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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조차 형, 동생으로 나누는 한국
게시물ID : bestofbest_333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_-)
추천 : 162
조회수 : 20406회
댓글수 : 0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0/01/27 14:33:51
원본글 작성시간 : 2010/01/26 21:44:09
*출처: 오마이뉴스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specialin/316375)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몇 년도 생이세요?”

 

한국에서 살다보면 자주 겪게 되는 물음입니다. 때론 상대방의 나이가 궁금할 수 있기에 물어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많은 경우, 상대방이 자신보다 어리다고 생각하고 나이로 밀어붙이고자 할 때 이러한 물음들이 튀어나온다는 거예요. 밥 몇 술 더 먹었다는 것만으로 상대 위에 올라서고자 하는 지배욕망이 잔뜩 묻어 나오죠. 나이는 권력과 잇닿아있으니까요.

 

주어진 ‘숫자’를 견주어본 뒤, 더 높다고 판가름 난 사람에게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갑자기 말투가 바뀌는 거죠. 말을 놓아도 된다는 합의를 하진 않았지만 대뜸 반말을 합니다. 언제나 이렇게 관계를 차름(시작)하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죠. 한국 사람들의 관계맺기는 ‘민증까기’에서 비롯되니까요.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적음만으로 위아래를 정하고, 금방 형, 동생을 합니다. 이것은 핏줄주의와 가족중심관계가 사회로까지 뻗어나간 꼴이죠. 형, 동생을 쉽게 한다고 해서 몹시 친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처음 만나자마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라면서 너스레를 떨던 사람들 가운데 나중에까지 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요.

 

형아우를 따지는 이유? 짭퉁 가족을 만들어 자신들의 쫄목을 지키려는 꿍꿍이

 

왜 이리도 형아우를 따지느냐? 패거리 맑티(문화) 때문이죠. 사회관계를 형과 동생 같은 가족관계로 맺어 끈끈함을 얻으려 하는 꿍셈입니다. 이러한 꿍꿍이는 자신들의 연줄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을 내치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이러한 패거리 맑티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만 손해를 보는 한국에선 얼른 ‘짭퉁 가족’ 관계를 맺어 새로운 패거리를 만들어야 쫄목(이익)을 지킬 수 있죠.

 

지연, 학연, 학벌, 핏줄, 결혼, 연고주의, 사돈에 팔촌, 동창회 등등 패거리주의가 한국에 들끓습니다. 다른 이들의 이기주의엔 핏대를 세우면서도 자신이 속한 패거리엔 무달(침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형과 아우로서 관계를 맺었으니까요. 형의 일에 나무라지 못하고, 아우의 일엔 눈감아주는 겁니다. 짬짜미를 하는 거죠.

형님, 동생 관계를 맺어 쫄목을 누리려는 조폭 같은 사람관계가 한국에 퍼져 있다. 영화 <상사부일체>

 

사회는 공공의 마당이기 때문에 형, 동생으로 관계를 해선 안 되죠. 사회관계를 위아래로 맺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만나야 하죠. 높낮이가 생겨나는 얼짬(순간), 대화란 이뤄지지 않습니다. 지시와 가르침만 있을 뿐이죠. 한국에서 대화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까닭은 사람들이 관계를 대등하게 맺을 줄 모르기 때문이죠.

 

인격체로서 서로 존중하며 상대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자기 속내를 밝히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울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드문지요. 그저 나이 많은 사람이 떠들면 나이 적은 사람이 고개를 굽실대는 게 아름다운 그림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형’이 해야 할 일과 ‘동생’이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서 사람들은 그 노릇에 자신을 끼워 맞출 뿐이죠.

 

10년 터울이면 친구로 지냈던 조선시대, 연령주의는 메척 한국의 잇줄이 아니야

 

나이만으로 형, 동생이 되어 나이 많은 사람은 반말하고, 나이 적은 사람은 존대말을 쓰는 한국식 관계 맺기에 대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령주의가 메척(원래) 한국의 잇줄(전통)도 아니었어요. 유교 윤리가 넘실거렸던 조선시대에도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면 형, 동생이 아닌 벗으로서 만나는 게 자연스러웠죠. 1살 차이에도 위아래가 뚜렷한 오늘날이 돌연변이란 겁니다.

 

예로부터 장유유서가 딱딱하게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 시대는 지금보다 오히려 열려있었습니다.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이 두루 어울리며 동무로 지냈고, 양반이라 하더라도 노론은 8년, 소론은 9년, 거의 10년 터울이어도 친구로 지내는 평교(平交)를 맺었으니까요.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맞먹어도 좋다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되었다는 게 선비들 사이에 예의였죠. 

 

재미있는 보기가 있어요. 일제강점기, 벽초 홍명희 선생은 장가를 일찍 들어 큰 아들 홍기문과 열여덟 살 차이가 났었죠. 그래서 홍명희와도 말을 트면서 홍기문과도 말을 놓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와도 벗이면서 그 아들과도 어깨동무하는 것이죠. 이런 풍토가 1950해름까지 이어졌고, 6~7살 정도는 친구로 지내거나 말을 놓는 게 사회 밑절미에 있었죠.

 

그러던 것이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빡빡해지고 살천스러워졌어요. 사회를 군대처럼 만들려고 한 군인독재자들은 한국을 병참화하였죠. 1달선임도 깍듯해야 하는 군대처럼 1살 차이도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안 되게 사회를 내리족쳤죠. 병영국가의 탄생! 군사독재가 무너진 지 20년이 넘었건만 그들이 심어놓은 군사맑티 찌꺼기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사람들을 병장과 이등병으로 가르고 있습니다.

위아래로 안 나눠도 잘 어울려 사는데, 왜 굳이 언니동생을 나누는 속셈은 뭘까?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쌍둥이조차 형 동생으로 나누는 한국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람은 누구나 진실한 관계를 바랍니다. 한갓된 욕망들 틈바구니에서 참된 만남에 대한 욕망을 버릴 수 없죠. 여기서 뜸꺼리(문제)가 터지죠. 사람 사이의 깊이는 위계질서에서 결코 나올 수 없으니까요. 함께 일구는 시간과 생각의 마주침에서 깊이가 나오죠. 티격태격하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으려면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존중 없는 관계는 뿌리가 얕아 금방 허물어집니다.

 

존중은 도자기 빚는 일 같아서 무척 어렵습니다. 한 손만 애를 써선 귀한 도자기를 아물레(절대) 빚어낼 수 없죠. 같은 눈높이에서 상대를 위할 때 비로소 돋아나는 태도가 존중이니까요. 낮아진 상대를 존중하기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죠. 한국사회의 형, 동생이란 관계설정은 처음부터 존중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외로워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사이가 얕고 데데하기 때문이죠. 사람은 홀로 있을 수 없으며 더불어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해야겠죠. 쌍둥이조차 형과 동생으로 나누는 한국입니다. 자신들이 쓰는 말과 맺는 관계는 얼마나 고르며 자신을 대루(자유)하게 하는지 살펴보았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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