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남았는데 구도도 안 짜여… ‘이상한 대선’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7-09-08 03:17 | 최종수정 2007-09-08 11:03
[동아일보]
《10일이면 제17대 대선일이 100일 앞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대선 정국은 역대 대선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비정상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여권에서는 아직 후보조차 못 정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이 경선 룰조차 확정짓지 못한 채 경선에 들어갔지만, 당명에서 경선 관리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급조 정당의 한계를 드러내며 원내 1당 지위가 무색한 ‘아노미’적 혼란상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례없는 야당 대선 후보 고소를 비롯해 노골적으로 대선판에 뛰어들었고, ‘역전의 한 방’을 꿈꾸는 여권의 심상찮은 발언들은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의 야당 후보 뒷조사 논란과 맞물려 극심한 네거티브 선거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50% 안팎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여당 후보들은 10%도 안 되는 절대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비정상적 상황이 국민의 정치 냉소주의와 맞물릴 경우 비이성적 돌발적 변수로 선거판이 요동치면서 선거민주주의의 후퇴를 맞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
[1] 아직도 안 짜인 대선 구도
대선이 석 달 남짓밖에 안 남았지만 원내 제1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은 아직 후보조차 확정하지 못했다.
2002년 대선 때는 4월 27일 일찌감치 노무현 후보가 집권 민주당 후보로 결정됐고, 제1야당인 한나라당도 5월 9일 이회창 총재를 후보로 확정했다. 1997년 대선 때도 새정치국민회의가 5월 19일 김대중 총재를, 신한국당이 7월 21일 이회창 후보를 각각 확정했다.
2002년 대선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 단일화’를 통해 막판 지지율 급상승을 이뤄낸 범여권은 이번에는 더 강력한 기대치를 바탕으로 ‘어게인 2002년’을 노리고 있다. ‘여론조사’와 ‘단일화’라는 키워드는 같지만 2002년 수준의 드라마로는 판을 흔들 수 없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후보가 확정될 시기는 좀 더 늦춰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5일 순위 번복 등의 우여곡절 끝에 예비경선을 치른 대통합민주신당은 아직 경선 룰을 확정하진 못했지만 15일부터 10월 14일까지 전국 순회방식의 경선을 치른다는 계획이다. 우선 이해찬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친노 주자들은 이달에 ‘1차 후보 단일화’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10월 16일 민주당이 후보를 확정하면 민주당 후보와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간에 다시 여론조사 등의 방법으로 ‘2차 후보 단일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장외에서 기회를 엿보는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등이 막판 결선리그에 합류할지 현재로선 예단하기 어렵다. 여권의 한 기획통은 “투표일인 12월 19일까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아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2] 범여권 ‘도토리’ 후보 난립
‘반올림하면 0%’라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로 범여권 개별 후보들의 지지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엄밀하게 말해 여론조사에 적용되는 통상적 오차범위(±3.1%포인트) 바깥에 확실히 서 있는 후보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정도이다. 현재 본경선 무대에 올라 있는 대통합민주신당 다섯 후보의 지지율을 모두 합쳐도 50% 안팎인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비하면 ‘하프 게임’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후보들이 “한나라당에서 3위 해 뛰쳐나온 후보로는 이길 수 없다”고 몰아붙여도 손 전 지사가 “그럼 왜 여러분은 전체 3위도 못해 보고 이러느냐”고 자신 있게 반박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5년 전인 2002년 9월에는 정몽준 후보가 공식 출마 선언을 하면서 노무현 이회창 후보가 함께 맞서는 3자구도가 된 탓도 있지만, 어느 후보도 다른 후보를 15%포인트 이상 쉽게 앞서지는 못했다.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후보인 이 전 총리는 “‘전통적 지지층’이 누구를 찍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응답을 아예 안 해 버리고, 이 때문에 우리 측 진영의 전반적 지지율이 낮게 나오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3] 범여권 후보 검증 실종
주요 후보가 확정되지 않아 도덕성과 정책 비교 및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이번 대선의 특징이다.
한나라당 후보만 확정된 탓에 대통합민주신당이나 민주당 예비주자에 대한 당내 자체 검증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다 유력 후보가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라서 언론이나 시민단체도 각당 후보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범여권은 한나라당 경선 때 제대로 된 후보 검증이 없었다며 야유했지만 정작 대통합민주신당의 예비경선은 후보 검증을 아예 건너뛰어 버렸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주자들은 7일 본경선 첫 정책토론회를 벌였지만 검증이라 할 만한 공방은 없었다. 게다가 후보 선출까지 한 달 남짓 남은 급박한 경선 일정과 ‘민주세력 적통성’ 논란 등 경선 과정에서 이슈가 될 정치 현안을 감안하면 충분한 정책 검증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범여권의 당내 경선이 길어지면서 올해 대선에서 정당의 대표 주자들이 경쟁하는 선거 기간이 단축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주요 후보들이 벌이는 정책 대결 기간이 짧아지는 만큼 합리적 평가보다는 지역주의나 감성 등 비합리적 요인이 개입할 소지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범여권 주자들은 수조 원이 소요될 대형 국책사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손 전 지사는 광주에 한국판 ‘미국항공우주국’을 만드는 내용의 ‘광주 우주사이언스파크’ 개발 계획을, 정 전 의장은 2025년까지 한국 우주인을 달로 보내는 ‘2025 드림스페이스 프로젝트’를 내놨다.
[4] 전현직 대통령의 노골적 개입
전현직 대통령이 범여권 주자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각종 권력형 게이트 등으로 후임자 선정 과정에서 노골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의 대선 불개입이라는 원칙을 넘어 한나라당은 물론 범여권 대선주자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다. 청와대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직접 검찰에 고소까지 한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대통합민주신당 대선주자 중 지지율 1위인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 경력을 문제 삼아 ‘보따리 장사’라고 비난하는 등 손 전 지사가 범여권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범여권 대선주자들과 잇따라 만나 반(反)한나라당 연합전선 구축을 재촉하는 등 노골적으로 범여 후보들을 지원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의 영향력 행사에 대해서는 퇴임 후의 정치적 영향력 유지에 관심이 있는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사이에 ‘막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5] 여당 실종, 신당은 ‘아노미’ 상태
과거 대선에서는 대통령이 탈당하더라도 여당이었던 정당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노 대통령의 탈당 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스스로 문을 닫았다. 사상 초유의 ‘여당 증발’ 상황이 온 것.
열린우리당을 흡수 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은 여당 역할을 자임했지만, 급조 정당의 한계를 드러내며 ‘유령 선거인단’ 파문, 예비경선 집계 오류, 약칭 ‘민주신당’ 당명 사용금지 결정 등 각종 악재에 시달렸다.
‘대선 승리’라는 목표 외에 당의 기본이 돼야 할 정책 노선은 혼미 상태다. 김효석 원내대표는 2일 기자간담회에서 ‘대선 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부동산 보유세에 관한 당론을 정하기는 하느냐’는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며 “지금 답변하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준비가 덜 된 채로 10월 15일 대선 후보 선출 일정에 맞춰 촉박하게 일을 처리하는 한편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까지 더해지다 보니 원칙이 사라지는 경우가 잦다. 선거인단 접수자의 25%가 허수라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예비경선을 강행한 것이나 당초 후보자 간 합의를 뒤엎고 예비경선 순위와 득표수를 공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6] ‘네거티브 한 방’의 추억
단일화로 인한 극적 분위기 연출 외에 남아 있는 변수는 역시 ‘네거티브 한 방’이 발생할 개연성이다. 위력은 이미 검증돼 있다. 어디선가 ‘∼카더라’고 하면 다음에 인용될 때는 ‘XXX 의혹’으로 단순화되고, 이것이 양적 균형을 우선 가치로 삼는 방송 뉴스나 TV 토론 무대를 거치면 ‘기정 사실’로 인식되는 게 하나의 여론 생성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한 방’은 사실 일찌감치 예고돼 왔다. 올해 3월 12일 당시 열린우리당 1차 탈당그룹인 범여권 통합신당모임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이강래 의원은 기자간담회 때 “한나라당 후보들은 ‘네거티브 한 방’이면 갈 수 있는 취약한 후보들”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6월 27일 “이명박, 박근혜 후보는 플라이급이나 라이트급밖에 안 된다. 한 방이면 간다”고 했고, 7월 10일에는 “이명박 후보가 TV토론에서 나한테 걸리면 박살난다. 한 번만 맞아도 10분 만에 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때 여권이 ‘김대업 병풍 조작’, ‘이회창 후보 측의 기양건설 뇌물 수수 의혹’ 등을 제기했지만 선거 후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던 만큼 유권자들이 이번에는 네거티브 ‘한 방’에 속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조인직 기자
[email protected] 장강명 기자
[email protected] 내 손안의 뉴스 동아 모바일 401 + 네이트, 매직n, e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