 신은 새엄마 편일 테니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몰라. 아버지의 일이 잘되게 해주세요. 새엄마가 항상 건강하게 해주세요. 오빠도 저도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엄마도, 전에 엄마요. 그 엄마도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매일 3번씩 108배를 했다. 어느 날은 1080배를 했다. 그때는 조금 더 엄마 얘기를 했다. 열심히 하니까 내가 좀 더 엄마에 관한 기도를 해도 봐주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아버지 일은 잘되지 않았고, 새엄마의 건강만은 괜찮아진 듯 보이나 오빠와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엄마도 건강해진 것 같지 않았다. 새엄마의 신은 새엄마 밖에 보이지 않았나 보다. 가끔 생각했다. 신은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아니라고 믿고 싶었는데 정말 신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실체란 말인가. 신이 있다면 나를 보고 있을 텐데.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왜 내 말은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는 걸까. 엄마가 보고 싶다. 정말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왔다. 나를 만나러 학교에 찾아왔다. 빨간 티코차를 몰고 학교에 찾아왔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박 언니와 공장 일을 시작했어. 박 언니 알지?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고 차 가지고 왔어. 박 언니 차야. 응, 알아. 그 박 언니 아줌마. 엄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엄마다. 이제 다시 엄마를 볼 수 있게 된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보금자리를 떠나오면서 엄마와 연락이 끊겨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이제 엄마와 연락할 수 있다. 내 엄마. 진짜 내 엄마. 왜 연락이 안 됐어? 이사 나오면서 연락을 할 수 없었어. 그 뒤로 엄마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어디로 이사 갔어? 참, 엄마 호출기 번호 알려줬잖아. 월계동으로 갔어. 그거 아버지가 가져가 버렸어. 그랬구나. 연락이 안 돼서 학교로 왔어. 오는 내내 너희 아빠나 친구들 만날까봐 걱정이 돼서. 그래서 차타고 온 거구나. 웬 차인가 했네. 잘 지냈니? 밥은 잘 먹었고? 당연하지. 오빠는? 당연히 오빠도 잘 지내지. 엄마를 위해서라도 오빠와 나는 잘 지내야 하는데, 새엄마는 오빠와 내게 밥을 거의 주지 않았다. 새엄마는 무속 생활을 하면서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는 경우가 많았고, 아빠는 일을 찾는다며 나갔다가 늦게 오셨고, 우리는 굶어야 했다. 집에는 쌀도 없었고, 김치도 없었고, 우리에겐 돈도 없었다. 새엄마는 월계동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 한 번을 탄다는 계산 아래, 차비를 몇 십 원까지 맞추어 주셨다. 그땐, 나에게 그땐, 며칠을 1시간 30분 거리를 걸어야만 겨우 모을 수 있는 몇 천원으로 허기를 달래던 때였다. 그런데 학교에서 쓰러진, 그 뒤로 담임선생님은 몇 주 동안 날 데리고 침을 맞히고, 댁에 데려가 손수 밥을 지어 먹이셨다. 점심시간이 되면 뒤쳐져 움츠려 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거나 내 손에 돈 몇 천원을 쥐어 주셨다. 이걸로 밖에 나가 김밥이랑 떡볶이라도 사먹고 와. 나는 이제 하루에 두 끼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땐, 나에게 그땐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나에겐 감사한 일로 바뀌어 일어나던 시기였다. 월계동 근처에 사시던 선생님은 아침마다 함께 학교에 가자고 하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도 편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고, 하루에 500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이지만 차비를 모을 수 있었다. 몇 백 원씩 모아 모아, 저금을 했다. 그 맘 때 엄마가 내 통장에 돈을 넣어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 돈이면 굶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돈은 차마 쓸 수 없었다. 두 가지 이유였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엄마가 눈물로 번 돈을 차마 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돈이 엄마 같았고, 그 엄마를, 상처뿐인 내 엄마를 나는 그렇게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려주리라. 혹시라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시간이 흘러 나는 크고, 엄마가 오빠와 나를 찾으러 오게 된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혹시라도 온다면 그 때 돌려주리라. 두 번째 이유는 언젠간 버려질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새엄마는 언제든 날 버릴 사람이었고, 그렇게 되면 오빠와 난 우리끼리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엄마를 괴롭힐 수 없다. 엄마가 우리 때문에 더 힘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돈을 모아야 했다. 중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던 나는 너무 많이 커버렸다. 성장기를 영양실조로 보낸 내 작은 체구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아픔이 담겨있었다. 너무도 작고 너무도 큰 아이, 그게 나였다. 좁은 방에서 4명이 움츠리고 자도 불편하게 자야 하는 그 방에서 우린 너무 많이 힘들었다. 아줌마에서 엄마라는 호칭의 변화는 단숨에 바뀌란다고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쉬운 일이었던 것일까. 쉬운 일이었기에 그렇게 강요한 것일까. 맞다. 하루아침에 가족 구성원이 바뀌었고, 하루아침에 내가 살던 집이 사라졌고, 하루아침에 오빠와 내 방의 반도 되지 않는 방에 낯선 이방인 둘과 오빠와 내가 함께 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인데, 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사람인데, 그래, 맞다. 내가 원치 않아도 가능한 세상인데, 내가 허락하지 않아도 이방인들의 마음대로 내 세상을 바꾸어버리는 세상인데, 그런 사람인데, 맞다. 뭐가 어려웠을까. 이 모든 것이 가능한데, 그깟 호칭이. 너무도 쉬운 호칭이라 그런지 오빠와 나는 그 문제로 자주 맞았다. 괜찮아. 천천히 해. 아줌마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그 말을 들으면서 맞아야 했다. 왜 맞아야 하지, 괜찮다고 했잖아. 하긴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한다고 했잖아. 왜 오빠와 날 찾으러 오지 않지, 돈 많이 벌어 온다고 했잖아. 모든 것은 답이 없었다. 질문만 둥둥 떠다닐 뿐. 그것도 내 안에서만. 하루는 아버지와 새엄마가 외출한 사이, 책을 보다가 미처 침대가 아닌 바닥에 잠에 들었는데 누군가 누르는 무게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빠가 날 감싸 안고 있다. 그리고 내 대신인걸까, 아버지한테 많이 맞고 있다. 자잖아요. 왜 계속 깨우려고 그러세요. 무서웠다. 아버지가 잠자는 척하고 있는 나를 깨워 때릴까봐 무서웠던 것이 아니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폭력이 끝나지 않으면 오빠도 나를 두고 나갈 것만 같았다. 갑자기 왠지 모를 불안감. 얼른 끝나길. 얼른 끝나길. 시간이 흐르길. 어서 빨리.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이곳저곳에 멍들고 부은 오빠의 모습. 얼른 나가야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기다리시니까. 아니다, 실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잡는 오빠가 무서웠다. 아니, 오빠가 나에게 할 말, 그 말이 무서웠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듣고 싶지 않았다. 말 하지 마. 나중에 해. 나 바빠. 얼른 나가야 해. 미안해. 못 있겠어. 더는 여기서 못 참겠어. 그러지마. 안 돼. 나한텐 오빠밖에 없는데. 오빠마저 나가버리면 난 어떻게 살아. 내가 돈 많이 벌어 너 맛있는 것도 사주고 너 데리러 올게. 싫어. 난 몰라. 나 학교 가야 돼. 나 학교 갈 거야. 집에서 나왔다. 맞아, 얼른 가야해. 선생님이 기다리시잖아.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먹먹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거짓말, 거짓말. 데리러 온다고? 거짓말 하지 마. 데리러 온다고?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다 거짓말. 사라졌다. 나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오빠한테 나가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오빠와 내 대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일부러 말을 자르고 학교에 가버렸는데, 나는 이 집에 왔는데 오빠는 사라졌다. 나는 정말 혼자가 되었다. 정말, 또, 혼자가 되었다. 이번에 정말 혼자다. 아무도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될까. 정말, 정말, 정말 그 때 죽었어야 해. 그랬어야 해. 정말, 죽었어야 해. 한 가지 생각 뿐. 죽어야 한다. 죽어야 했다. 사람 목숨은 우습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난 선생님의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고, 수업을 받았고, 밥을 먹었고, 잠을 잤다. 거의 멈춰버린 성장이었지만 조금은 컸고, 다행히 그 속에서 시간도 흘렀다. 아주 천천히. 아버지는 오빠를 잃었다. 아버지가 아버지였던 적이 있기는 했을까, 아니, 아버지가 아버지이고 싶었던 적이 있기는 했을까. 오빠가 떠난 날부터 나에겐 통금시간이 생겼다. 4시 30분까지 집에 도착. 학교에서 집까지 걸으면 1시간 30분.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가면 40분쯤. 청소를 하고 학교를 나서면 이미 3시가 넘었다. 이제 걸어갈 수 없다. 걸어가야 돈을 모을 수 있는데, 그래야 선생님과 함께 등교하면서 모으는 500원 남짓 안 되는 돈인 그 돈이랑 합쳐 하루에 900원씩은 모을 수 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어서 모아야 하는데, 모아야 하는데. 아, 아니구나. 다들 떠났지. 새엄마에게 쫓겨나 오빠와 둘이 살게 될 수도 있단 생각에 모은 돈이었지. 맞다, 이제 오빠도 날 버렸지. 아, 난 이제 혼자구나. 맞아, 혼자지. 새엄마한테도 쫓겨나면 난 어쩌지. 그럼 난 이제 어디서 누구랑 살아야 하는 걸까.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의 시간은 멈춘 듯 지루하게 지나가지 않은 채 내 발목을 잡았다. 중학교 1학년, 2학년을 보내는 동안 아무도 몰랐던 내 생활들이 3학년 담임선생님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쓰러지기 시작하기 전부터 나를 매일 매일 불러 1시간정도씩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교단에 서 그때의 나의 시절과 비슷한 나이인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이 된 지금, 나의 담임선생님을 떠올린다. 나에겐 그런 열의가 있는가. 누군가 옆에 다가오면 곧 찌를 듯 한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아이, 그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 가시를 내려놓게 하기 위해 그 많은 날을 지켜 볼, 함께 할 사랑이 있는가, 그러한 관심이 내 마음 속에 있는가. 무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 분의 길을 걷고 싶어 선택한 이 길. 나는 올바르게 걷고 있는가. 그 길을 걷고는 있는 걸까. 그 시기 난 솔직히 담임선생님이 부담스러웠다. 나를 이해하겠다는 그 말이, 나를 도와주겠다는 그 말이, 허무하게 귓가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내 엄마도 내 오빠도 지금의 날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이해했다 치더라도 도와주지 못하고, 아니 도움까지 바라지도 않았어. 그저 함께 해주길 바랐는데, 그조차도 못 지켜 사라져 버렸는데, 누가 날 돕는단 말인가. 분명 의지하고 나면, 어렵게 마음을 열고나면 이런 내가 부담스러워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말하겠지, 미안하다고. 매번, 항상 그렇듯, 또 미안하다고, 그 미안, 미안, 미안. 그 지겨운 미안하단 말 그 한 마디 하겠지. 그 아픈 그 말, 미안하단 말, 그 말. 어느 정도의 거리감, 그저 담임선생님과 그 반의 학생 중 한명인 나. 딱 그 정도의 거리감. 그거면 충분하다. 내게 사람은 그런 존재다. 언제든 버릴 수 있고, 버려질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러한 관계. 그러한 존재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나는 나를 가려야 한다. 그렇게 나를 지켜야 한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결국 나를 다 보인다 해도 돌아오는 것은 결국 외로움뿐이라는 걸 절실히 깨닫지 않았는가. 가슴이 먹먹하다.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이 시기를 떠올리는 게 싫다. 아프다. 나는 그 때의 나를 기억 속 아주 깊은 곳으로 묻고 싶다. 다시는 떠오르지 않게, 꼭 꼭 숨겨버리고 싶다. 그런 기억을 애써 떠올려야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게 내 가슴에, 이 종이에 써내려가야 한다. 그래, 나도 줄곧 이야기 하던 말이 있다. 아프더라도, 정말 아프더라도, 한 번은 꼭,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맞다, 맞는 말이다. 과거가 만든, 그 과거의 아픈 상황이 만든 그런 내가 아닌, 애써 상처를 덮어놓아 언젠간 곪을 그 상처를 안고 있는 내가 아닌, 제대로 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나는 이 상처를 꺼내야만 한다. 아니, 만나겠다는 용기라도 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꺼내서 그간 곪은 상처를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야 한다. 새살이 돋기를 바라야 한다. 하지만 아프다. 너무나 아픈 일이다. 그 상처를 다시 보는 일은 그 상처 난 곳에 또 한 번 생채기를 내는 것만큼 아프다. 제가 아는 어떤 누나의 인생수기입니다. 누나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 누구보다도 빛나는 분이고 또 앞으로 더 눈부시게 날아오를 분이에요. 동의를 구해서 제 칼럼에 조금씩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작년에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셨고, 지금은 학교에 계세요. 이 수기가 지친 수험생분들께 많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www.10ball.net 기술자 님의 글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