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명보는 신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대신 데뷔 첫해 포항의 우승을 견인하며 K리그 MVP를 받았다.
2. 95년 당시 최장거리 기록인 47미터 프리킥 기록을 세운 바 있다.
3. 보통 최후방 수비수로 알려져있지만 일본 가시와 레이솔에서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서 뛴 적도 있다.
대표팀에서 역시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출전했다.
4. 90년대 체육과학원의 조사 결과 킥력이 가장 좋은 선수 중 하나였고(기영노의 [월드컵과 붉은 전사들]
참조) 대표팀의 프리킥 전담 키커였다. (테크닉형이 아닌 파워형 키커)
5. 많은 사람들이 그를 머리가 좋지만 체력이 딸리는 선수로 기억하는데 사실 그의 체력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J리그와 대표팀을 오가며 꾸준히 뽕을 뽑힌 후인 01년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대표팀에서 가장 체력이 좋은 선수 중 한명이었다.
6. 96년 전북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한 바 있다.
7. 세계 올스타팀 최다 선발, 최다 출전(6회/4회)
8. J리그 올스타 3해 연속 선발(99,00,01)-부상과 대표팀 경기 출전 등으로 실제 나간 것은 99년 J리그
드림매치 98,99 출전
9. 한일전 한국 역대 전적 (94년 이후)
홍명보 출전시 5전 4승 1무-출전하지 않았을시 5전 1승1무3패
00년당시 1무를 기록했을 때 미드필더로 뛰던 홍명보는 식사마가 퇴장당하고 다시 수비수로 내려와서
틀어막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승부를 이끌어내었다.
10. 그는 아직도 한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공격포인트(2골 1도움)를 기록한 선수다.
11. J리그 최초의 외국인 주장 역임(00-01)
12. 사실 그의 체격과 조건은 수비수로서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는 보폭이 크고, 힘이 딸리고, 스피드도
느리고, 키에 비해 헤딩도 좋지 못하고, 1:1 대인마크 능력도 딸리고, 태클능력도 그리 좋지 못하다.
13. 02년 월드컵 당시 롱패스 성공률 3위, 조별리그 예선전 기준 파울1개 공격차단 7개로 수비수
랭킹 1위.
14. 황선홍과 함께 국내 최초로 드래프트를 거부했다.
15. 프로축구 최초로 연봉 1억 돌파한 선수이다. 01년에는 J리그에서도 한국 선수 최초로 10억을
돌파하며 최고액 연봉자였다.
16. A매치 출장 135회로 국내 최다, 아시아 4위, 세계 10위(04년 기준)
17. 역대 한국선수 월드컵 본선 경기 최다 출전(16경기)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 본선 6회 연속
출전 중 4회 출전, 최초로 1000분 출전 달성.
18. A매치 135경기와 K리그 156경기, J리그 114경기, 그리고 MLS(미국 프로축구)에서 36경기를 포함 도합 441경기에 출전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기에서 선발 무교체 풀타임.
19. 한국 선수 최초의 FIFA 선수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20. 주로 깨끗한 페어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필요할 경우 상대방과 맞불을 놓는 것도 불사한다. 자신 역시 '경기 중 열받게 하는 선수가 있을 경우 똑같이 되갚아 준다'라고 말한 바 있고 일설에 의하면 한일전때 일본 공격수 기타자와의 죽빵도 손수 날려줬다고 한다.
21. 가시와 레이솔 시절 70미터의 나홀로 드리블 후 골을 넣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22. 92, 94, 95,96, 02 K리그 베스트 11 선발.(97~01 J리그 진출, 03~04 미국 MLS 진출) K리그에서 뛸 때 93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베스트 11에 선발되었다.
23. 02년 월드컵에 외신 기자단 투표로 선발되는 MVP 투표에서 18%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 브론즈볼을 수상했다.(아시아 최초)
24. K리그 올스타 팬투표에서 최다득표 기록을 가지고 있다.(02년/38만표)
25. 일본 벨마레 히라츠카는 94년부터 97년까지 끈질기게 러브콜을 보낸 끝에 그를 영입할 수 있었다.(한 일본 네티즌은 '한 선수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벨마레가 놀랍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또 바르셀로나 영입 제안시 발목을 잡았다-_-;;
26. 94년 미국 월드컵 후와 97년 세계 올스타전 이후, 98년 3차례에 걸쳐 FC 바르셀로나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다. 특히 98년 당시에는 거의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었으나 각각 소속 구단이던 포항/벨마레가 발목을 잡았다.
27. 96년 영입제의를 했던 이탈리아 세리에 A의 파도바와 볼로냐는 '홍명보의 포항 내 비중이 큰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입단테스트를 하고 입단이 확정되면 우선 계약만 하고 홍명보는 96시즌을 한국에서 보낸 뒤 96/97 시즌 중반에 이적을 시켜도 좋다'라는 양해까지 구했다. 그러나 또 포항이 발목을 잡았다.
28. 97년 분데스리가의 칼스루에 SC와 함부르크 SV 그리고 헤르타 베를린의 제의를 받았으나 포항이 엄청난 이적료를 요구하며 또! 발목을 잡았다.
29. 97년 연이은 이탈리아 세리에A 삼프도리아에서의 입단제의도 역시 또! 포항이 줄곧 이적료 150만불(당시 인터밀란으로 이적한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이적료는 700만달러)을 요구하며 제의를 거절했다.
30. 97년 올스타전 이후 바르셀로나 외에도 많은 팀들이 그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했는데 그 중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와 네덜란드의 NAC 브레다가 있었다.
31. 02년 이탈리아전 당시 이탈리아 역시 홍명보에 대해 연구했다. 홍명보로부터 팀의 움직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가 공을 잡으면 토티가 뛰어나와 견제했다. 이탈리아전 전반에 미드필드 싸움에서 밀린 것은 이 때문이다.(쿠키뉴스 http://www.kukinews.com 최진한 코치 인터뷰 참조, 발췌문
32. 2004년, 99-01까지 3시즌 동안 뛰었던 가시와레이솔의 창단 10주년 기념 팬투표에서 팀의 주력인 현역 미드필더 묘진 도모카즈를 제치고 역대 베스트 11 중 1위를 차지하며 MVP로 뽑혔다.
33. 2003년 미국 프로 축구 올스타에 선발되었다.(감독 추천)
34.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미국 월드컵 조직 위원회 선발의 베스트 11에 포함되었다. (기영노, [월드컵과 붉은 전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