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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본군의 병크, 구타
게시물ID : military_39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빨갱이의피
추천 : 1
조회수 : 623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8/06 20:03:25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구타 자체는 일본군만의 특이한 전유물은 아니다. 20세기 이전에는 전 세계적으로 구타가 드물지 않았고, 어느 정도 잦아든 20세기 와서도 있긴 했을 것이다. 유럽만 해도 라인배틀 시기에는 병사들에게 구타로 심한 압박을 줘서 '전열에서 이탈해서 맞아죽느니 그냥 싸우지'라고 생각하도록 세뇌할 지경이었다. 물론 이게 잘한건 아니라서 인권의식이 높아진 19세기 중반이 되면 채찍질과 같은 체벌은 공식적으로는 폐지된다.

게다가 유럽군대에서 체벌은 어디까지나 지휘관들의 입회 하에서 행해지는 군법회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영국 해군 같은 경우 이미 18세기부터 각종 위반사항에 대해 채찍질 회수를 법으로 정해놨고 심지어 채찍 규격도 정해져 있었다. 또 시행시간대도 보통 정해져있고 다른 승조원들도 모두 모여 채찍질을 지켜보아야 했다.

일본군의 진짜 문제는 총의 개선과 상비군 제도로 인한 병사 사기 향상 등의 이유로 이미 저런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여전히 구타를 자행한 것과, 그나마도 명시된 조항에 따른 체벌이 아닌, 상급자의 개인적인 목적에 따라 일정한 규정 없이 마구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일본군은 단기간 안에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대면서 구타를 묵인했다. 장교는 상급 장교에게 맞고, 맞은 장교는 부사관들을 때리며, 부사관들이 병사들 때리고, 상급병이 하급병을 때리는 구타의 쉴새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고 한다. 

게다가 '강한 군기'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한 폭력이 가해졌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 했으며, 수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고 암기를 하지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이었던 선생이 이 비슷한 벌을 자주 줬다는 나온다. 일제 시대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일본군부의 영향이 유독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병사들은 판단능력과 이성을 상실했고, 겉보기에는 상부에서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신건강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군기와 정신력을 보이지만, 실상은 가혹행위로 인하여 정신병적인 기질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점령지에서 자행된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가혹행위 등을 살펴보면 그 정도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인종차별에 눈이 먼 독일군이나, 그들의 잔인한 행각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은 소련군이 벌인 유럽의 동부전선보다도 훨씬 더 심했을 정도이다.

오죽하면, 전쟁 중의 점령지라기보다는 식민지긴 하지만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중 일부가 민간인에 대한 강간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이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 줬다고 평가했을 지경이다. 당장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세뇌시켜 오키나와 전투중 많은 주민들이 미군을 피해 동굴등지로 숨었지만 전투후 주민들을 구호하는 미군들에게 놀랐다는 증언(이 증언자는 물과 식량도 없이 며칠을 동굴속에 숨어 있다가 미군들에게 구조되었는데 한 미군이 수통을 건네주면서 자기가 먼저 한모금 마신후 건네주어서 독이 없다고 안심하고 받아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군들이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허위로 세뇌했다는 것.)도 있다. 이 증언중엔 일본군의 만행도 나오는데 동굴속에 숨어 있는동안 아기가 울어대자 조용히 시키라고 다그치던 일본장교가 아기를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의 범죄사례나, 위에서 나왔듯이 오키나와에서의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미군이 종교와 인종이 다른 현지인들과 그리 잘 지내는 군대가 아님에도 이러한 평가가 나왔다. 대체 일본군이 얼마나 맛이 갔으면 저런 반응이 나왔을까?

게다가, 자발성이 없는 이러한 외형적인 군기는 결국 병사들의 무단 이탈, 탈영, 명령 불복종, 심지어 상관폭행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에 대한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술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당연히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보니 그리 맛이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었고, 결국은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때리고 맞는게 너무 일상화가 되어 있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 해산으로 더 이상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전투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기에 전투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때에는 병사들에 대한 통제력도 느슨해진다는 큰 문제가 존재한다. 실제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그보다도 더 무서운 점은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 사회가 그대로 물려 받았다는 것. 일단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장교가 대량으로 유입되기도 했으며, 20세기 후반까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와 가혹행위가 계속되었으나 몇 년간의 노력 끝에 21세기가 넘어갈 때 쯤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해병대와 전의경 부대에서는 여전히 구타가 남아 있다.

반면에, 오히려 일본 자위대는 육상자위대의 경우, 해상자위대가 구 일본 해군 출신이 상당수 참여한 것과 달리 경찰예비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아예 구 일본 육군 소속 인물을 배제하기도 했고, 모병제라서 여러가지 처우 개선을 하다 보니 구타 사례가 없다고 한때 자랑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 일본군 시절보다 덜 할 뿐이지 구타는 여전히 남아있다(...). 더 충격적인건 일본 자위대 내의 연평균 자살자수가 한국군보다도 많다! 물론 자살원인을 구타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겠지만, 모병제인 데다가 한국군보다 숫자도 적으면서 자살자수가 한국군보다 많다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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