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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가 '경제위기론'을 들고 나왔다. 역시 선거의 여왕, 변신의 여왕, 말 바꾸기의 여왕답다. 지난 4·11 총선 당시 재빠르게 빨간 옷으로 갈아입고 이름까지 바꾸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위장 이혼'을 하고 '경제민주화'라는 간판을 내세워 재미를 톡톡히 보더니, 이제는 그 약발이 다했는지 어느 틈엔가 사냥개를 삶아먹고는 능숙하게 말을 바꾸고 있다.
재벌·보수언론과 입을 맞추면서 '글로벌 경제위기가 다시 엄습해온다'고 국민들을 겁주더니 경제민주화 간판을 조용히 내리고는 경제위기 극복 운운하며 민생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개혁 마케팅'에서 '위기 마케팅'과 '민생 마케팅'으로 메뉴를 바꾼 것이라 하겠다. 자신이 마치 위기 극복의 리더십과 민생 대통령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 점에서 경쟁자인 문재인 후보보다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유권자들도 그렇게 믿어줄 것이라고 단단히 자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선거의 여왕'다운 그런 선거 상술이 박 후보에게 승리를 가져다줄지 아니면 패배를 안겨줄지 선거 정치의 문외한인 필자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경제학자의 눈으로만 본다면 박 후보의 '경제위기관리'는 위기 극복은커녕 경제를 더 큰 위기로 몰고 갈 위험이 매우 크고, 박 후보의 '민생경제'는 서민·중산층의 삶을 더 어렵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논하겠다.
집안 사정 모른 채 '경제위기론' 제기한 박근혜
첫째, 박 후보는 닥쳐오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민생'을 잘 챙기겠다고 한다. 하지만, 박 후보가 과연 민생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혹자의 지적대로 "평생을 제대로 된 직장 한 번 가져본 적이 없이 빼앗은 재산으로 살아 온" 사람이 과연 민생의 애환의 본질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남들은 다 독립해서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헤쳐 나갈 나이에 "살 길이 막막해 아파트 서른 채를 받은" 사람이 과연 젊은이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짐작이나 할까?
박 후보는 민생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경제민주화를 단순히 선거를 위한 광고 카피 수준으로 생각하면서 필요하면 써먹고, 다 써먹었다고 생각하면 미련없이 버리는 것을 봐도 박 후보가 민생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줄·푸·세'가 경제민주화라니, 박 후보가 말하는 민생에서 '민'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재벌과 극소수 부자들, 그리고 부동산 투기꾼들을 말하는 것인가?
둘째, 민생은 잘 못 챙기더라도 닥쳐오는 경제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이 또한 박 후보의 전공은 아닌 것 같다. 박 후보는 한나라당 시절 당이 '차떼기' 정당의 오명을 쓰고 위태로울 때 대표를 맡아 당을 구했고, 괴한의 '면도칼 테러'도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내세우며 자신이 '위기에 강한' 리더임을 과시하는 듯하다. 개인으로서는 자랑할 만한 무용담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를 덮쳐오고 있는 위기는 '차떼기 위기'도 '칼부림 위기'도 아니다. 박 후보에게는 생소한, 그리고 박 후보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운 경제위기다.
박 후보의 그동안의 언행이나 발표된 정책을 보면 국가경제위기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박 후보가 경제문제에 대한 이해력이나 경제위기 관리능력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박 후보의 '집걱정 덜기 대책'은, 그중에서도 특히 그 유명한 '목돈 안 드는 전세대책'은, 거짓으로 가득 차있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조롱거리가 됐다. '가계부채대책'은 힘없는 가계보다는 금융기관들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돼 있어 '가계부채'를 위한 대책인지 아니면 '금융기관 먹튀지원'을 위한 대책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그리고 마치 국민들의 세금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위장 재정투입'을 하면서 그것을 해결책이라고 자랑스럽게 국민들에게 내놓는 것을 보면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정직하지 않은 건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금융을 연구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금융문제에 관한 한 박 후보는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은 것 같다. 심히 우려스럽다. 경제위기의 핵심이 금융문제인데 어찌 박 후보에게 위기관리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셋째, 박 후보는 위기의 본질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기는 단순히 가계부채 위기만도 아니고 글로벌 경기침체 위기만도 아니다. 외교·안보적 위기도 올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위기는 우리 내부의 양극화와 갈등의 위기다. 내외의 위기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증폭되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한 상태다. 박 후보는 위기 마케팅을 하면서 외부에서 거대한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바빴지 내부 위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다가오는 글로벌 경기침체 위기, 그로 인해 한층 더 심각해질 가계부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갈등을 해소하는 국민 대통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박 후보의 소통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다"는 경직되고 신경질적인 사고방식은 여성 대통령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섬세함이나 국민들을 푸근하게 감싸 안는 어머니 같은 따뜻한 마음씨도 아니다. 윤여준 전 장관의 말처럼 박 후보에게는 '국민 통합'이라는 것도 '유신체제 시대의 동원'을 의미하는 데 불과하지 국민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 진정한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민주화, 입맛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넷째, 수첩공주가 '수첩여왕'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박 후보의 정책에 대한 이해력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박 후보의 측근이나 새누리당에서도 다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토론을 기피하고 만들어진 연설원고 읽는 것만을 좋아 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평가가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경제위기라는 것이 어디 정해진 대본대로만 가나? 그러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다각도로 들어가면서 정책입안자들이 만들어온 방안을 평가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새누리당 내에서도 직언을 하는 사람들은 멀리하고 주변에서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참모가 거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지금 박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제3공화국이나 전두환의 5공화국 구태 인사들 아닌가.
위기를 맞으면 서민과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위기를 경험하면서 양극화가 더 심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위기극복 방안도 서민·중산층 위주로 만들어야 하고 위기극복 과정에서 세심하게 서민과 중산층을 배려해야 할 텐데, 박 후보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이명박 정부 때와 같이 또다시 친재벌·친부자 정책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할 테니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갈등은 더 깊어질 것이다. 외부위기를 극복한다고 내부위기를 더 키우는 결과를 낳을 위험이 매우 크다.
다섯째, 그동안 박 후보의 언행을 보면 박 후보가 정치를 하고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는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하여 비명에 간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박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의 꿈이 민주화이고 복지국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역사를 잊으면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고도 했다.
그러면 과연 박 후보에게 우리의 역사란 무엇인가. 박 후보에게 국가의 미래비전이 '박정희 부활'이라면 박 후보에게 "잊어서는 안 될" 역사란 박정희 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러면 경제위기를 넘어서 끌고 갈 우리나라의 방향은 어디인가. 정말 무섭고 걱정된다. 심적·지적으로 박정희로부터 탯줄을 끊지 못하고 있는 박 후보의 지향점은 자유와 창의가 만발한 민주주의적 자유시장은 아닌 것 같다.
내외의 경제위기를 맞아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경제민주화다. 그런데 박 후보는 표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경제민주화를 삼켰다, 내뱉었다 하면서 말 바꾸기를 하고 있다. 위기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고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박 후보에게 경제위기론은 그의 집념이 투여된 선거 상술, 즉 또 다른 정치 광고 카피인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광고 카피로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자칫 우리 경제를 갈등과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정치 슬로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박근혜표 '경제위기관리'의 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