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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중 연합군-추축군간의 광기의 복수극(終)[BGM]
게시물ID : humorbest_3340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물의피
추천 : 29
조회수 : 5159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2/22 11:47:08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2/21 12:10:16

무장 친위대에는 의외로 동양인도 있습니다. 죄수들은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를 삽으로 패서 죽였고 죽인 이유는 그 장교가 자기를 고자로 만들었다고 했다죠. 이 수용소 사살 사건은 1991년이 되어야 미군에 의해서 공개가 된 일입니다. 왜 1991년인지 아시죠? 독일 통일 1990년 바로 직후에 이루어 졌습니다. 그전에 왜 안했을까...아마 서독의 반감을 사게 될지도 몰라서 그런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무장 친위대가 정상적인 인간들이라는 건 아닙니다. 하여튼 이런 광기적인 장소를 세우고 전쟁전에도 정치범들을 셀 수도 없이 사살했고 자기네들도 구 소련군 포로들을 수천명이나 다 사살했죠. 그 피의 값을 그대로 받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그럼 무장 친위대, 미군만 이렇게 재판없이 복수를 했는지? SS 소속이 아닌 독일 국방군 소속인 강하엽병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하엽병의 경우는 상황이 약간 달랐습니다. 크레타 섬 공방전에서 많은 수의 강하엽병이 죽었고 적지 않는 수가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했죠. 그래서 여단장 Student의 명령으로 크레타 섬 점령후 가장 활발하게 저항했던 마을중 하나였던 콘토마리 마을에서 모든 남자들을 다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물론 이것도 재판없이 사살하라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면 이상하게 죽이는 것을 즐겼던 SS애들과는 달리 강하엽병들도 얼굴이 밝은 얼굴은 아닙니다. 남자들을 불러 모으고는 마지막 담배까지 한대 태워줍니다. 갑자기 스피어스가 생각나는군요..-_- 공수부대는 다 이런가? 장교가 "총을 들지 못하는 아이나 할아버지 및 여자들은 집에 돌아가세요.."라고 합니다. 집에 돌아가는 나머지 인원들. Student장군이 명령한 사살 대상은 건장한 남자들이었습니다. 전투에 동원이 될만한 인원들이었죠. 솔직히 훈련받은 강하엽병을 패서 죽일 정도의 체격을 가진 사람이 할아버지나 아이들이 아닐테니까요. 사살직전. 이런 사살을 당한 사건은 콘토마리 마을에 사진으로 그대로 남겨져서 보존되고 있고 후세들에게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진 작가는 나중에 2차대전 후에 체포되어서 1년 동안 수감당했다죠. 원래는 이 사진이 당시 나치의 선전용으로 찍은 사진이지만 결국에는 나치를 경계하는 사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강하엽병 및 육해공군 대다수의 독일군은 나치가 생겨나기 전에 있었던 부대들입니다. 히틀러 및 나치 SS 때문에 다 나치 취급당하는 거죠.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크레타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몇의 강하엽병 할아버지들은 크레타 섬에서 마련해준 독일군 희생자 기념관에 몇번씩 방문을 하기도 했었고 몇년 전에는 황당하게도 크레타 젊은 아이들이 강하엽병 옷 차림으로 와서는 같이 사진도 찍고 그랬다고 합니다. 침략전쟁에 의해서 사망하고 고생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서를 비는 독일 정부의 입장이 크레타 민심을 바꾼 건지도 모르겠군요. 크레타 Maleme시 근처에 있는 고지 107에 강하엽병의 전몰자 죽음을 기원하는, 크레타에서 세워준 기념관이 있습니다. 멀리 방문객이 보이네요. 강하엽병의 경우는 독일에서도 크레타에서 세워준 독일군 희생자 기념관과 비슷한 규모로 강하엽병 전몰자들을 위로하는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유럽에서는 SS 및 무장 친위대는 언급조차 금기입니다. 그만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난 피해를 준 집단이니까요. [출처]나리카스 밀리터리 글쓴이:Genesis24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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