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전 2008.07.26
[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
1367년 1월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둔 채 였다아내를 잃은지 벌써 3년째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했다
노국공주의 초상과 평상시 처럼 지냈던 공민왕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질
즉,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
또, 아팠다
139권의 방대한 기록 고려사고려 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까지 포함한 천여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 중 공민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공민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엄격하고 신중했으며 예의바른 성격이었다그러나 말년에는 의심이 많고 사나운 성품으로 변했다같은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그야말로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치 못했다공민왕은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밥을 먹을 때에도 슬피 울 때에도 언제나 곁에 두었다
그녀는 몽골사람 이었다공민왕은 공주가 생각이 날 때마다 몽골 음악을 듣고, 또 연주했다
시간이 흘러도 그리운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영전이 빗물에 상하지는 않을까 늘 살피고 걱정했으며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기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독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낸 뒤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밑에서 밤을 보냈다
-
공민왕은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했다고 평가받고 있다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 금공민왕 금은 수덕사의 승려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으로 부터 1899년에 물려받은 거문고 이다
거문고 바닥에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이조북의 시도 새겨져있다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들게 되었다는 유래다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그의 성품은 섬세한 만큼 슬픔이 깊었다공민왕은 공주를 잃은 슬픔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1372년 10월 1일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여장이었다공민왕은 항상 자신을 여자처럼 화장하고 있었다고 한다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결국
정신병이 생긴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기록 속에 스며들어 있다
고려 왕자였던 공민왕과 멀리 먼 노국공주와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고려가 처했던 비극적 현실 속에 그 답이 있다
공민왕 이전, 쿠빌라이칸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원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1341년 12살의 나이에 볼모로 끌려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고작 12살이 곳 에서의 공민왕은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한 어린아이였다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이었다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는 왕자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그들은 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임명했고 폐위 시켰다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번씩이나 주고 받는 기행까지 겪었다고려의 왕권은 더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고려 왕의 귀양 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양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의 왕 충혜를 발로 차며 포박했고 또한 꾸짖기까지 했다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으로 가야 했다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자 공민왕의 개인적인 원한이기도 했다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원은 고려의 왕과 원의 공주를 혼인 시켰고
그 아들은 북경에 데려다 인질로 삼았다
결국 몽골 공주와 결혼한 자가 고려의 왕이었고몽골 공주의 아들된 자가 고려의 왕 이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이었다
다섯명의 고려왕은 모두 일곱명의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이들은 일곱명의 부인 앞에서 고려의 왕이 아닌 신하로 살았다
심지어 쿠빌라이칸에게 장가 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였다
이런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 결혼을 올린다
이유는 무엇일까?
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길에 사망하며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보위에 오른다
그 후에도 충혜왕의 서자 저하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된다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 이었다
공민왕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두번째 왕위를 빼앗긴지 불과 5개월 뒤 노국공주와 서둘러 혼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여인 노국공주의 결혼은 분명히 정략결혼이었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 한 점이 보관되어있다
원래는 두루마기 형태였으나 일부만 남아있다
수렵도라고도 불리는 천산대렵도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광경이 정교한 필치와 깊이있는 색조로 묘사 되어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 실력은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쌍화곡 고려속요 맞긔.. )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공민왕은 고려란 나라에서 사냥을하지 않는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타지 못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 코드가 일치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59년 4월의 기록에 나타나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청을 하고 있었다
이 때가 결혼 11년 차
혼인 한 지 10년이 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후궁 많은 왕들 보고 있숴여????!!! 일단 세종대왕님 눈 좀 감으시고...)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대신들의 청은 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돈독해졌다
20만명의 홍건적이 무서운 속도로 남진해 20여일 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갔을 때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피난을 떠났다
길은 험했다
왕의 옷은 젖고 얼었다
공민왕은 옷 섶으로 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
시련의 시기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피난처인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해 말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천생의 베필이었다
2년 뒤 흥왕사
괴한 50여명이 공민왕의 처소에 침입했다
반역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그녀가 나섰다
"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 "
반란군은 원나라 공주의 기세에 역모를 포기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7세기가 지나도록 이어졌다
서울 마포의 광흥창터에는 공민왕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엔 그 홀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다
노국공주도 함께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노국공주와의 사랑을 배경으로 공민왕은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반원의 깃을 내건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