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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일본의 위안부
게시물ID : freeboard_6169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ustGear
추천 : 1
조회수 : 45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8/29 02:00:59

히메유리 학도대

ひめゆり学徒隊(ひめゆりがくとたい)

히메유리 학도대는 1944년 12월, 오키나와현에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간호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여자학도대 중,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의 교사, 학생으로 구성된 부대의 이름. 통칭 히메유리 부대라고 불렸다. 제 1고등여학교의 교지명이 '오토히메(乙姫)', 오키나와 여자사범학교의 교지명이 '시로유리(白百合)'였고, 이 둘의 이름을 합쳐서 '히메유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목전에 둔 1945년 3월 23일, 양 학교의 여학생 222명과 인솔교사 18명 총합 240명이 학도대로서 오키나와 육군 병원에서 간호요원으로서 복무하게 되었다. 당시 징집된 여학생들은 졸업이 2일 남은 학생들로, 일본정부에서는 강제징집이 아닌 자원이라고 발표하고 있으나, 생존자 인터뷰에선 강제 징집과 마찬가지였다 회상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도 10여 명은 오키나와 주둔 제32군 사령부 소속 장교들을 위한 전속 타이피스트-성적 위안부로 차출되었다. 그나마 이들은 5월말 32군 사령부가 키얀반도로 철수하기 직전에 사령부 동굴에서 동원해제되어 귀가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6월 18일, 미군에 포위당한 히메유리 학도대에 군부로부터 돌연 해체명령이 내려져 전쟁터에 내버려지게 되었다. 다음날 6월 19일부터 히메유리 학도대는 약 일주일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지하 참호로부터 나오다, 혹은 나온 이후에 폭격 내지는 자살 종용으로 인해 사망한다. 최종적으로는 교사 학생 240명중 136명 사망.

부대 해체 명령후, 일 군부의 강압으로 공식적으로 10명은 아라사키 해안에서 집단 자결을 명받아 자결하였으며, 또한 한 동굴에서 미군의 사격으로 3명의 사망,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 내에서는 극우세력이 이들을 전쟁의 희생양인양 미화시키고 있으나, 실상은 류큐 왕국부터 내려오는 본토의 오키나와 차별과 더불어 오키나와의 인간방패 작전 등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히메유리 학도대 또한 많은 차별과 강압적으로 운영되어왔다. 이들 또한 일본군의 희생자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이들을 기리기 위한 히메유리의 탑이 건립되었으며, 이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The Boom의 리더이자 보컬이었던 미야자와 카즈후미는 오키나와를 여행하던 중 한 '히메유리 학도대'의 생존자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시마우타(섬노래)를 작곡하게 되었다. 다음은 미야자와의 인터뷰 내용.

"오키나와 전쟁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집단자결과 히메유리 학도대 같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 무지에 대한 분노와 당시 군사하의 교육에 대한 의문 같은 것에 화가 나서, 지하에 남겨진 그들의 혼을 하늘로 해방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쿄에서 시마우타를 만들었다."
cc by-nc-sa 2.0 kr


출처는 엔하위키.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서 자유게시판에 올려 봅니다.


우연히 찾은 건데.... 할말이 없네요...

설마 자기네 국민들까지 위안부로 동원하다니...

그런데 강제 점령한 식민지 여성들은 내버려 두는게 이상하지...

진짜... 개만도 못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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