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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기적 고찰
게시물ID : phil_34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모부
추천 : 0
조회수 : 4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18 01:08:00

이 (어떤 게시판이 어울리는지)의심스러운 글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틀림없이 중요하고 매력적인 질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매우 개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증거는 이 글의 생각이 나에게 착상된 시기인데, 2012년 올림픽이라는 어수선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써졌다. 런던 올림픽의 환호성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동안 꼬치꼬치 캐묻기를 좋아하고 수수께끼 풀기를 좋아하는 이 글의 필자는 관악산자락의 어느 구석에서 난해한 질문들을 골똘히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올림픽 오심이 근심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무관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나갔다. 이것이 서문(혹은 후기)을 헌정할 기묘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이 글의 핵심이 된다. 그는 한국인들이 가진 소위 “냄비 근성”과 한국 문화에 대해 자신이 붙였던 협소한 물음표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냄비 근성”은 교양이 있는(혹은 그런 척 하는) 사람이 어떤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한순간에 끓었다가 빨리 식는 것을 볼 때, 흔히 등장하는 말이다. “냄비 근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초점은 일반적으로 끓었다가 ‘식는’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그러나 심화된 교양을 갖춘 사람은 식는 사람들이 아닌, 순식간에 끓는 사람들도 그의 인식으로 체포한다. 단순히 그 속도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속도로 끓을 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 지에 대한 의심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안 된 신생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그들은 과연 그들이 의도치 않게 영원히 파괘할 새싹(기본 이하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을 위해 여기서 말하는 새싹이 티아라가 아님은 분명히 해둔다.)들과, 의도치 않게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 낼 정신병자 같은 현무암을 인지나 하고 있을까? 더군다나 그들처럼 너무나 뜨거운 혹은 너무나 성급한 사람들, 그들과 똑같은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자신과의 어떤 동질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우리는 온천처럼, 처음부터 끓고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끓을 것처럼 티아라 사태를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티퀴 냄새 풀풀 나는 글들을 고개를 15도로 비틀고 눈을 흘깃하며 보아선 절대로 안 된다. 끓기 전에 반드시 충분히 쌓은 교양으로 이 사태를 검토하는, 끓는점이 2천도쯤 되는 물이 되기 위해 우리는 신중해져야 한다. 지금의 여론은 너무나 빠르고 강하게 타올랐기에, 필자는 뭇사람들이 연예계의 대사건이 터지면 의심을 품듯이, 인천공항매각이나 우주항공산업 민영화 따위의(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그런 조치가 정말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관한 문제의 탐구는 잠시 내려놓더라도, 혹여나 이 건이 ‘여태껏 모든 민영화가 그렇듯 이것도 개수작이야.’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는 것이 그 탐구 결과에 있어서 타당하더라도) 문제적인 사안을 정부의 인도(카레와 요가의 나라)적인 왼손이 덮으려는 술수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정부의 왼손들이 인터넷을 통해 우리의 관념에 인셉션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만한 상황이다.(물론 나는 왼손잡이를 혐오하는 따위의 미친놈은 아니다. 오히려 더 위대할 거 같다고도 때로는 느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내가 이 글을 써야 했던 운명의 복잡성을 더욱 튼튼하게 해줄 것이다. 내가 사람들이 지금의 형편없는 의식 방어 능력을 좀 더 견고하게 짜주어야 한다는 아주 오만한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음은 필자가 요새 읽기 시작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의 일부를 거의 인용했다. 사실, 서문의 상황도 똑같다. 여기서 밝혀두지만 나는 이 비정상적인 속도의 끓어오름에서 류화영이라는 아름다운 기포 현상 하나만을 좋아하게 된 병신이다. 그래도 내가 병신이거나 말거나, 티아라 내에 왕따가 있었다는 사실이 조잡하고 어처구니없는 자료들에 의해 너무나 빠르게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명백한 또 하나의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문화의 정의는 ‘어떤 민족의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통일’이다. 우리의 공적·사적 삶에 생산적이고 고유한 양식을 지닌 문화의 각인이 찍혀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게다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민족에게는 너무나 수치스럽고 기괴한 이런 사실을 우리나라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아주 진지한 어조와 위대성에 부합하는 정직한 태도로 시인해왔고 또 지금도 역시 시인한다면, 한국의 교양인들이 가장 만족하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만족은, 최근의 사태 이래, 언제든지 의기양양하게 환호를 터트리고 승리를 축하할 준비가 되어 있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아무튼 진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 속에서 살고 있다. 오직 극소수의 특출한 사람들만이 이 만족스러워하고 승리를 축하하는 신념과 공공연한 결함의 기괴한 대조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론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다(이는 그들이 적이라고 여기는 부류와도 같은 태도다.). -그런 대조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떤 힘이 그토록 강해서 “그래선 안 된다”고 지시하는 것일까? 그토록 강하고 단순한 감정을 금지시키거나 그런 표현을 저지할 수 있으려면 어떤 종의 인간이 지배권을 얻어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이런 권력, 이런 종의 인간들을 다음과 같이 명명하려 한다-그들은 교양의 속물들이다.

속물이란 말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학생 생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아주 통속적인 넓은 의미에서 예술을 관장하는 신 뮤즈의 아들, 예술가, 진정한 문화인의 반대를 지칭한다. 그러나 교양의 속물은 - 그 유형을 연구하고, 그의 신앙고백을 경청하는 일이 지금은 고통스러운 의무가 되었다 - 하나의 미신을 통해 “속물”이라는 종의 일반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다. 즉 그는 스스로가 뮤즈의 아들이고 문화인이라는 망상에 빠진 것이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망상인데, 그 때문에 그는 속물이 무엇이며 그 반대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속물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교양”이야말로 진정한 한국 문화의 당당한 표현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는 도처에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네티즌을 발견한다. 모든 공공시설과 학교, 교육 및 예술 기관이 자신의 교양 수준에 맞게 그리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설치되어 있으므로 그는 자기가 지금 한국 문화의 존경받을 만한 대표자라는 우쭐한 감정을 품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에 상응하는 주장과 요구를 한다. 그런데 만약 진정한 문화가 반드시 양식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고 또 추하고 변질된 문화조차 하나의 양식으로 조화를 이루려 하는 다양성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면, 교양의 속물이 가진 망상에서 나타나는 혼동은 아마 그가 어디에서나 자기 자신과 똑같은 특징을 재발견하고 모든 “교양 있는 사람”의 똑같은 특징에서 한국적 교양의 양식 통일성, 즉 문화를 추론하는 데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그는 주위에 온통 동일한 욕구와 유사한 견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가 어디로 가든, 종교와 예술을 비롯하여 많은 사물에 관한 암묵적인 협정의 끈이 금방 그를 둘러싼다. 이 인상적인 동질성, 명령을 받지 않았는데도 즉시 터져 나오는 전체 합주는 여기에 하나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믿도록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지배권을 장악한 체계적 속물 문화는 바로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직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나쁜 문화라고 할 수도 없으며 단지 문화의 반대, 즉 지속적으로 정당화된 야만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모든 교양인들에게 한결같이 눈에 띄는 특징의 통일성은 진정한 양식에 포함된 예술적으로 생산적인 형식과 요구들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부정함으로써만 통일성이 되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속물의 뇌에서 분명 불행한 왜곡이 발생했다. 그는 문화의 부정을 바로 문화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가 일관성 있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러한 부정들이 서로 연관된 그룹, 즉 비(非)문화의 체계를 얻게 된다. 굳이 양식화된 야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경우라면, 우리는 이 비(非)문화에 어느 정도 “양식의 통일성”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양식에 맞는 행위와 그것에 반대되는 행위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는 언제나 대립되는 행위를 취한다. 그리고 항상 그것을 택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위에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동질적 특징이 새겨진다. 그는 바로 이 특징에 입각하여 자신이 특허를 부여한 “한국 문화”의 성격을 인식한다. 이 특징과의 불일치에 입각하여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고 반항적인 것을 측정한다. 교양의 속물은 이런 경우 단지 거부하고, 부정하고, 비밀로 하고, 귀를 틀어막고,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증오와 적대의 관계에서도, 부정적 존재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속물로 취급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신에게 말해주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증오한다. 즉 그는 힘 있고 창조하는 모든 사람의 장애, 회의하고 방황하는 모든 사람의 미궁, 피로에 지친 모든 사람의 수렁,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족쇄, 싱싱한 모든 새싹을 해치는 안개, 탐구하며 신생을 갈망하는 한국 정신을 말려 죽이는 사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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