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사람들은 제천행사인 동맹이 열리는 매 해 10월 이면 압록강변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 여신은 누구였을까?
중국의 사서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국 사기는 하백의 딸을 보다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녀는 유화
건국시조인 주몽의 어머니였다
고구려는 유화 부인을 건국시조로 추앙했다
여성이 수호신인 나라
고구려의 여성들은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제천행사이자 국가 축제이기도 했던 동맹이 열리면 남녀가 함께 어울렸다
남녀 관계도 개방적이었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 교제했고 마음이 맞으면 결혼했다
때론 여성이 관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거슨 본적이 없는 남녀평등! 조선 성리학자들 보고 이쒀여??????)
결혼 풍습도 간소하고 실용적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고구려의 여성들은 특별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이른바 형사취수제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원류인 부여시대부터 내려오는 고대의 풍습이었다
한나라와 치열히 싸워 건국한 고구려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미망인도 적지 않았다
그날 밤 왕후 우씨는 고구려 사회가 여성에게 허용한 보호 장치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연우는 왕후 우씨가 형사취수제를 이용해 새롭게 찾은 국정 파트너였다
그런데 그를 맞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다
궁에 돌아갈 시간
그녀에게 적은 많고 시간은 짧았다
두 사람의 연합은 이날 밤 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날 새벽 비로소 우씨는 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고국천왕이 임종 전 연우를 차기 왕으로 지명했다고 공포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발기는 분노했다
"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의 이거늘
니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죄악이니 빨리 나오너라! "
찬탈
그것은 쿠데타 였다
발기는 사흘동안 성을 포위하고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연우와 우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론마저 발기를 따르지 않았다
발기는 고구려를 떠나 망명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중국 요녕성 요양
당시 요양은 한나라 요동군의 치소로 양평이라 불리고 있었다
당시 공손씨의 수장인 하급 군인 출신으로 요동 태수까지 오른 공손도라는 인물이 있었다
공손도는 한나라가 망해 위, 촉, 오 삼국 으로 나뉘자
요양에 자리를 잡고 사실상 독립정권을 세웠다
당시 이들은 요동지역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발기는 고구려의 적 공손씨에게 망명한 것이다
" 내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를 어겼습니다 "
그는 공손도의 힘으로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공손도에게는 숙적 고구려를 칠 절호의 기회였다
그의 군대는 고구려의 왕자를 앞세우고 고구려로 진격해갔다
발기는 당시 그의 반란에 동조한 비류부의 3만 군대를 끌어 모았다
마침내 발기는 공손도의 군대와 비류부의 연합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결과는 참패였다
(깝치다 루저크리...)
왕위에 눈이 멀어 조국에 칼을 겨눴던 고구려의 왕자
그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마침내 우씨는 승리했다
(To the victory~!!)
우씨의 도움으로 왕이 된 산상왕은
다른 부인을 얻지 않고 형수 우씨와 결혼했다
그렇게 우씨는 다시 고구려의 왕후가 되었다
이 후 고구려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즉위 다음해에 산상왕은 환도산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환도산성의 중심부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건물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왕궁이었다
산상왕은 즉위 13년 만에 이 곳 환도산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국내성을 떠나 이곳으로 궁을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궁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서는 병사들의 거주지가 확인 되었다
군대가 주둔했던 것이다
막사 바로 앞에는 요망대가 있다
일종의 망루인 이 곳에서는 국내성을 비롯한 집안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왕후 우씨는 산상왕과 함께 환도산에 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8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대지에 궁궐과 사당을 갖춘 거대한 왕성을 지었다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왕성 앞에 망루를 세우고 군사를 배치했다
이 후 왕후는 왕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왕후의 부족 연나부는 우씨가 사망한 후 100년이 지나도록 왕후를 배출했다
이 후 고구려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왕후 우씨는 초기 고구려의 역동적 역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헤쳐간 당당한 고구려의 여성이었다
조선시대의 역사서인 동서강목에서
"간악하고 음탕하며 부끄럼 없기가 고금 천하에 이 뿐이다 "
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의 윤리에 근거한 평가일 뿐이다
고구려는 개방 된 나라였고 왕후의 행동은 당대의 관습과 규범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왕을 능가하는 왕후로 반세기동안 고구려를 이끌었던 철의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