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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6.25전쟁을 유도했다는 주장인데 읽고 좀 반박해주세요
게시물ID : sisa_2206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깽이君
추천 : 0/4
조회수 : 1186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2/08/18 17:42:16

일베애들이 하도 함정을 팠는지 몰라도

함정 아니니까 좀 반박해주세요

제 주장이 틀린지 아닌지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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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종전 후, 캐논 소령은 미군정의 정보 부문을 총괄하는 G2에 정보장교로서 참가한다. 그 유능함을 높이 산 G2 부장 찰스 윌러비(Charles Andrew Willoughby, 계급 소장)가 점령정책을 실시하는 데에 있어 정보 수집을 위해 1949년(쇼와 24년)에 은밀하게 캐논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혼고(本郷)의 구 이와사키 별택에 본부를 마련한 캐논은 26명의 멤버를 조직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공작원을 거느려, 柿の木坂機関矢板機関日高機関등의 일본인 공작원 조직을 산하에 두고 있었다. 이 당시는 이미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있던 상태였고, 주로 북조선 관련 정보의 수집이나 소련의 스파이 적발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 뒤, 미군정 민정국(일명 GS)와의 정쟁에서 승리한 G2는 캐논 기관을 일본 공산주의 세력 박멸에도 이용했다.

1951년(쇼와 26년), 캐논 기관은 작가 카지 와타루(鹿地亘)를 유괴한 뒤, 장기간에 걸쳐 감금하고 미국의 스파이가 될 것을 요구하며 고문하는 카지 와타루 사건을 일으킨다. 다음 해인 1952년에 카지가 풀려나고 사건이 드러났지만, 이때 캐논은 이미 해임되어 귀국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캐논 기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1949년에 있었던 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시모야마 사건·미타카 사건·마쓰카와 사건)과의 관련성도 의심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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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캐논 사건에 대한 정보이다.

캐논사건을 보면 당시 간첩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로 정보를 몰랐다는 건 확률상 지극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일어나기 당시 에치슨 선언과 함께

한반도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댐

좀 이상하지 않음?

그리고 주한 미군에 대해서 잘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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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미국은 유엔에서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고 유엔임시위원단이 선거 및 정부수립을 감독하며,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1947년 중국대륙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야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소극적인 한반도정책은 주한미군 철수로 귀착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인하여 지상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고, 그해 미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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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제대로 된 군대 하나도 가지지 못한 대한민국인데다 한반도 북쪽은 소련의 주도하에 있는 김일성개새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철수를 하는 걸까?

그리고 에치슨 선언을 보면

<1950년 1월 10일 당시 미 국무 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대만-필리핀 선으로 한다고 언명하였던 것>

에서 한반도를 제외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한반도에 상륙해서 직접 정부수립에 관여했던 미국이 왜? 에치슨 선언을 함과 동시에 한반도를 제외했던 걸까?

위쪽에는 김일성새끼와 소련이 호심탐탐 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서 에치슨 조약의 오해와 스탈린 비밀문서 공개 등 언급하는 멍청이가 있던데

당시 cia 극동 고위간부였던 하리마오 박의 증언을 보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34804<연합뉴스다 한걸레 아니다 미친놈들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기자 = 지난 80년까지 미국 CIA 고위간부를 지낸 박승억(80.미국명 하리마오 박)씨가 한국전쟁이 미국의 방조로 유발됐다는 주장을 또 다시 제기하고 나섰다.

박씨는 저서 「살아 있는 전설 하리마오」(전3권. 새로운 사람들)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당시 미국은 북한의 남침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남한정부에 전혀 알려주지 않아 남한 내 위기의식의 약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 무방비상태에서 남침을 맞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의 남침전쟁 준비실태를 유리 속처럼 들여다보고 있던 나로서는 미국의 표리부동한 처사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면서 "남침전쟁 도발 방조와 유도 음모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가 전쟁 발발 한달 전 나의 암살계획을 동료 귀띔으로 알고 부대를 탈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의 주장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북한의 일방적 남침론을 내세우는 기존 정설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어 주목된다.

춘천에서 태어난 박씨는 해방 후 CIA 전신인 미 육군성 전략국 임시소령을 시작으로 미국 첩보업무를 맡았으며 CIA가 공식 발족한 47년부터 정년 예편된 80년까지 일부 기간을 빼고 35년간 극동지역 고위간부로 활약해왔다.

그는 현재 미국 시민권자로 LA에 거주하고 있으며 지난해 출간한 「38선도 6.25 한국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새로운사람들)에서 미국의 남침유도설을 주장한 바 있다.

박씨는 소설 형식의 이 자서전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주한 미군(군사고문단 제외)이 모두 철수한 후 6개월이 지난 49년 말경이었다"면서 "당시 한국정부나 군 고위층은 북한의 군비증강과 남침전쟁 준비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물론 일부에서 북한 남침설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한국 육본 정보국 소속의 북한침투요원들로부터도 이같은 정보가 입수되고 있었으나 어느 기관의 보고도 결정적이고 자신에 차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18개월 전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도발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세 호랑이' 중 하나로 꼽혔던 박씨는(빨갱이 아니라는 증거) "대통령이 주한미국 기관장들을 불러 북한의 남침설에 대한 진위 여부를 추궁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그럴리없고 그런 정보는 모두 역정보라며 남침준비설 자체를 부정하기에 바빴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지속적이고 완강한 부인에 대통령을 비롯해 국방부나 군 고위층 관계참모들은 한편으로 걱정은 하면서도 만성이 돼 북한 남침설의 위기감이 무뎌졌고 급기야 안일한 상태로 나사가 풀렸다는 얘기다.

박씨는 49년 6월 비전투요원으로 구성된 군사고문단만 남겨놓고 미군이 철수한 뒤 6개월 동안 수차례에 걸쳐 상관 킹스베리 장군(CIA 극동지부장)에게 울분을 토하며 `한국정부를 왜 속이느냐'고 따졌다면서 50년 새해 초 북한이 6월 25일 새벽 4시라는 남침일시를 정해놓은 정보를 CIA가 입수한 것을 계기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고 들려주었다.

그에 따르면 대만이 중공의 침략을 받았는 데도 미국은 이를 저지하지 않은채 트루먼 대통령이 마오쩌뚱의 티토화를 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국무장관 애치슨도 태평양 지역방위선에 한반도와 대만이 제외돼 있다고 선언했다. 통합참모본부 역시 한국이 외부 침공을 받아도 미국은 무력으로 저지하지 않겠다는 극비전략을 언론을 통해 은밀히 흘렸다. 즉 한국방위를 포기한다는 사인을 노골적으로 공산권에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한국전은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스탈린과 김일성의 도발의지는 꺾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그런데도 미 국은 그들의 남침을 막기는 커녕 한술 더 떠 도발의지를 방해할 생각이 없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발표함으로써 전쟁도발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방조.유도'한 이유에 대해 2차 대전중 생산된 잉여무기와 전쟁물자를 소비시킴으로써 공황위기에 처한 미국경제를 살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일본군의 항복이 예상보다 2년이나 앞당겨지자 당황한 미국은 남아도는 군수물자의 소비를 위한 새로운 전쟁이 필요했고, 그 결과가 한국전이었다는 얘기다.

그가 전쟁이 일어나기 한달 전인 50년 5월 24일 밤 11시 킹스베리 장군의 침실에 뛰어들어 미국의 진의를 추궁하자 이튿날 새벽 1시께 CIA는 긴급소집된 참모회의에서 그의 제거(암살)를 결정했다. 한 미군장교의 귀띔으로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 박씨는 숙소를 빠져나와 부대를 탈출한 뒤 제주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박씨는 북한의 6.25남침이 미국의 성공작이었다고 거듭 주장한 뒤 "당시 미국이 한국정부에 대한 간섭도 견제도 일삼지 않고 차라리 모두 철수했다면 적어도 군 수뇌부를 비롯한 전 참모진과 일선 고급지휘관들이 남침 두 시간 전까지 육본 장교구락부 개관축하 파티를 여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사진 있음>

 

반박해봐라 좀

미국이 6.25때 도와준건 좋은데

유도를 했다면 엄청난 개새끼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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