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쿠데타 배경과 명분 4.19의거에 의해 탄생한 장면 정부의 민주주의 이식노력은 국가능력이 민간사회의 욕구를 따라 가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로 인해 사회는 혼란상태에 빠졌고 당시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용공사상의 대두, 경제적 위기, 고질화한 정치풍토, 사회적 혼란과 국민 도의의 피폐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우며 군인이 국가를 구원할 유일한 세력이라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확연히 드러내며 5.16군사 쿠데타를 강행하였다.
하지만 구조적 요인들 외에 쿠데타 주역들의 군 내부적 불만도 모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나는 상급 장교들의 부패와 이승만(李承晩)에 의한 이들의 정치적 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급 기회의 소멸에 대한 불만이었다. 군부의 뿌리깊은 파벌주의와 연결됐던 이러한 군내부의 갈등은 장면(張勉) 내각 수립 이후 하 급 장교 주도의 정화운동으로 본격화했고,급기야 소수의 모반집단에 의한 직접적인 정치행동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결국 5.16쿠데타는 혼란한 사회를 구해겠다는 애국의지와 "이대로 소외될 순 없다"라는 군부와 박정희 개인의 야망이 어울러져 만들어낸 합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난 당시 쿠데타를 강행한 박정희의 마음속엔 개인의 야망보다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더 컸을 거라는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 5.16이후 첫번째 헌법개정 5.16이후 설립된 제 3공화국은 1962.12.26일 제 5차 개헌을 하게 된다. 5차 개헌은 '대통령 임기 4년 1차 중임 직선제','인간의 존엄성 존중조항'의 신설등 현재까지 9차례나 개정된 우리나라 헌법중 가장 잘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 박정희의 업적 박정희가 아직까지도 칭송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경제발전이 아닌가 한다. 잘 알려져 있듯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의 독창적 정책이 아니다. 다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민주당의 정책을 모사하여 더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의 업적은 경부고속도로개통, 포항제철 설립등 많이 있지만 열거하진 않겠다. 흔히들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경제성장은 박정희 혼자의 힘이 아니다.' '근면하고 성실한 국민의 힘이다'라며 그의 업적을 폄하하지만 전쟁에서 병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무능한 장군밑에 있으면 필패하듯 지도자의 역량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 박정희의 실책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에는 오류가 없었던 것처럼 알려진게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와 사뭇 다르다. 가발산업육성을 언명하면 몇 년 안에 가발산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합판산업 육성이나 섬유산업 육성을 외치면 그 산업들이 온통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60년대 후반, 차관산업 육성에 나섰을 때에는 차관도입으로 설립한 기업들이 대부분 3년 안에 망했고, 결국 국민경제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려야 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힘차게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박정희 정권의 온간 시혜를 입었던 고위관료 출신조차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 실제로 중화학공업의 부실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국민경제적 자원이 '산업합리화조치'라는 미명 하에 여러 차례 쏟아 부어져야 했다.
♣ 제 6차 개헌 1969.10.21 대통령의 임기 연장. 3기에 한하여 연장 할 수 있게함.
♣ 박정희 정권의 위기 탄탄대로를 달리던 박정희 정권도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심각하게 대두한 외채 부담, 농산물 가격 파동,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의 한계로 인한 경기침체, 정경유착과 고위관리들의 부정부패, 높은 물가로 인한 서민들의 생활 곤란, 실업자의 증가 등은 그동안 쌓인 경제 정책의 문제를 그대 드러낸 것이었다. 때문에 농촌의 농민들은 그들의 피와 땀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그대로 썩히면서 굶주리는 비극적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과 오래 독재치하에 반발한 국민들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함께 표출된다. 온 국민이 참가한 민주화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는 한편, 사회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그에 대응한 노동자·농민들의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박정희 독재 체제의 파탄과 종말은 내부로부터 준비되어 갔다
♣ 제 7차 개헌(유신헌법 1972, 12,27) 위의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박정희는 '영도적 대통령제''국회해산권''긴급조치권'등이 포함된 헌정사상 가장 악법으로 평가되는 유신개헌을 단행한다.
♣ 박정희의 최후 1972년에 시작된 유신체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악화를 가져왔고,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강압통치와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을 종용한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 정치·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하여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0월 16일 부마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8일 부산에 비상계 엄령이, 20일 경남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부마사 태 처리문제로 더욱 커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의 강경노선이 채택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 박정희에 대한 오해 요즘 나오는 말 중 하나가 박정희는 부정부패가 없었고 개인적 치부도 없었다는 얘기다. 천만의 말씀이다. 박정희는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 아래 직업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정지시키고 서는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지하에서 민주공화당을 만들고 대통령 할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군사반란 직후부터 정치자금 조달 때문에 생긴 4대 의혹사건이 세상을 소란하게 했다. '건전 한 증권시장 육성'이라는 명분 마래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빼돌린 증권파동, 미군 달러를 번 다는 명분 아래 벌인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으로 쫓겨날 위기에 봉 착한 박정희는 요즘 한보사건 모양으로 부하 측근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교도소로 보냄으로써 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 외에도 반란 초기에 말을 잘 안 듣는 기업인을 잡아들여 전두환 모양으로 아예 재산을 강탈해 버렸다. 박정희 집권기간 내내 엄청난 특혜사건과 비리가 꼬리를 물었다. 그 이유는 막 대한 금액의 정치자금 조달 때뿐이었고 원흉은 박정희였다. 서을 지하철처럼 새차 값을 내고 헌차 가져오는 일은 다반사였고. 돈벌이에는 육영수가 나서서 서을 중심가 고속버스니 커피 회사 등 수십 개의 기업을 운영했다 치부의 소문을 가곤지 위해 장학재단이니 육영재단도 만들고 혹시 있을 진도 모르는 은퇴를 위해 영남대학도 만들었다. 박정희는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만들고 배분했다. 국무총리 품위유지비로 월 천만원씩 받았다 는 게 정일권의 증언이다 이런 품위유지비는 한국의 모든 고급공무원, 단체장, 문화인, 심지어 는 야당인사들까지 받았다 60년대 중반 천만 원이면 지금 돈으로 수십억원이니 그 관리비의 규 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월남전 사상자 보상금 12억 불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스위스은 행에 예치된 60억 불이 넘는다는 돈의 행방도 알 길이 없다. 죽은 다음에 청와대에서 나온 천 문학적 고액권도 행방을 알 길이 없다. 요즘은 박정희 시대에 비하면 정말 깨끗한 편이다. 그 때는 공공 국유재산 전부가 아예 박정희 것이다시피 했고 박정희 허가 없는 사업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마음에 안 드는 기업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그렇 게 엄격하게 단속했지만 이후락이 나 박종규니 그 측근들이 돈 관리에서 떨어지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다. 떡고물이라는 말은 그때 생겼다. 누군가가 이후락의 축재를 비판하자 "떡을 만 지는데 떡고물은 자연히 떨어진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의 자금을 만지는 데 잔돈푼이 떨어진다 는 얘기다 그 떡고물 수준이 그때 돈으로 400억이니 600억이니 했다면 떡은 얼마나 컸는지..
♣마무리 박정희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항상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첫째로 꼽는다. 그리고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수 없었을 거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에 박정희를 싫어 하는 사람들은 경제성장의 박정희 혼자의 힘이 아니며 박정희독재가 없었 다면 더 잘살수 있었을 거라며 'If'를 말한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사실과 결과만 있을뿐이다. 부정하던 긍정하던 그리고 그 폐단이 누적되어 IMF등 지금의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한강의 기적'은 분명 박정희의 업적이다.
♣만약을 말한다. 앞에 난 역사에선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난 만약을 말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건 나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난 박정희는 영웅이 아닌 효웅이었으며 행운아였다고 평가한다. 만약 박정희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는 지금처럼 과대평가 되었을까? 아니였을 것이다. 악명높은 독재자 히틀러. 그도 민족주의자였으며 집권 후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깊은 수렁에 빠진 독일의 경제를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성장 시켰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한다. 만약 그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고 경제성장만 달성하고 암살당했다면? 그 판단은 박정희 찬양론자에게 맡긴다.
처음 박정희는 분명 민족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5.16은 국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쿠데타였지 독재를 위한 쿠데타는 아니였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는 첫 의지를 망각하고 독재자로 편해갔다. 변해가는 과정은 3차례의 헌법개정을 보면 쉽게 알수 있다. 나는 장담한다. 그가 암살 당하지 않고 계속 독재를 했다면 그의 최후는 더욱 비참했을 거라고...당연히 경제는 후퇴했을 것이고
지금의 박정희는 암살당한것에 대한 동정심과 죽음 직전까지의 경제성장의 업적 그리고 한나라당과 조, 중 , 동의 교묘한 세뇌에 의해 과대평가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암살당함으로서 많은 잘못은 덮혀지고 잘 된것만 부각된 희대의 행운아 인 것이다. 난 박정희를 싫어 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 의지를 잃고 독재자로 변질 되어간 그를 안타까워 할 뿐이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에 의해 과대평가 되어버린 현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