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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부정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게시물ID : military2_3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깐만요잠시
추천 : 23
조회수 : 2239회
댓글수 : 42개
등록시간 : 2016/09/23 01: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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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석기시대로 만들어 버려야 합니다!-
 
 벌써부터 지려버릴거 같은 포스를 풍기는 발언을 한 사람은 누굴까? 일본을 장작더미로 삼고 하루종일 불장난을 신나게 벌이던 남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등장하기 전까지만해도 미국 폭격기들이 날라오는걸 구경하면서 즐기던 일본인들은 이 사람이 등장하고나서부턴 비행기 소리만 듣고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바빳죠. 바로 커티스 르메이입니다.
커티스 르메이.jpg
한 성깔하게 생긴 커티스 르메이, 사실 스트레스로 인해 한쪽 얼굴에 안면마비가 올 정도로 고생해서 더 험악해졌다.
 
 사실 커티스 르메이의 초기 군생활은 그냥저냥이었습니다. 소위를 연달아 3번하신 분이었는데, 가난했던 집안 사정 속에서 비행기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르메이는 훗날 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에 지원하는데 이때, 처음엔 연방 예비군 소속으로 갔다가, 주방위군 육군 출신은 조종사 선발과정에서 사관생도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고 하자 망설임 없이 예비군을 때려치고 나와서 주방위군 소속으로 재입대하고 기어이 조종사 코스를 밟게 되어 조종사로서 소위로 임관하니 그의 비행기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일겁니다. 그는 이후 전쟁이 없으니 느리적느리적 승진을 하게 되어 1930년에 소위로 임관했던 그는 40년에서야 대위가 되었고 41년 소령이 되는데, 이때 그의 임무는 제305폭격항공대장으로서 아무 것도 없이 맨땅에서 폭격기 조종사들을 육성해야했고 이때 스트레스로 안면마비가 올 정도였다니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전장은 유럽이었는데, 영국에 도착한 그는 제8군의 폭격꼬라지를 보아하니 아주 개판임을 알게 됩니다. 이유야 간단했는데, 폭격기들이 폭격을 시작하고 10초만에 대공포사격을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폭격기가 격추되어 부시는 것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폭격으로 목표를 노리는 것보다 성과가 좋다는 것에 얼척이 없어하던 그는 미친 짓을 시작하는데. 회피기동을 포기하고 대열을 갖춰 직선비행만을 할 것을 주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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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기동을 안한다는 것은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아마 보통의 꼰대가 이런 소릴 했다면 다들 '개소리 ㄴㄴ 지가 안간다고 존나 개소리 쩌시네요;;'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르메이는 보통 인간이 아닌지라 아주 간단하게 병사들을 설득했는데, 자신을 최선두에 탑승해서 조종사로서 편대를 이끌고 나갑니다. 예, 지휘관 돌격입니다.
선전용-토카레프.jpg
내가 최선두에 서겠다! 우라!!?
 
 그리고 그는 단순히 우기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통계학적 분석을 들고 왔는데, 악명 높은 88mm의 명중률은 372발 당 1발이며 이정도는 B-17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데미지라는 점, 또 임무가 실패했을시 계속적으로 다시 투입하는 것보다 한방에 임무를 성공하는 것이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을 들었고 그의 이런 호기로운 도전에 따라나서게 되는데, 그는 7분간의 직선비행을 하고 무사히 폭격을 마치고 단 한기의 피해도 없이 귀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연합군의 '융단폭격'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이후 제8군의 모든 비행단이 르메이의 이러한 직선비행을 다같이 도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르메이는 이를 계기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되지요.
 
 그러나 마냥 좋을 수는 없는 것이 폭격기들이 임무를 시원스레 성공하기 시작하자 점점 폭격을 요구하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폭격기를 엄호해줄 전투기가 따라붙지 못할 거리까지 폭격해야할 일이 잦아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또 거시기한 상황이 벌어지게 됬는데 호위기 없이 장거리 출장나온 폭격기들은 적 전투기들에게 신나게 처맞았고 이로 인한 사상자가 엄청나게 속출, 또 폭격기 공포가 조성되면서 다들 임무를 거부하기 시작하면 르메이 노발대발하며'야!! 내가 앞장설테니 빨로미!!'하고 또 미친 짓을 벌이니 병사들은 또 죽지 못해 이 또라이 짓을 계속하고 무한 루프를 반복하다가 결국 폭격기 손실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윗선에서 호위기 없는 거리까지의 폭격을 금하게 됩니다. 그렇게 미쳐날뛰던 르메이 역시 몇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부임지를 옮기게 되는데...중국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냥 2차대전 당시 미군에 널려있던 '쟤 좀 미친거 같지 않아?'하는 장군들 중 한명이었겠습니다만, 그의 진정한 진가는 바로 일본에서 벌어집니다.
 
 마리아나 제도가 함락되고 필리핀에서 싸움이 끝나면서 B-29의 사거리 안에 일본 본토가 들어갈 무렵, 이때 상황은 B-29 최대의 핀치였는데 B-29는 육군이 신나게 빨아주던 장거리 폭격기였습니다만, 성적이 영 아니었습니다. 과거 필리핀을 탈환하기 전엔 중국 본토에서 B-29 편대를 파견하여 일본 본토를 살살 건들였는데, 이게 어느정도냐면 고고도 정밀 폭격을 한답시고 하는 폭격질은 하나도 안맞았고 일본 시민들은 집 옥상으로 올라와 B-29를 구경하거나 대공포가 쏘아올리는 것을 보며 구경할 정도로 신나는 일이었다고하니 얼마나 시원찮은지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르메이는 일본군 방공망이 밀집된 만주에서 B-29를 띄워서 굳이 또 최선두 비행을 선보이는데, 이때 일본군 대공포에 피격당했음에도 멀쩡한 것을 보여주면서 일본군 대공포가 얼마나 개쓰레기인지를 파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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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B-29의 높으신 분들의 평가는 거의 한조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거 기름이랑 유지비만 처먹는 개쓰레기 아냐!
 
 그리고 이를 통해 B-29 한심한 작태에 통탄을 금하지 못한 르메이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소개하는데,
 
'고도를 낮춰. 그리고 목표물을 정하지마. 싹다 부셔.'
 
아 그렇군요! 고도를 낮추면 그만이군요? 그리고 표적이 안맞으면 표적지를 졸라게 크게 만들면 그만이죠! 훌륭해요! 합리적입니다! 이러한 르메이의 생각은 도쿄의 밤을 불태우면서 말그대로 '도쿄 핫'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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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은 보지마세요.
 
 이른바 '도쿄대공습'이라고 불리게 된 이 대규모 공습은 철저하게 '도쿄'라는 도시 자체를 파괴시켜버린 것이 목적으로 기존 '군수시설을 공격!' '전략시설을 공격!'이딴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도쿄' 그 자체를 날려버리는 것이 목적이었죠. 중국에서 그는 일본군이 충칭을 소이탄으로 날려버리는 것을 보고 목조건물에 대한 소이탄의 효과가 뛰어남을 경험했던 그는 도쿄를 그냥 싸그리 불태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네이팜.jpg
하늘에서 불이 붙은 채 떨어지는 네이팜.
 
 1945년 3월 10일, 저녁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B-29가 날라오기 시작합니다. 한가지 특이점은 너무 비행기 소리가 컷단 점정도였죠.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싸이렌이 울리고 할일 없이 방공호로 향하던 시민들에게로 떨어진 것은 엄청난 양의 네이팜 탄이었습니다. 네이팜의 위력은 정말 너무나도 ㅏ괴적이었습니다. 목조건물이 대다수이던 도쿄는 말그대로 불바다가 되어버렸는데, 나름 평소에 화재발생시 대처를 위해 준비를 해온 의용소방대들은 물이 기화될 정도의 폭팔적인 화염 속에서 말그대로 인간이 녹아버립니다.
화재진압 연습중.jpg
화재진압 연습 중인 일본 시민들... 만약 대공습때도 이런 시도를 하려했다면 말그대로 녹아버렸을 것이다.
 
 살기 위해 물로 뛰어들어간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그 물은 차가운 물이 아닌 폭팔적인 화염폭풍이 조성되어 펄펄 끓는 물이었고 말그대로 강물 속에서 익어버립니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사태를 예견 못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름 화재를 대비한 방화구역을 설정했으나 이미 거대한 화염폭풍이 발생하면서 방화구역따윈 우습게 넘나들면서 화재는 끝없이 번지죠. 그리고 이 날 하루밤동안 도쿄시민 약 9만명이 사망합니다. 6만명이 부상당했으며 26만여채의 가구가 잿더미가 되었죠.
도쿄대공습.jpg
 
 
 이 대공습으로 천황의 거처까지 싸그리 불타버립니다. 신이 지켜주네 어쩌네 개소리하던 천황은 벙커 속에 숨어서 폭격이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다들 교토에 천황이 살고있지 않아? 하지만 이때만 해도 도쿄에도 천황궁이 있었으며 이때 자연스럽게 불타사라집니다.
 
 이후, 르메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모든 대도시들은 모조리 도쿄 꼴로 만들어버리기 시작했죠. 가끔 그를 방해하는 몇몇 요인들이 있긴 했습니다만, 가령 예를 들어 투하하는 소이탄 양보다 모자란 보급부터 자꾸만 카미카제 무섭다고 비행장이나 조져달라고 하는 해군 놈들, 갑자기 무슨 일본놈들을 굶겨죽여야한다고 기뢰부설이나 하라고 하는 윗놈들까지 그의 석기시대를 향한 열정에 방해를 끼얹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는 그들의 요구사항을 하나하나 이행하면서도 일본을 석기시대로 만들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조져버린 비행장들 덕분에 해군의 피해는 많이 감소했고, 그가 모자라다고 하는 보급양을 맞춰주기 위해 해군은 미친 듯이 소이탄 배달에 함정을 끌어왔죠. 그리고 일본을 사실 제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기뢰 부설'이었는데, 이른바 기아작전이라고 명명된 이 기뢰부설 작전으로 일본 물자 100만톤이 바닷 속으로 잠겼으며, 민간인 30만명 이상이 아사합니다. 당시 육로 운송보다 해운이 더 발달했던 일본에게 엄청난 치명타를 가한 것이었죠. 이로 인해 일본의 공장들은 원자재 공급이 끊기면서 대부분 스탑하게 되고 말그대로 치명타를 먹게 됩니다.
 
 그치만 그딴건 우리 커티스 르메이 취향이 아닙니다. 그냥 불태우고 불태우고 불태워야죠. 뭐 나중으로 갈수록 민간인 사상자는 많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가 딱히 민간인을 피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일본인들이 살기 위해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도망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도쿄 인구는 500만이었습니다만, 1차 폭격 직후 도쿄에 남은 사람들은 단 230만명 뿐이었단 것을 생각하면 르메이의 폭격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를 알려주게 되죠.
 
 사실 이러한 무차별 폭격에 대해서 미군 내에서도 반발이 상당했고 가장 반발이 컷던 것은 르메이의 명령을 수행하던 폭격기 조종사들이었는데, 그들이 민간인 폭격에 대해 항의하면 르메이는 코웃음 치며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예, 사실 이는 현대전이 총력전으로 진화하면서 너무나도 본질적인 것을 꿰뚫는 것과 다름 없었는데 당시 일본은 급격히 산업화를 하다보니 도시 구역설정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되는대로 마구잡이식 개발을 하게 됬는데, 공장이 있으면 그 공장 주변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노동자들이 거기서 생활하는 식이었고 또 막판에 미쳐버린 일본은 민가에도 일정한 공업 생산을 주문해서 부녀자들이 집집마다 총알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말그대로 부족한 공업력을 떼우기 위해 다같이 가내수공업을 돌리고 있던 것이죠 이때 조선 역시 놋그릇이고 뭐고 싸그리 털어가던 시기가 이쯤이기도 하고요.
 
 또한 그의 폭격 목적 중 하나는 적의 의지를 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재정신이 아니라는 것에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일본을 말그대로 인간이 살수없는 땅으로 만드는게 목적이 아닐까 싶을정도의 대규모 작전인 몰락작전을 구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몰락작전이 다가오는 것은 르메이에게도 상당한 부담감으로 그는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전쟁광이라기보다는 전쟁이 필요하다면 전쟁은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자비도 필요없이 적을 무참히 짖밟아서 승리하는 것. 이것이 그의 전쟁관점이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2차대전 이후, 그는 냉전시대에도 활약하는데,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어버려야합니다!-
 
 예, 뭐 유명한 어록이죠. 이젠.. 뭐 더한 것도 있습니다.
쿠바미사일사태.jpg
 
-소련에 당장 핵공격을 가해야합니다! 우리는 소련보다 더 많은 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총알이 많은 쪽이 이기는 법입니다!-
 
 이건 쿠바사태 때 던진 발언이죠. 사실 이정도로 호전광이던 르메이를 당시 상당히 신중파에 가깝던 맥마나라(사실 맥마나라는 2차대전 당시 르메이의 부관으로서 활약했는데, 성격은 정 반대였다.)와 케네디가 어째서 르메이를 기용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합니다. 진짜 정말로 만약에 핵전쟁이 시작된다면 르메이만큼 냉정하게 적을 죽일 각오가 되어있는 인간은 없었으니까요. 뭐 사실 냉전시대 때 르메이 말을 따랐다면 아마 지금 우린 여기 없었을 겁니다만.
 
 르메이의 사상은 2차 대전 이후는 사실 부합하지 않는 면이 꽤나 많았습니다. 그는 폭격기 성애자였으나, 이후 대륙간 탄도미사일 등의 발달은 초장거리 폭격기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고, 또한 초음속 폭격기 역시 소련의 대공미사일보다 빨라질 수는 없다는 현실에 좌절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정신나간 수준의 강경적인 태도는 핵전쟁에 대한 관점조차도 그는 '소련이 핵을 더많이 만들기 전에 우리의 핵으로 소련을 죽사발 내버려야한다고!!'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이후 역사만 봐도 알다싶이 핵전쟁은 피할 수 있는 문제였고(사실 아직도 완전히 해방되진 못한 체 계속 유예되고 있는 기분이긴 하지만.) 냉전이 종료되면서 그의 무작정적인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은 쓸데없이 지나친 초강경론에 불과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 없었죠. 또한 인명에 대한 소중함이 점점 강조되는 지금 르메이 같은 초 강경론자는 그저 정신나간 전쟁광으로 비춰지기 마련이었습니다. 애초에 '충분히 많이 죽이면 된다. 그러면 덤비지 못할 것.' 이것이 전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인 사람이니까요.
 
 르메이에게 있어서 가장 특이한 일화는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표창이었을겁니다. 그는 일본 항공자위대 창설에 도움을 많이 줬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는 그에게 욱일대수장, 그중 최고 등급인 '훈일등 욱일장'을 수여합니다. 일본인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일본 정부로부터 표창까지 받았으니... 보통 인간은 아닌 것은 분명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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