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사단 전역했음. 이하 부대는 혹시 아는 사람 있으면 쪽팔리니까 생략...
평소에는 진짜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후임들이든 선임들이든 이야기하면 그랬음.
"전쟁 터지면 육공이든 두돈반이든 탈취해서 후방으로 튄다"...
근데 말년에(그것도 전역 일주일 반 앞두고) 실제상황이 걸린 거임.
그것도 평화로운 토요일 저녁에...
바로 근처 XX 소초에서 철책 절단 및 침투 흔적 발견...
물론 전면전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몇 명이 침투했는지, 무장한 상태인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일단 준비태세부터 걸렸음.
악마같은 선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들 답답하게 굴면 엄청 카랑카랑한 성격이었는데
막상 실제상황이 걸리니까 그런 사소한 것들은 문제가 아님.
뭐 어지간한 물품들 다 반납한 후라서 별로 꾸릴 게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늦는다고 뭐라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직접 돌아다니면서 늦는 애들까지 다 챙김.
정신도 하나도 없고 그냥 얘들 안 챙기면 다같이 X되는 거라는 느낌만 들었음.
하필이면 또 우리 소대가 중대 탄약 담당이라서 완전 미친듯이 달렸음. K-3 들었는데...
평소에는 완전군장 짊어지면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그날은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그 멀고 높은 탄약고 언덕을 2분도 안 걸리고 날듯이 올라감.
탄약 불출하는데 탄약장교도 손을 덜덜 떨면서 꺼내줌.
하기야 전쟁 무서운 데에 간부고 병사고가 어디 있겠느냐만서도...
그렇게 탄약 불출받고 중대로 와서 상황 나올 때까지 생활관에서 대기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침착해지고 머릿속이 맑아짐.
이제는 정말 총구를 사람한테 향할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만약 민간인 탈북자나 산짐승이 아니고 특공대 같은 거라면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
결국은 이런 일을 "하필이면" 내가 겪는구나...
군대 가기 전 본업이 글쟁이라 그냥 몸이 시키는 대로 수첩에다가 유서를 쓰기 시작함.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그걸 옆에서 맞후임이 보고 있다가 입술이 새파래짐.
맞후임: 형... 그거 유서야? (전역 직전이라 말 놨음)
나: 어. 죽을지도 모르잖아.
맞후임: 그런거 쓰니까 진짜 죽을 것 같잖아...
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라. 여기서 탄약 분배 받고 나가면 이런 기회 없을지도 모른다.
말이 끝나자마자 며칠 전에 전입 온 신병이 울기 시작함...
한 20분쯤 지났을까... 중대장이 들어와서 "정확한 상황도 없고 인접 부대가 이미 출동했으니까,
우리는 총기 휴대하고 전투복 착용한 상태로 우선 취침에 들어간다." 라고 알려줌.
그 이후로도 아무도 거기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철책 절단면이 너무 깨끗해서
산짐승은 아닌 것 같다는 뜬소문만 돌아다니고 상황은 흐지부지 끝났음.
물론 우리 부대도 출동하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분명 도망가겠다는 생각 뿐이었음에도 막상 상황에 놓이게 되니 그런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졌음.
내 옆에 있는 후임들, 동생들, 전우들... 그 누구도 내 자리를 대신하게 할 수 없다는 사명감...
내가 물러서면 내 뒤에 있는 누군가가 다치게 된다는 무거운 책임감.
그런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철책 앞을 지키고 있는 우리 동생들이 짊어지고 있는 마음임.
가장 두렵고 끔찍한 현장에서 우리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고 싸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