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북스토리 - 장진성
7. "뭘 물어보시게요?" 틀림없는 한국말에 나는 그 여자가 구면처럼 느껴졌다. "네"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내가 절박해보였던지 그 녀는 선뜻 나에게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나는 그때 가까이 오는 그가 고마웠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아직 멀쩡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였다. "어디를 물어보고 싶은데요?" 나는 마주 선 그가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내 몸 냄새에 불쾌해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우선 내 말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을 약속해주십시오" "?" 여자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야 내 아래 위를 얼핏 흩어보았다. "전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고 아가씨에게(동무라고 말할 번했다.)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5분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나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가 북한에서 왔고 친구랑 헤어진 딱한 사정이며,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까지 절절히 호소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왠지 그때에는 같은 사람 대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아닌 듯싶어서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 여자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 물음에 목구멍까지 나오는 "밥입니다." 말 대신 나는 "한국 가는 방법을 좀 알려주십시오."했다. 내가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그 여자는 낯선 남자라는 경계심을 풀고 부지런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양보다 북경 영사관으로 다들 간다는 것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대련으로 가면 고생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돈이 있으면 중국 여권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참으로 아는 것도 많았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이 질문이면 대화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그 여자는 내가 찾던 말동무임이 분명했다. 또 다시 이어가는 그 여자의 말 들 속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화룡시에 사는 자기 아버지가 탈북자들을 농사시키며 많이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놀라며 그의 아버지를 대단한 분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연길에서 심양까지 오는 길에 신세졌던 고마운 조선족들과 그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을 열렬히 토로했다. 그 여자가 불쑥 물었다. "이 심양에 친척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어디서 잡니까? 밥이나 먹었습니까?" 나는 먹었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안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 여자는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했다. 혹시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핸드폰과 중국말이 조금 긴장되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돌아선 그 여자가 활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친구가 나에게 찜질방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물어보니 표를 주겠답니다. 거기서 자겠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이름을 물었다. "왕초린!" 몇 번을 못 알아듣는 내 귀가 신기했던지 자기 이름을 소리치며 깔깔 웃었다. 나이는 내가 알아맞히겠다고 했더니 고기 굽는 리어카를 가리키며 맞히면 저 양꼬치를 사주겠다고 했다. 먹을 것 때문에 여자 나이를 가슴 조이며 점쳐 본 적은 아마 그때가 난생 처음인 것 같다. 얼마나 그게 빨리 먹고 싶었으면 "26살!"하고 외친다는 것이 "양꼬치!"해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초린은 내 실수를 모른 채 양꼬치를 진짜 사줄 것이라며 거듭 다짐했다. "26살"조심스런 내 음성에 "몇 살?" 다시 물었다. "26살"내가 좀 더 크게 말하자 초린은 손뼉을 짝짝 쳤다. "틀렸어요, 에궁 양꼬치 못 사주겠다……." 그 말에 양꼬치가 더 간절해졌다. "도대체 몇 살이에요?" "27살" 단호한 그 대답에 나는 속으로 '일 년 늦게 태어 날 것이지...'하고 푸념했다. 그러나 초린은 마음이 예뻤다. 일 년 젊게 봐준 턱이라며 쪼르르 달려가 양꼬치를 네 개씩이나 사들고 왔다. 나는 사람은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깐! 이렇게 감탄하며 두 개를 먹었고 초린이 준 한 개를 또 먹었다. 초린이가 꼭 소원 성취하라며 친구로부터 받은 찜질방 표를 내밀 때 나는 부탁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난 그동안 공안에 쫒기며 사람이 무서웠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초린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힘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대상이 기다리고 있어요." "대상? 그게 뭐죠." "음,,,뭐랄까. 한국에선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잖아요. 우리 조선족은 대상이라고 해요" 이후 목욕을 하면서 나는 초린의 말에서 새롭게 안 대상의 의미에 피씩 웃었다. 뜻은 같은데 말이 다른 이국적인 여자를 직접 만난 그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새로워서였다. 나는 그날 씻고 또 씻었다. 몸이 깨끗해 질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아 양꼬치 먹은 힘을 다해 때를 밀었다. 비누를 문댈 때 마다 친구생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더운 물에 목욕을 하는데 친구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광용에게 전화 할 돈도 남기지 않고 술을 사 먹은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몸은 깨끗해졌지만 대신 아프지 않나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온 몸이 나른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자게 됐는지. 그것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했다. 이어 초린이 생각이 났다. 참 고마운 애였지. 그런데 그 얼굴을 아무리 되새겨 보려 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양꼬치만 보였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누굴까? 나는 망설였다. 두만강을 넘은 후부터 내가 먼저 남을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지요? 어제 그 사람 맞지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니 글쎄 초린이가 아닌가. "어떻게? 여기 어떻게 왔어요?" 나는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지인을 우연히 만난 행운에 내가 한국말을, 그것도 북한 억양으로 소리치는 줄도 몰랐다. "짜잔!" 초린은 폴싹 주저앉으며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흰 빵을 보여줬다. 나는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음식보다 사람이 더 반가웠다. "어떻게 왔어요? 친구랑 같이 왔어요?" "아니, 음식 줄려 왔어요. 어제 헤어질 때 사람이 그립다면서 더 있어달라고 말하던 게 자꾸 맘에 걸려서 분명 아침을 굶었겠구나, 이러면서 왔어요. 먹어요." 빵을 집어주는 그 손에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갑자기 공안이 가져간 내 외투안의 달러 생각이 났다. "내가 어제 대상을 만나 자랑했어요. 이러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이러이런 도움을 주었다고" 공상에 잠긴 듯한 초린의 표정이 무척 귀여웠다. "대상이 뭐라고 해요? 중국 사람인가요?" "네, 여기 한족이예요, 금방 뭘 물어봤죠? 아 참 내 대상이 뭐라고 했는지 그걸 물어봤죠?" 나는 그냥 웃었다. "잘했다고 하던데요. 날 보고 착하다고 하면서 일요일 옷 사 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착하죠?" 나는 둘 다 착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대상도 김정일이 엄청 싫어해요. 아마 중국 사람들은 다 미워할걸요. 배 나온 게 싫어서. 조선은 다이어트 안 하죠?" 나는 마음씨도 말도 예쁜 초린에게 물이라도 떠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써 그가 냉큼 일어나 물 컵을 두 개 들고 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앉는데 옷 사이로 가슴굴곡이 살짝 보였다. 예쁜 그 속살은 도덕이요, 위선이요 하는 그 모든 겉 치례들을 부정하며 순수한 초린이 자체를 보여주는 듯싶었다. "한국 언제 갈려고요?" 나는 아무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설사 초린이가 그냥 사라진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엇인가 얻는 것 같았다. 초린은 영리하기까지 했다. 광용에게 친구안부를 묻는 문제는 자기가 맡겠으니 한국 갈 큰돈을 해결할 논의나 하자고 하였다. "돈 좀 벌만한 재간이 뭐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중국에서 지금껏 잘한 짓이란 공안을 피해 달아난 것밖에 없었다. 한숨 끝에 피아노를 좀 친다고 말을 흘렸더니 초린이가 버릇인지 손뼉을 쳤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아요?" 서울에서 내가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피아노를 치면 그들은 북한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냐는 식으로 놀라군 한다. 마치도 북한은 음악도 없는 나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때도 초린은 피아노란 말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어느 정도 치세요?" "체르니 50번 정도" 초린이가 피아노를 전혀 몰랐다. 체르니 50번이라고해도 그 의미를 이해 못하기에 나는 연습과정을 한참이나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초린은 자기 대상 조카가 한국인이 많이 오는 서탑에 사는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 용돈도 벌고 기회도 생길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감격에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자 초린은 손뼉 치며 응원해주었다. 8. 초린이는 나 때문에 거의나 두 시간 넘게 여기 저기 통화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친척의 허락보다 그의 전화비가 더 걱정됐다. 북한 같았으면 그 통화 값이 일반 주민 월급의 3배가 넘을 것이다. 북한에선 핸드폰이 특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입비만 800달러가 되고 그 외에 접수비용 100달러를 더 내야 한다. 그러고도 중앙체신성 체신상의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에 중앙체신성은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성으로부터 신청자의 범죄경력, 혹은 핸드폰 사용가능 여부를 조회 및 협의한다. 모든 신청자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핸드폰 번호를 줄 때 중앙체신성에서 두꺼운 중국산 구식 핸드폰을 300달러에 의무적으로 사도록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번호를 받을 때만도 허가결정 번호를 보니 2000번 안이었다. 그 소수의 특권으로 들고만 다녀도 폼 나는 물건이기 때문에 대부분 핸드폰 사용자들은 돈을 따지지 않는다. 별도로 해외에서 작고 예쁜 외국 핸드폰을 구입하여 쓰면 그만인 것이다. 가장 인기는 액정판이 칼라로 된 한국의 삼성 핸드폰이 다. 이렇게 핸드폰 구입비까지 합쳐 거의 1500에서 1800불을 주어야 진정 목청 큰 핸드폰 소유자가 되는 것이 내가 북한에서 탈출할 때 당시의 2004년 실상이다. 일반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 2500원인데 핸드폰 한 달 최소 통화비는 2만원이니 열배나 넘는 통화요금에 습관적으로 늘 신경이 쓰였던 나는 초린이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설 때 손을 저었다. "안 된다면 그만 둬, 어차피 한국 가야 하는데" "아닌데, 데려 오라는데" 초린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심양의 서탑이란 곳은 중국에 와서도 내가 처음 본 개혁개방 도시였다. 외국의 유명 로고타이프는 물론 한글간판들이 많고 너무도 번화하여 한국이 아닌가싶을 정도였다. 1월말인데도 흰 종아리를 드러낸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신기했다. 김정일과 함께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식사하며 봤던 왕재산경음악단 무용수들의 짧은 치마 이후 두 번째인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친구를 만났던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당조직부 5과에서 지도원을 했던 친구는 할아버지가 김일성의 동지였고, 아버지는 김정일의 동창생이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조직비서가 혁명선배들을 잘 모실 줄 안다며 사례를 든 이름이여서 북한에서 더 유명했다. 그래서 또 우리는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 살인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변화와 세계가 보이는 이 번영의 도시로 친구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생각으로 초린이가 앞에서 웃으며 손 흔드는 데도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갔다. 초린이가 삼촌이라고 소개한 사람의 집은 연길의 신광용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평수도 꽤 넓었고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무척 밝았다. 가죽소파에 앉을 때에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일단 피아노를 보여 주십시오." 아들 전용으로 보이는 작은 방에 검은 색 YAMAHA가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기 바쁘게 페달부터 밟아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피아노를 그냥 방치했으면 오른 쪽 페달이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 뻑뻑한 게 긁히는 감이 들었다. 건반을 맨 아래 옥타브 음부터 위까지 눌러보니 소리는 괜찮아보였다. 검은색 건반들도 비교적 정상이었다. 다만 조율하지 않은지 좀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피아노는 노래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자주 관리해주지 않으면 계절과 집안의 온도 변화로 사람의 목소리처럼 음정에도 이상이 온다고 훈시했다. "한번 해봐요" 초린이가 참지 못하고 졸랐다.나는 숨찼던 시간들을 잊고 잠시나마 안정을 얻고 싶은 갈망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속으로 먼저 의미해 봤다. 그러고나서 "라" 온음을 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오른 손으로 미 라~도 미 라~도 이렇게 8분음표로부터 시작하자 옆에 선 초린은 두 손을 살포시 마주 잡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가을의 고요를 들려주는 것만 같은 전반부 선율에서 긴장으로 종 종 잊었던 두고 온 집을 보고 싶었다. 아니 보였다. 내가 치던 피아노며 어머니가 늘 앉아 감상하시던 소파, 내 귀가 어두워진다며 아버지가 감춘 헤드폰 대신 녹음기 스피커에 갔다 대고 몰래 듣곤 했던 어머니의 청진기. 그리고 누나가 안고 있던 조카의 작은 손까지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별이 슬픔으로 이어지고, 소원이 공포로 변하던 여기까지 오는 길의 갈래마냥 내 손이 빨라지는 간주와 후반 부분에선 심장이 막 뛰었다. 마지막 음정과 함께 페달에서 조심히 발을 뗄 때에는 미간이 떨리며 끝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물을 떠 가지고 온 초린은 건반에 그냥 올려 진 내 손에 쥐어주며 다른 때와 달리 조용히 말했다. "우리 삼촌 좋은 사람이예요, 그치 삼촌? 나도 오빠가 한국 갈 때까지는 친구처럼 잘해줄게요." 거실로 옮겨 앉은 우리는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린의 삼촌 말에 의하면 애 교육은 신경 쓰지 말고 기회가 오면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아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려는 이유는 전문성보다도 인성교육 차원이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하면 너무도 고집이 세고 난폭해서 음악정서를 주입시켜 억지로라도 교정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다. 나는 정서를 알자면 우선 음감부터 익혀야 하기 때문에 청음연습을 동반하며 피아노를 배워주겠다고 했다. 삼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갑을 꺼내어 50원을 내밀었다. 초린이가 손뼉을 치려다 말고 자리를 박차며 발끈했다. "삼촌 더 주세요!" 당황한 나는 집에서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큰 신세라며 일어선 초린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간 그 손의 부드러움이 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산 속에서 날을 새고 소외양간에서 쪼그리고 잘 때 친구와 내가 주로 만졌던 것은 거친 것들밖에 없었다. 때로 친구의 손을 덥석 잡을 때에도 사람의 손이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떨리는 전율이 만져졌고 뜻밖에 살아난 두 목숨이 만져졌을 뿐이었다. 나는 초린의 그 손에서, 그 촉감에서 삶과 인간의 향수가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선불일 뿐이라며 한 달에 350원을 주겠다고 말하는 삼촌을 향해 눈물에 젖어 쏘아보던 초린의 그 눈을 가끔 그려보군 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거의 마칠 때쯤 문이 떨어져 나갈듯 열리며 조그만 애가 쳐들어왔다. 삼촌이 중국말로 소리치는데도 그 애는 무엇을 찾는지 아랑 곳 없이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문이 깨져나갈 듯이 쾅 닫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10살짜리 어린 애가 아니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싶어 웃음이 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 애는 훨씬 씩씩했다. 눈 떠서 잘 때까지 뛰거나 고함쳤다. 매일 아침 9시부터 나는 가르쳤고 초린은 옆에서 통역하고, 이렇게 어른 두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통제가 안 됐다. 피아노 앞에 앉으라면 의자위에 올라서 건반을 발로 밟았고 청음연습 시키려면 들려주는 음정마다 놀리듯 강아지 흉내 내며 멍멍했다. 보다 못해 삼촌 엄마가 한 손엔 막대기와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으름장 놓기도 했다. 초린의 설명에 의하면 삼촌엄마가 막대기를 들면 애가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닐세라 삼일 후 그 녀석이 나에게도 칼을 장난감처럼 쳐들고 덤벼들기도 했다. 김광선에게 친구의 행처를 묻고 있는데 전화 선 코드를 뽑기에 쏘아본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나는 그날부터 음악선생이 아니라 독재자가 되었다. 야단치는 것은 기본이고 애가 반항하려면 시범으로 초린이를 때린 척 했고 초린이는 아파 죽는 척 했다. 한번은 어린놈이 초린의 가슴을 들여다보겠다고 막무가내여서 막대기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리기도 했다. 울지도 않고 씩씩대던 그 동심의 결심이 어떤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애가 밖으로 도망친 후 삼촌이 부르더니 70원을 주었다. 하여 내 주머니엔 120원이 모아졌다. 나는 그 돈으로 초린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고마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도피생활로 잃었던 나의 인성을 찾고 싶었다. 떠돌며 쫓기는 과정에 밟히고 소멸된 내 인격과 자존심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인간으로 복원하고 싶었고 그 열정과 지혜로 하루 빨리 한국행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해가 점점 식어가는 저녁 쯤 나는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초린과 그의 대상, 이렇게 셋이서 웨이터들이 현관 앞에 줄지어 선 고급음식점으로 갔다. 내가 사는 밥이어선지 입맛에 맞았다. 초린의 대상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맘이 통할만큼 괜찮아 보였다. 나는 비로소 초린이의 앞날이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그 대상이 은근 슬쩍 부러웠다. "너 배신만 해봐라!" 술이 조금 들어가니 이런 공갈도 하게 됐다. 웃으며 던진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초린의 대상은 좋은 뜻인 줄 알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나는 그때 언어란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사람의 모든 감정은 언어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고 새삼 알았다. 밥값은 내가 몰래 계산했는데 모태주가 비싸서인지 조금 모자랐다. 초린이 카운터로 달려와 야단치는 것을 나머지 돈만 겨우 내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탑으로 갔다. 대상이 거스름돈을 안 받겠다며 택시에서 먼저 내리자 초린은 기어이 받아내어 내 주머니에 살짝 넣어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온 그 손을 또 한 번 잡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초린이가 두 남자를 양 옆에 끼고 콩 콩 뛰며 걸어서 행복했다. 삼촌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우리는 열려진 문 안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공안이 두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왠지 이상하게도 죽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의 상황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촌 아들이 내 앞으로 흔들흔들 걸어오더니 내 배를 꾹 찌르며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안 한 명이 내 앞으로 바투 왔다. 대뜸 초린이가 나서며 그 말을 받았는데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안과 초린이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갔다. 이때라 싶었는지 초린이 삼촌이 설명했다. "우리가 전에 당신이 탈북자이기 때문에 공안에 말하면 붙잡히니깐 절대 밖에 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오늘 저 놈이 나가서 탈북자가 있다면서 공안을 데리고 온 거요. 이 사람들이 그래서 왔는데 초린이가 금방 한국 사람이라고 했으니 절대 놀라지 말아요." 공안이 나에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초린이가 애인처럼 내 팔을 끼며 웃었다. "여권 보여 달라고 해요. 가방을 분실했다고 내가 말해주겠으니 아무 이야기나 하세요. 빨리" 우리의 긴장과는 상관없이 덩지 큰 초린의 대상이 다른 공안에게 꽥 소리쳤다. 아마 담배를 끊으라고 욕을 한 것 같았다. "초린아. 미안해, 나 때문에 삼촌이 벌금 물리는 거 아니야?" 내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초린이가 공안에게 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공안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급하게 했다. 초린이가 내 팔을 꽉 그러안았다. "어머나! 차를 부르고 있어요, 어마나 어쩌지?" 그리고 비명처럼 중국말로 소리치자 대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공안을 콱 밀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초린이가 내 앞을 다급히 막아섰다. "뛰어요!" 나는 계단을 몇 개씩 짚으며 미친 듯이 날아 내려왔다. 내 뒤에서 울리는 고함과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보다도 그 이후로 초린이와 영 영 헤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9. 밖으로 달려 나와 나는 가장 구석진 곳에 숨었다. 혹시나 공안이 가고 나면 초린이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설사 붙잡혀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도 감사하단 인사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 현관이 보이는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았다. 숨을 겨우 진정할 때쯤 사이렌을 울리며 공안 차가 왔다. 뒤이어 두 대가 다시 들이닥치며 모두 8명이 내렸다. 4명은 올라가고 나머지는 나를 찾으려는지 흩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날 발견할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할 때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 처음엔 걷는 척하다가 이어 냅다 뛰었다. 아마 십 분 넘게 달린 것 같았다. 공안이 따라 붙지 않았다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했을 때에야 허리를 숙이고 토하듯 기침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 밤은 몹시 추웠다. 연길에선 어떻게 산에서도 이틀이나 잤을까. 얼어 죽지 않았을까. 초린이 덕에 호강했던 며칠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고, 도망칠 때 뒤에서 울렸던 쿵 소리가 공안이 문을 막고 있던 초린이를 밀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넘어지며 머리가 깨진 것은 아닌지 그가 불쌍해서 울고 싶었다. 나는 내가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온 길을 더듬어 되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초린이 삼촌 집에서 외출 첫 날 당한 일이라, 그리고 친구랑 함께 뛰었다면 약속대로 골목마다 오른쪽으로 돌아섰겠지만 너무 여념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문에서 내려다 본 기억으로는 기차역과 여러 선의 레일들이 뻗은 곳이어서 나는 그 근처에서 온 밤 헤매었다. 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한참 후였다. 그러나 나는 허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났다. 초린이가 맛있다며 손뼉 치던 음식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날 밤 장춘에서와 마찬가지로 PC방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시집노트와 신분증이 있는 곳을 만져보니 그대로였다. 가진 것이 많았다면 몰랐겠지만 그때에는 내 재산이 그게 전부여서 겨울옷은 주머니가 많아서 더 따뜻하게 여겨졌다. 초린이 삼촌 집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어둠 속에서 미처 못 봤던 건물들이 난잡해서인지 밝은 낮이 도리어 더 캄캄했다. 초린이가 표를 주었던 찜질방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 앞에서 가다려 보련만,,,,택시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도통 알 재간이 없었다. 나는 목숨을 건 이 먼 탈출에서 좀 더 세심하고 치밀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심각하게 반성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방법을 고심했다. 문득 광용이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군 했으니 그의 핸드폰에 삼촌 집 번호가 남아있으리라. 그래서 전화를 하면 초린은 기필코 다시 달려 나오리라. 그것이 안 된다면 그동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돈! 이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광용에게 전화하고 다시 초린이 삼촌 집으로 연결하자면 최소 1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나는 혹시나 떨어진 돈이라도 없을까. 본능적으로 보도블럭을 유심히 살폈다. 땅만 보며 30분 걸었는데도 땡전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초린이가 언젠가 이야기해줬던 서탑교회가 기억이 났다. 탈북자들이 거기 가서 동냥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돈을 많이 준다는 것이었다. 어떤 탈북자는 그 돈을 모아 여권을 사서 편안히 갔다고도 했다. 하여 머리를 쳐들고 십자가가 솟아있는 그 하늘을 찾았다. 인생을 통째로 맡기는 구걸이 아니라 인간 對 인간으로서 전화비 1원만 부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절대 동냥으로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보이는 것은 부와 번영을 다투어 자랑하는 건물들과 고객을 부르는 광고 간판들뿐이었다. 그 속에 경회루라는 한글 간판이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 식사 전이라 청소하는 아줌마만 있었다. "안녕하세요"인사했더니 아직 식사시간 전이라고 말해 나는 얼른 서탑교회를 물었다. 그가 그려준 약도와 설명대로 15분 쯤 걸어서 찾아갔더니 마침 한 무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현재 크리스챤이다. 주말마다 강남교회에서 기도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아마 예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들이 흘리는 한국말이 나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내가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내 민족, 대한민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패션도 남달랐다. 옷감 재질이나 디자인도 중국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생머리 여자와 머리를 밤색으로 염색한 젊은 남자가 내 옆을 지나칠 땐 북한에서 보았던 "가을동화"드라마 주인공들 같기도 했다. 뿌듯했다. 나의 민족이 보기 좋아서 더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미 그들 속에 평등하게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1원쯤은, 이런 생각으로 왔지만 1전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마치도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손 내미는 것 같고 내 어머니가 구걸하는 것 같아 도저히 용납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아 문을 열려는데 지키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목사 좀 만나려고 합니다. 꼭 말씀 드릴게 있어서 그럽니다." 내 억양에서 북한 사람임을 금방 안 그 사람이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죄송한데 목사님은 예배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오세요, 그때 돈 줄게요, 지금은 안 돼요." 난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난 돈 구걸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국 가려고 왔다구요." "여기 탈북자들 오는 곳이 아닙니다. 영사관이나 대사관으로 찾아가세요, 탈북자들이 여기 자주 오기 때문에 공안도 근처에 많아요, 안 잡히겠으면 빨리 가세요." 서탑교회를 빠져나와 공안을 뒤로 의식하며 걸음을 다그치는 나의 가슴 속에선 울분이 치솟았다.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는 "우리 말"이란 시가 있다. 남의 말에 억눌리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그 우리 말이 "남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국어라고 생각해보시라"고 호소하는 시가 바로 그때 심경을 그대로 옮긴 시다. 나는 정말 그때만큼 대한민국이 미워본 적 없었다. 내 짚는 걸음마다 연길시장 끝에서 외치던 친구의 절규도 들렸다. "우린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잡힐바엔 차라리 죽으려고 샀다! 왜?" 심장이 울렁거렸다. 친구가 선택했던 칼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지금 깨닫는 것을 친구는 그때 먼저 안 것일지도 모른다. 공원의 차디 찬 벤치에 앉아 갈 곳 없는 운명을 생각하니 만약 공안과 마주서면 어떻게 할까. 이런 마지막 상황을 그려보게 되었다. 만약 칼이라도 있었으면,,,혹시나 하는 마음에 윗 주머니를 더듬는데 무엇이 잡혔다. 손을 넣어보니 종이었다. 꺼내어 집어 던진 그 종이를 보던 나는 벌떡 몸을 솟구쳤다. 돈이 아닌가. 그것도 1원짜리 두 장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아니 어제 밤 택시에서 내릴 때 초린이가 기어이 챙겨 넣어준 거스름돈, 그 2원이었다. "초린아!" 나는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주먹으로 씻고 나면 또 흐려져 앞을 가렸다. 마침내 전화를 밖에 내 놓고 통화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 나는 돈을 던지다 시피하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그다음 광용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초린의 얼굴을 생김 그대로 기억해내려 했다. "여보세요" "나예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광용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통화시간을 단축할 일념으로, 그래야 초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오직 그 한 생각으로 빠르게 말했다. "돈이 없어 그러니 핸드폰을 이제 곧 닫고 내가 계속 통화를 했던 집 번호, 그 번호를 알려줘요, 내가 다시 금방 전화하겠으니깐,"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요?" 다시 설명하려고 하는데 광용의 다음 말이 내 입을 막았다. "친구가 죽었어요" "뭐?" "당신 친구가 죽었다구요" "무슨 말이야! 똑바로 설명해 이 자식아!" 고함치는 내 입도, 들고 있는 수화기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정해요. 일단 진정하고 듣기만해요, 창용아저씨가 공안에 갔을 땐 친구 사진만 보여주더래요, 모른다고 하니깐 그냥 협박만 하다가 돌려보내더래요. 근데 어제 친구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한데서 전화가 왔었어요. 친구가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 연길에 왔을 때 내가 말했잖아요, 친구 작은 삼촌을 찾았다고, 그때 내 전화번호를 주었었는데 어제 밤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나갔더니 조카가 죽었다는거예요,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막 울어요. 공안에 붙잡혀 가던 도중 오줌 싸게 해달라고 차를 세워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대요." 나는 그 뒤의 광용이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죽었다. 그 말은 내 친구와 이어질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 그냥 서있기만 했다. 설사 친구의 삼촌이 한 말이라도 절대 가능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친구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틀리는 말 일거야, 아니 오해일거야,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오열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스스로 타이르며 걸었다. 그러다 걸음을 뚝 멈춘 그 자리서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친구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사주지 않았던 술 생각이 나서였다. 잠시나마 한국행을 포기할지라도, 그래서 잠시나마 함께 나약해질지라도 그때 술 한 병 사서 먹었을 걸, 그러면 오히려 더 분발했을 걸,,,공안과 북한 보위부의 끈질긴 추격에 피가 타는 삶의 순간을 단 한 번 적셔보려 했을 뿐인데도 그 소원마저 이르지 못한 친구의 곡절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더 안타까웠던 것은 나에겐 돈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위안으로나마 친구의 마지막을 기원하고 두 손 모아 빌어 줄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나는 자주 지인들에게 그 친구와 탈북과정을 이야기해주군 했다. 그러면 한결같이 글로 남기라고 했다. 하지만 탈북 후 5년 동안 친구의 마지막 운명을 부정하고 살았던 나였다. 혹시 글로 옮기면 지금도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친구의 탈북을 방해할 것만 같은 미련 때문이었다. 내가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2달 반을 머무르고 있던 마지막 날들에도 내 얼굴을 알아본 청진과 무산에서 온 탈북자가 6명이나 되었다. 그때도 그들은 광용의 말과는 다르게 친구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가 탈북 후 뒤늦은 조치인지 평성과 청진 등 전국 곳곳에 친구와 내 수배사진이 걸렸었다고 했다. 평양시 중앙기관 사람들의 탈북인데다 친구 가문이 워낙 유명하여 사람들 속에서 소문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동인민반 회의에서 "배신자의 말로"라는 강연을 했는데 그 사례들 중 우리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6명도 이 수기를 보고 있다면 영사관에서 친구의 죽음을 결단코 부정하던 고집스런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있는 평양에서 온 고위탈북자가 친구의 자살을 확인해주었고, 그 날부터 나는 매일매일 이 수기를 쓰게 되었다. 이 저녁에도 나는 친구가 마지막을 결심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질고 착한 그가 어떻게 몸이 부서지는 그 벼랑 밑으로 뛰어내릴 용단을 했을까. 하고 눈물 흘리게 된다. 북한은 중국 공안에 그를 살인자라고 신고했다. 남을 살해한 도피자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자유의 선택을 살인으로 규정한 김정일 독재가 살해했고. 북한의 악법인 3대멸족이 살해했다. 내 친구는 이렇게 나이 30에 죽었다. 창용아저씨가 비밀로 해달라던 그 700달러를 가슴에 품은 채, 대한민국에 오지 못한 한을 심장에 묻은 채 말이다. 10. 뜬 눈으로 날을 밝힌 후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는 공안이 무섭지 않았다. 설사 잡힌다 해도 친구와 똑같은 선택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때의 충격은 나에게 삶이란 매 순간이 기적이고 생명의 도전임을 느끼게 했다. 북경으로 가자! 나는 일어섰다. 자살했다는 광용의 말은 친구가 그렇듯 자살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처지이리라. 내가 빨리 가야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그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광용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렇게 가는 길이 곧 친구의 한을 갚는 복수가 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북경으로 가는 차비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쥐고 고민했다. 도둑질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요일을 기다려 서탑교회 앞에서 동냥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나는 이 수기를 쓰는 기회에 심양 서탑의 경회루 사장님께 사죄를 하고 싶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 분께 사기를 쳤다. 구차한 변명이겠지만 그때 나의 처지에선 한글 간판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경회루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사장 좀 불러주세요" 나는 구걸이 아니라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사장을 찾았다. 잠시 후 나타난 40대 중반의 남성은 세무조사라도 나 온 중국 공무원 같은 내 폼을 살피더니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차 두잔!" 직원이 차를 놓고 가기를 기다렸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전 북한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다시 소리쳤다. "여기 밥 가져와!" 나는 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요리 냄새에 창자가 끓었지만 그 말에 발끈하는 척했다. "나는 밥 먹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 드릴게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사장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이번에도 역시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밥 취소! 가져오지 마!" 나는 순간 오늘 굶겠구나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혹시 000기업을 아십니까?" "그 기업이라면 우리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근데 무슨 일로?" "그럼 그 회사 000회장님도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알겠소. 도체 뭘 물어 보려고?" 나는 그 회장의 프로필을 알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의 유명기업들을 대북사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통전부가 작성했던 CFO들의 개인 자료들을 열람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통전부의 그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탈북자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알 수 없을 만큼 000기업 회장의 친인척관계와 알려지지 않은 약간의 가족갈등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끝으로 중국 한인회 회장과 안면 정도는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그 분 조카입니다." 사장은 차를 마시다 힐끔 쳐다보았다. "큰 아버지가 지금 미국 갔는데 저의 탈북을 알고 모레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나는 친구가 북경에서 기다리는 관계로 더 못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단순히 동냥이나 하러 왔으면 그 이상 요구했겠지만 난 지금 차비만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꼭 갚겠습니다. 그 이상으로" 아마 경회루 사장님은 속으로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대단한 사기꾼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몰랐던 000기업 회장의 흥미진진한 직계 일화까지 주어 섬기는 것을 보고 정말 조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경회루 사장님은 북경까지 250원 정도 소요될 것이라며 선뜻 내주셨다. 아직까지 중국에 가지 못한 이유로 나는 그 분께 빚을 졌다. 훗날 심양에 가면 꼭 사장님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 싶다. 내 믿음으로는 웃으며 이해해주실 그런 분이시다. 나는 그렇게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터미널 근처에서 한국의 대표언론사의 신문을 샀다. 남이 보면 한국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북경으로 가면 어떻게 대사관이나 영사관으로 들어갈지 고민해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심양도 서탑을 벗어나면 힘든데 북경은 더 할 것이다. 아니 북경도 서탑처럼 한국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 쪽부터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하며 신문을 펼쳤다. 가보고 싶은 한국이어서 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게 됐다. 그런데 한 장 두 장 펼치던 나의 눈에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한 쪽 작은 구석에 그 신문사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을 모으기 위해 눈을 감았다. 북한 노동신문 같은 경우 중국 주재 특파기자 세 명 중 두 명은 단순히 기자가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와 국가보위부의 스파이다. 한국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특파기자의 업무 특성상 한국 국정원과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바로 이 것이다! 특파기자를 찾자! 나는 무릎을 쳤다. 버스에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았다. 신문에 적혀있는 번호를 돌리는 동안 한국 영사관처럼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두근거렸다. "여보세요" 아가씨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저는 북한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다 며칠 전에 탈출한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행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 신문사에 특종을 제보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잠시만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나보다 더 다급해보였다.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자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전화를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쫒기는 몸입니다. 그러니 당신네 신문사 북경 주재 특파기자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도청 될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그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네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가 알려준 번호를 즉석에서 다시 돌렸다. 훗날 특파기자는 나와 만난 자리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탈북자가 전화 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 쪽 본사는 왜 그 정도로 멍청하냐고 웃으며 농담했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전화번호가 운명적인 행운이었다. "여보세요" 특파기자 핸드폰은 세 번째 시도 끝에야 연결됐다. 나는 그 동안에 내가 한국 영사관과 통화할 때 어떤 점이 실책이었는가를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단순히 탈북자의 한국행 소원보다도 내가 누구이고, 어떤 정보가 있으며, 그래서 한국에 어떻게 필요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상대방에게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단 한번 주어진 통화 기회에! 가장 분명하게! "저는 통전부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이 말로부터 시작한 나는 논리정연하게 탈북동기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현 처지를 이야기했다. 마지막엔 국정원과 연결시켜줄 것을 희망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그 분은 오랜 특파기자 경험이 있는지 아주 냉철했다. "제가 국정원을 모르죠, 알 수도 없죠. 하지만 내가 아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보겠으니 십분 후에 다시 전화 걸어보십시오" 나는 정확히 십분 후에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번호를 알려주며 지금 그 분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면서도 혹시 날 피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차마 전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알려준 다른 번호는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 바쁘게 반색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북한에서..."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서둘러 막으며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들이 날 놀라게 했다. 그는 내가 친구와 함께 언제 탈북했으며 살인자로 수배되고 있다는 것, 공안은 물론 중국 국가안전국에서도 쫒고 있다는 것과 북한 대사관으로 어제 북한 국가보위부가 나왔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지금 친구랑 같이 있지요?" 친구와 헤어졌다는 나의 대답에 침묵을 지키던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 신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신분증이 있지요?" "네, 그건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갖고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당신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는 훗날 찾기로 하고, 그러니 그 자리에서 절대 떠나지 마세요. 우리가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그 다음 과정부터는 나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내가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마운 손길들의 보호로 안정을 보장 받은 그 나날에도 나는 폭풍의 공포에서 고요의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던 중국 국가안전국의 추격과 나를 체포하기 위해 별도로 북경까지 파견된 국가보위부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탈북 전 업무 차로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 들렸던 평양출신 한 고위 탈북자는 내 사진을 들고 온 국가보위부 사람들과 대화 한 적도 있었다. 그 자리서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한 놈은 잡았으니 나만 무조건 잡아 들어가면 된다고 했고, 북한 대사는 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떻게 찾냐고 푸념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에 호혜일이란 이름으로"북한요지경"책을 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전해주던 그 끔찍한 말들이 서울 생활 5년 동안 꿈에서 자꾸 들리기도 했다. 나는 북경 주재 영사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혹시나 이 차가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 후 양 옆에 바투 붙어 앉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장선생님, 이젠 웃으세요, 머리를 들고 저기를 보세요, 태극기예요. 대한민국 국기예요"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정말 파란 하늘을 뚫고 일어 선 하얀 태극기가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울음부터 쏟아져 나왔다. 진정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가 참아야 될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이 참아주고 다독여 주어야 할 나였다. 내가 믿어지지 않아서 울었고 함께 못 온 친구 얼굴이 떠올라서 또 울었다. 그때 천만마디 말로도 다 표현 못할 나의 격정을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담았다. 태극기를 보았을 때, 그 깃발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 땅을 보지도 못했지만, 자유와 민주도 몰랐지만 그 밑에 온 몸이 무너져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11. 탈북스토리 연재 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 엄청난 고생과 위험을 겪었을지 몰랐다며 어떤 분은 통화 과정에 울기도 하셨다. 그 분들에게 나는 2만 명의 탈북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씀 드렸다. 아니 어쩌면 난 남들에 비해 덜 고생하며 탈북한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부터 갖고 나온 달러에 기댈 수라도 있었고, 창용아저씨, 신광용씨, 왕초린과 같은 평생 못 잊을 은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굶주림이란 거지처럼 거리에서 동냥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월의 산 속에서 추위에 떤 날도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사관에 들어갈 때까지 중국 땅에서의 방황도 남들처럼 수년세월이 아니라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산속에서 몇 년을 토굴생활 하다가 온 탈북자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살아 온 그 기막힌 운명들을 글로 옮겼다면 아마 나의 탈출기는 배낭여행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곡절 많은 탈북여정을 어떻게 다 그려낼 수 있겠는가. 탈북자동지회 홍순경회장님은 태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실려 가는 과정에 불행 중 다행의 차사고로 현지경찰에 망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 국장은 쇠고랑을 찬 채로 달리는 북한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유의 소원을 두 손에 꼭 모아 쥐고 무릎걸음으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기어서 넘었다. 우리의 탈북은 한 목숨만으로도 부족한 것이기도 하였다. 탈북자구출센터 백명학 소장은 세 번이나 북송됐다 세 번 탈출하여 대한민국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조선일보 강철환기자는 노예 같은 북한공민의 권리조차 없었기에 인권을 찾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다. 이렇게 온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탈북자라고 한다. 그러나 탈북자란 그 이름마저 갖지 못한 채 이국땅을 방황하다 숨진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메콩강의 급류 속에서 튜브 하나에 가족의 운명을 실었다가 아이만 살려 보낸 한 부부의 비극도 있고, 영사관 진입 도중 공안들이 달려들어 눈앞에서 생이별한 눈물의 母女(모녀)도 있다. 탈북! 그 말은 이렇듯 북한체제의 탈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할 때 이미 생명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목숨의 탈출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인류가 말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이 가슴에 응축되어 피멍든 그들, 각자마다 최소한 이별의 아픔이라도 부여안고 모대기는 그들이 바로 우리 2만 명의 탈북자들이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르짖고 싶다. 당신들에겐 그냥 태어난 대한민국이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겐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정녕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에게 엎드려 큰 절을 드리고 싶다. 내 조국 반쪽이라도 이렇듯 자유의 땅! 민주의 땅! 선진화의 땅으로 만들어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도 사람의 것이라고 기어이 살아서 가리라! 외치며 사생결단 찾아 올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대한민국 흙 한줌도 보듬고 싶을 만큼 이 땅이 고마워서 울고, 그래서 북한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 때문에 또 운다. 이별은 떠나는 마음보다 보내는 마음이 더 아프다 했지만 살아도 삶이 없던 그 땅에선 이별의 권리마저 없었기에 그 아픔마저 주지 못한 나는 이별의 죄인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우리 탈북자들 모두가 아직도 탈북하지 못한 가슴 반쪽을 부여잡고 좋은 음식이면 좋은 음식에 목이 메어 울고, 설날이면 또 가는 한 세월에 울고 있다. 분단의 철책선이 땅에만 아니라 그렇듯 생살까지 찢으며 가로 지른 그 수난자들이 바로 우리 탈북자들이다. 이 수기를 쓰는 며칠 동안에도 나는 5년 동안 겨우 잠재웠던 악몽에 또 다시 시달려야 했다. 두만강을 넘다가 총에 맞기도 했고, 창용아저씨 장모집 옆 빈농가에 숨어있다 불쑥 나타났던 공안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친구가 공안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날 살리려고 벼랑에서 뛰어내린 꿈을 꾼 날에는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북한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만큼 기억만으로도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악몽만으로도 숨 가쁜 생사에 가슴조려야 하는 탈북자가 어디 나뿐이랴. 그렇다. 우리 탈북자들은 결코 북한체제를 탈출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탈북은 땅에 묻은 사람들의 복수였으며 독재 권력과 인간과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살아서 온 인간의 승리였다. 나는 이 수기를 마치며 소원하건대 심양의 왕초린을 찾고 싶다.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쯤 대상, 아니 남편이 되었을 그 친구와 결혼도 하고 어느덧 애들도 가졌을 것이다. 어느 날 불쑥 연락이 와서 친구처럼, 아니 친척처럼 소식을 주고받고 내왕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공상을 해 본다. 영사관에 들어가면 신광용에게 전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초린이에게 내 소식도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의 보호를 위해 허락해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졸라 마침내 나대신 다른 분이 연락을 넣어 봤지만 그때 신광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에 주민등록증을 받아 대한민국 국민이 된 날 창용아저씨를 통해 바뀐 광용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광용은 초린이 삼촌 집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현재 광용은 탈북자인 청진여자와 함께 노원구에서 살고 있다. 예쁜 엄마를 닮은 아들도 있다. 창용아저씨는 우리가 준 700달러로 견인기 대신 소 한 마리와 가전제품을 샀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니 조선족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솔직히 그들이 없다면 오늘날 2만 명의 탈북자도 없다고 본다. 비록 사회주의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민족적 동정심과 인간의 양심으로 김정일 정권에 침을 뱉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탈북자들에겐 숨어있을 은신처와 얻어먹을 만두가 있고 탈출의 방법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정일은 민족의 포위망에 든 셈이다. 분단의 38선 너머에는 자유민주주의 국민이 있고 내부에는 주민들의 분노가 있다. 북쪽에는 김정일을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는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탈출을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에선 소수민족일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는 민족과 영토의 유구한 역사와 그 가치의 대를 잇고 증명하는 大민족이라고 본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탈북자들이 그들에게 감사하고 단체 차원에서 연대활동도 벌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더 많은 탈북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하고 그들이 우리의 예의와 도리에 감동하여 탈북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조선족 사람들이 親한정서를 가질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여 김정일 정권을 더욱 고립시켜야 한다. 또 그것이 북한체제 붕괴에 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통일의 위업이라고 본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는 이 수기를 볼 북한 통전부 친구들에게 나의 오늘을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밥 한 줌에 생명을 느끼고 산 속에서 추위에 떨며 날을 새던 도피자가 더는 아니다. 못 알아들을 중국말에 멸시받고, 개처럼 쫓기고 밥 한줌 값도 안 되는 동전을 소원하던 김정일정권의 주민이 아니다. 나는 현재 국책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한다. 대학 강의도 나가고 내 손으로 쓴 책“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와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를 누구의 간섭이 없이 출판할 수도 있었다. 한 달 전엔 서울 친구들도 부러워 할 새 아파트도 가졌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고마운 어르신들의 존함을 여기에 적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듯 충성으로 바치는 삶이 아니라 성취로 가지는 삶을 살고 있으며 민주적인 선거권으로 대통령을 결정할 수도 있다.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하고 내 삶이 이렇듯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처음 느꼈다. 김정일은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다. 그 불가능이란 정권도 총에서 나온다고 말할 줄 아는 독재자의 파렴치하고도 타락한 가능이다. 그러나 나에겐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이미 저 북한에서, 그리고 한국으로 찾아오는 험난한 길에서 극도의 공포도 체험해 보았고, 외로워 보았고, 슬퍼 보았고,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도 느꼈다. 나에겐 이젠 더 이상의 아픔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또 어려운 일에 부닥칠지라도 지금껏 겪었던 그 모든 좌절과 비극에 절대 비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백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용기가 혈맥에 가득 차 넘친다. 대한민국에서 나에겐 행복할 권리와 성공의 의무만 있으며 또 그것을 위해 열심히 살 앞날만 남았다. 그 모든 것을 바칠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 새 가정도 예쁘게 만들기도 하리라. 이것이 바로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는 독재자 김정일과 전혀 다른 나의 무궁무진한 인간의 가능이다. 그동안 저의 글을 보아주신 여러분께, 그리고 저의 탈북스토리를 특별히 배너로 만들어 소개해준 뉴데일리, 조갑제닷컴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09년 11월 장진성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은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애와 팔고 있는 모성(母性)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백원을 쥐어주자 그 돈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던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백 원으로 밀가루 빵 사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
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 고앵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