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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게시물ID : lovestory_453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자유천사
추천 : 0
조회수 : 83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20 17:27:37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물었던 24개의 질문이 백성호 기자에 의해서 <중앙일보>에 공개되었다.

이 질문지는 1987년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는 정의채 교수에게 전했다.
그 후 정의채 교수는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2년 전 제자인 인천 가톨릭대 교수 차동엽 신부에게 전했고 여기에 차 신부가 마침내 답을 달았다.
그리고 이를 보고 신천지예수교 이만희 총회장도 답을 내었으며
프레시안의 윤재석 컬럼니스트, 불교계 불학연구소장 허정스님도 답을 했다.

그 24가지 질문중 1가지를 소개하고

마지막 답변에 세상에 대한 진실과 이치을 통찰하시고

진실과 관련된 홈페이지를 현재 운영중인 분의 답변을 달겠다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차동엽)
예전에는 ‘천주교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거의 구원이 없다는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러다 바뀌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환점이었다.
천주교가 좀 더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른 종교의 면면을 공부해 보니 천주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
‘타 종교인의 구원 여부는 신이 결정할 문제다. 우리는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65년 이전에는 개신교도 다른 종교와 구분 없이 남으로 봤다.
그런데 65년 이후에는 ‘갈라진 형제’라고 부른다.

(이만희)
선한 일, 착한 일, 봉사 일을 많이 해도 다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사람들은 착하고 선하고, 돈(헌금) 많이 바치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구원받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 성경대로 해야 한다.

기록된바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며(마 7:21),
물(말씀: 씨)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요 3:5, 벧전 1:23).

(허정스님)
천주교에서는 ‘천주교 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가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고 한다.
입장이 바뀌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 생각되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시대에 따른 인간의 해석이 진실이 되는 종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욕계, 색계, 무색계의 무수히 많은 천상세계가 있다.
그 천상세계는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천상세계의 樂을 설명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곳에 가라고 권유하지는 않는다.
그 세계도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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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관련된 홈페이지를 현재 운영중인 분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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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거나 부처를 믿어야 극락에 간다는 말은
자기 집단과 종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 속에 불변의 절대적인 진리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는가?
앞의 성경의 근거에서 논의한 바에 의하면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의 근거인 예수님의 말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성경은 현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며
원시종교의 형태인 신에 대한 영적 숭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원리는 어디서든 똑같다.
세상은 하나이고 하나의 법계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작용하는 진리와 생명의 법칙도 하나인 것이다.

서양에 살던 동양에 살던 기독교를 믿던 회교를 믿던 불교를 믿든
사람이 살아가야하는 길은 똑같고 영혼이 결실을 거두는 과정도 똑같고
죽은 후에 가야하는 사후세계도 똑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는
생명의 실상과 우주의 진실을 꿰뚫어 본 성자들이 모두 인정한 바가 있다.
부처님은 자신은 과거 생에 아라한으로 천상에 머물다 왔다고 했으며
예수는 죽은 후에 천국의 보좌 옆에 앉는 구원의 사례를 말했으며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죽은 자는 산 자로부터 나오고 산 자는 죽은 자로부터 나오며
선한 영혼은 악한 영혼보다 더 좋은 운명을 가진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전생의 습관에 따라 다시금 메이게 되는데
마구 폭식하거나 제멋대로 산다거나 술에 취해 산 자는 당나귀나 그밖에 탐욕스런 동물로 태어나고
부정한 일과 포악한 일, 도적질을 한 사람은 독수리나 매 같은 것으로 태어나며
부지런하고 규칙을 즐기는 이는 개미나 벌이 되며 또 그들로부터 다시 인간이 나올 수 있다." 고 하여
사후의 생명의 이치를 잘 표현했던 것이다.

사후 영혼은 인과법에 의해 자신이 삶을 통해 지은 원인에 따라 결과를 받도록 되어 있다.
즉 욕심과 악으로 마음을 어둡게 하고 애착과 원한이 들러붙은 것은
탁하고 무거워 아래로 가라앉아 지옥에 떨어지며
올바른 이치와 바른 삶으로 마음을 정화하여 맑고 가벼워진 것은 높은 곳에 오르게 된다.

세상에 태어나 인간으로서의 크게 나쁘지 않는 삶을 살아
한과 집착이 크지 않은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근본을 버리지 않았기에
죽으면 잠에 빠지며 다시 인간으로 윤회를 한다.

그보다 더 큰 공덕을 쌓아 업의 힘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그대로 가지고 편히 쉬는 영생계에 든다.

이보다 더 공덕이 커 업 자체가 거의 사라진 사람은 해탈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의식 그대로 천상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사후 생명의 세계는 완전한 뜻으로 질서지어져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인간은 구원은 하느님의 자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어놓은 완전한 뜻과 이치에 의해 지은대로 받게 되어있는 것이다.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자신의 참뜻을 알지도 못하고 진리를 실천하지도 않는 자에게
단지 자신을 믿고 구원을 갈구한다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원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한치의 어김없는 뜻을 통해
지은대로 구원을 받는 완전한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 놓으셨다.
따라서 그분이 만들어놓은 우주의 질서는 완벽하여 그 자신도 거스를 수 없다.
만약 자신이 만들어 놓은 완전한 법칙을 스스로 어긴다면
그것은 자신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하느님이라는 것을 자인하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느님만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
영혼이 어둡고 무거운 자가 이 세상 속에 드리워진 생명의 질서를 무시하고
높은 차원의 장벽을 뚫고 하늘나라로 갈 수 없는 것이며
하느님이 죄많은 신자의 엉덩이를 떠받쳐 하늘나라로 밀어 올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생명의 질서이다.

그래서 과거 유태인들은 하나님을 영접하여 부지런히 섬겼지만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의 길을 가지 않고 위선과 탐욕으로 예수를 버린 결과
그 악한 과보로 인해 수천년간 나라를 잃고 떠돌았으며 핍박과 학살을 당하는 결과를 받았던 것이다.

 

지금 기독교는 잘못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참된 뜻을 실천하여 그 영혼에 좋은 결실을 쌓으려 하지 않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오도하여
매일 기도와 찬양으로 하릴없는 세월만 보내게 하며
신자들의 영혼을 미신과 무지로 쭉정이로 만들고
귀하게 번 재물을 교회에 바쳐 성직자들 배만 불려주는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삶의 결과를 스스로 받는 것이지 신이 구원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예수님이 자기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여 좋은 자기와 좋은 영혼을 얻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뜻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달리
주의 뜻을 행하지 않고 기존 유대교인들처럼 성령을 받아 구원받기를 갈구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의 질서에 어긋나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인간은 삶이 빈약해도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태어난 의미와 가치를 지키는 길이다.
만약 인간의 의식 속에 다른 신이 들어와 영혼을 잠식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의 씨앗을 상실하고 다른 신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불행을 맞게 된다.

지금 기독교에는 신에 의한 영적 감염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신이 창조주 하느님이면 좋겠지만
높은 차원의 절대자께서 속되고 욕심많은 인간의 탁한 육체 속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
지금 성령으로 영접하는 대부분의 영들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영이 아닌 것은
구약에 나오는 유대신들의 잔혹하고 편파적이고 복수적인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지금 인간세상에 대한 이러한 신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과거 원시시대 때부터 시작된 영적 세계의 음모에서 비롯된다.

영들은 생명의 세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체를 편히 쉬고
인간으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한 지속적인 음모를 진행해왔는데
이제 그 음모가 성공하여 성스러운 종교의 이름으로 당당히 인간의 몸을 지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마침내 현 인류의 대부분이 영에 감염되어
생명으로서의 맑음과 건강을 잃어버리고 말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삶을 통해 더 좋은 자기를 얻기 위함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원인 즉 선업을 많이 지어야 한다.
세상을 바로보고 바르게 축복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좋은 근본을 이루게 되니
이러한 깨우침과 실천을 통해 그 영혼은 더욱 맑고 가벼워지고
한과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이승의 탁한 욕계에서 벗어나 고요히 머무는 영생계와 이상향인 천상에 이르게 되며
마침내 완성에 이르는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이곳과 현행 불교와의 차이가 있다.

현행 불교는 대승불교이후 힌두교의 공의 논리를 받아들여 관념화함으로써
선업마저도 업으로 보아 선업마저도 지움으로써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적멸로 가라고 한다.

이것은 허정스님도 같은 입장이다.
불교에서도 욕계, 색계, 무색계의 무수히 많은 천상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도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윤회의 세계이기 때문에
선업마저도 버려야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평안을 찾는다고 본다.

이것은 용수의 공사상이 대승이란 명목으로 불교 속에 들어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공사상은 힌두교의 마야사상을 받아들여 이 세상의 본질을 환으로 보고
실상은 본래 없는 것이니 선업과 악업의 구별을 지워버리고
부처마저도 죽여버리는 무분별지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 결과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음의 정견으로 본 생생한 삶의 실상과 실천력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없다고 보는 관념적이고 기계적인 공에 빠져 무기력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과 같이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는
좋은 원인을 분명히 밝혀 억지로 행하려 해도 실천하기 힘든데
관념에 빠져 선업과 악업이 본래 없다고 하니
더 이상 불교는 선업을 실천할 현실적인 힘이 사라져 패배주의 말법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유위법이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과법에 따라 원인과 결과로 나타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이니 악업을 행하면 소멸에 이르고
선업을 행하면 천상에 이르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것은
모든 부처의 공통된 가르침인 칠불통계(七佛通戒)의 핵심이니
이를 오늘날 대승불교가 부정한다는 것은 이미 정법이 아닌 것이다.

세상을 바로보면 그 속에 세상을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하는 옳고 그릇된 일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 속에 존재하는 옳고 그름의 인과를 아는 것이 정법이다.
옳고 그름을 보는 자만이 인과를 볼 수 있고 공덕을 지을 수 있으니
진리를 배우고 깨쳐 옳고 그름을 깨닫고 공덕과 선근을 쌓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수행의 요체인 것이다.

그러니 선과 악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선은 세상을 축복하는 것이며 악은 세상을 망치는 것이다.
따라서 선업을 쌓으면 맑고 좋은 선근이 생기고
악업을 쌓으면 어둡고 나쁜 악근이 생겨 자신을 망치게 된다.

선업을 행하면 이치에 부합되어 그 마음이 청정해지고 좋은 근본이 생긴다.
이 좋은 근본은 다시 세상을 바로 보고 축복하여 자신의 삿된 업을 태워버린다.
그러나 악업을 행하면 이치를 어겨 마음이 어둡고 모든 것이 혼동스러우며
악한 짓으로 원한과 집착을 쌓아 지옥에 떨어지고 자신을 파멸시키게 된다.

따라서 악업은 업을 쌓는 것이지만 선업을 업을 지우고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업이지만 정직하게 사는 것은 선업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면 마음이 맑아지고 어둠이 없어서
모든 일을 당당하고 밝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 좋은 근본을 지을 수 있게 되며
이러한 근본이 커져서 다음 생에 나면 좋은 운명을 받고 큰 공덕을 지어
마침내 인간완성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선근이 곧 해탈에 이르는 근본인 것이다.

이러한 실상 속에 있는 이치를 모르니 관념적인 공에 빠진 자들이
악업도 선업도 모두 버려야 해탈에 이른다고 이치에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선정으로 세상이 공한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벗어나라고 한다.
그러나 공덕이 적어 마음 속에 맑은 근본이 없는 자가 아무리 생각으로 업을 지우려한들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업을 지울 수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무조건 지우는 일은 인과법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실천이 없는 수행은 도로아미타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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