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때부터 일기 쓰는걸 무척 싫어했어. 재미 없었거든, 귀찮고. 매번 했던 얘기 또 쓰고 또 쓰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랐어. 오늘은 학교에 갔는데 누구랑 놀아서 재밌었고 날씨는 어땠다. 끝. 비슷한 내용에 다른거라곤 날짜 요일 정도? 하루는 너무 싫어서 엄마한테 물어봤어.
엄마, 일기는 왜 써야돼? 어차피 맨날맨날 똑같은 일만 쓰는데. 안써가면 학교에서 혼나잖니.
물론 내가 듣고싶었던건 그게 아니었지. 그래서 이번엔 아빠에게 물었어.
아빠, 일기는 왜 써야돼? 일기? 그거 그냥 글쓰기 연습시키려고 하는거야. 열심히 써.
글연습? 그냥 아무렇게나 둘러댄거같은데 기분탓인가.
선생님에겐 묻지 않았다. 그때는 교권이란게 있던 시대였거든. 괜히 그런거 물어봤다가 학습태도 불량이라고 혼나면 어떡해.
아무튼 그 시절에 아무도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어. 일기를 왜 써야 한다, 공부를 왜 잘해야 한다, 그런거. 내가 엄청 궁금해했던.
일기의 의미를 알게 된건 그로부터 10년쯤? 대학생이나 되고 나서였어. 대학 동기. 긴 머리에 아담한 체구, 귀여운 목소리와 천사같은 성품이 합쳐져 과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친구가 있었지.
어쩌다가 둘이 얘기를 하게 됐어. 그게 종강파티에서였던가? 왜 일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위에서 했던 초딩때 일기 얘기를 했거든. 근데 내 말을 듣더니 자기는 아직도 일기를 쓴다더라고. 하루하루가 너무 재밌어서 그냥 보내기 아쉽다는거야. 나중에 잊지 않게, 잊어도 보면 다시 기억이 나게, 이런 재밌는 날들이 있었다고 기록해놓으려고, 그래서 일기를 쓴다더라. 지금도 어렸을 적 일기 보면 재밌다고, 나중에 늙어서 젊었을 적 일기 보면 또 다르게 재밌을 거라고.
충격이었어. 어린 애들이 글연습이나 하던걸 두고 재밌다니. 일기쓰기가 재밌을 정도로 삶이 즐겁다니. 소화기를 머리에 얻어맞은듯 가만있다가, 그제야 차츰 깨달았어. 일기를 쓰고 말고가 중요한게 아니야. 일기에 쓸 만 한 경험을 하는 것. 지나가는게 너무 아까워서 기록해놓고싶은 기분이 들 만한 경험을 하는 것. 그게 핵심이었던거야.
돌이켜보니까 난 삶을 너무 단순하게 산 것 같더라. 일기 쓰라니까 일기 쓰고, 공부 하라니까 공부 하고, 학원 가라니까 학원 가고, 대학 가라니까 대학 가고...... 그러니까 걔만큼 삶이 재밌다고 느낄만한 게 전혀 없었다고. 기껏해야 친구들이랑 노래방 피씨방 가는 정도? 그것도 그닥 특별한 경험은 아니잖냐.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결심했어. 이제부터라도 일기를 쓰기 시작해보자. 매일매일 신나고 재밌는, 여태 겪어보지 못한 경험들을 만들어서 일기장에 채워넣자. 그러니까 우선은 내 앞에 있는 이 귀여운 애한테 고백해서 여자친구로 만들어보자.
알아, 그건 진짜 아니었지. 볼 것도 없이 까였고 난 부랴부랴 입대했어. 거기선 수양록이라는걸 주더라.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