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재산. 함경북도 온성군의 해발 239m 산이다. 북한은 이곳을 혁명의 성지로 꼽는다. 국가정보원은 지난해 7월 ‘왕재산’을, 인천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공산혁명 지하조직의 이름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1년 넘게 인천지역 각계 인사, 시민사회단체 간부, 교사들을 수사해왔다. 그러나 올해 1심 법원은 왕재산이란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혐의에 무죄 판단을 내렸다. 공공의 안녕과 질서란 명분 아래 인천지역에서 벌어져온 ‘신공안몰이’와 이로 인한 시민사회단체의 생채기를 들여다봤다.‘왕재산 간첩단사건’뒤 무차별 조사 100여명 소환·200여명 계좌추적 독거노인 도시락 후원계좌까지 봐
조사받은 이들 심한 스트레스장애 진보인사들 활동 위축…후원도 줄어 시민단체 “진보진영 죽이기 노림수”
국정원 “적법한 공무, 문제없다”국가정보원이 지난해 7월 적발했다고 발표한 이른바 ‘왕재산 간첩단 사건’ 이후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국정원의 수사에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113명에 이르는 각계 인사들에 대한 소환 수사, 200명 넘는 이들의 금융계좌 거래내역 들춰보기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국정원 조사에 응하거나 소환 통보에 출석을 거부한 이들, 집을 압수수색을 당한 이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며칠 전 집사람에게 ‘국정원이 찍혀 있는 서류가 배달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놀라 확인해보니 국정원이 내 농협 계좌를 열어봤다는 통보서였다. 이 계좌는 주 3회 홀몸노인들에게 배달되는 도시락 후원금 통장이다. ‘간첩 잡는 국정원’이 노인 밑반찬 대주는 계좌를 까 본 것이다.”지난 7일 오전 인천 남동구 국정원 인천지부 정문 앞에서 만난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이하 인천연대) 계양지부 사무국장 조현재(40)씨는 굳게 닫힌 철문 앞에서 ‘어이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이곳에 모인 시민단체 회원 50여명은 “국정원이 지난 4월17일을 전후해 인천연대와 회원, 후원회원 등의 은행 계좌를 무차별적으로 들여다봤다. 후원금을 낸 시민들이 사찰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국정원이 들여다본 금융계좌는 200개를 넘는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국회 정보위원회 김현 민주통합당 의원은 “국정원 예산 심의 과정에서 왕재산 사건 이후 국정원이 열람한 인천 시민 등의 금융계좌는 216개로 확인됐다”고 <한겨레>에 밝혔다. 김 의원은 “무차별 계좌추적이다. 인천지역의 공안사건 수사가 도를 넘고 있다. 현 정부의 민간인 사찰 문제와 연계해 짚겠다”고 말했다.
■ 국정원 수사에 심한 후유증 국정원에서 한번이라도 조사받거나 소환 통지를 받은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인천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이아무개(70) 원장은 지난해 10월 ‘왕재산 사건 관련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소환 통보를 받았다. 그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답했다고 했다. 왕재산을 사람 이름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박에 못 이겨 6시간쯤 조사를 받았다. 공포였다. 그는 “군사독재가 재현되는가 싶어 맡고 있던 통일운동단체 대표는 물론 병원 운영도 접을까 고민했다”고 심경을 전했다.김성복(56) 샘터교회 목사도 그 무렵 소환 압박에 시달리다 4시간가량 국정원 조사를 받았다. 그는 “변호사도 함께 가 조사받았는데도 떨리는 맘을 추스르지 못해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낼 뻔했다”고 말했다. 인천지역 중견 작가인 성아무개(54)씨도 지난해 10월 ‘안 나오면 귀찮을 것’이라는 국정권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2주 동안 날마다 전화를 받았지만 버텼다. 그러나 지금도 묵직한 덩어리가 가슴에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당시 국정원에 출석했던 인천의 구청장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또다른 구청장은 “조사받은 뒤 주변에서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는지는 상상도 못할 것”이라며 기억조차 꺼렸다. ‘공안탄압 분쇄 소위 왕재산 조작사건 인천대책준비위원회’는 “왕재산 사건 발표 이후 3개월여 동안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종교인, 현직 구청장, 노조 간부와 정당 등 진보·개혁 성향 인사 113명이 국정원의 소환을 받았다. 이들 상당수가 공포심에 사로잡혀 활동을 자제하는 등 위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한겨레>가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의 ‘소위 왕재산 사건 관련자 인권피해 실태조사 분석자료’를 입수해 분석했더니, 국정원 조사를 받은 70%가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보였고 이 가운데 15%는 ‘위험 가능군’으로 분류했다. 사건 당사자와 가족, 참고인 등 20명을 연구한 결과다. 1970~80년대 고문 피해자 76.5%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었다는 조사 결과와 비슷하다.■ 무차별적인 압수수색 올해 1월18일 오전 8시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 소속 초등 교사 ㅊ씨 집에 남성 10여명이 들이닥쳤다. 집 안을 이 잡듯이 뒤졌다. 이들은 ㅊ씨에게 ‘입회’를 요구했다. ㅊ씨는 48시간 동안 압수수색을 지켜봐야 했다. 감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내는 병원으로 실려갔고, 충격을 받은 사춘기 딸은 친구 집으로 피했다. 같은 날 다른 교사 ㄱ씨의 처지도 비슷했다. 그는 “영문도 모르는 100쪽 분량의 영장을 들이대고,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7년치 전자우편 내용까지 압수당했다.지난 2월8일 오전 8시30분께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인천지부 간부 유아무개씨 집도 ‘불청객들’이 문을 열게 했다. 이들은 ‘왕재산’을 들먹이며 영장을 들이댔다. 유씨의 부인 김아무개씨는 “여고 시절 일기장까지 빼앗겼다 항의해 돌려받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김씨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 때 통일부 허가를 받아 조전을 보낸 적이 있는데, 수색 영장에는 ‘일본을 통해 몰래 조전을 보냈다’고 적혀 있어 따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압수수색을 받은 이들은 당시 처지를 ‘전쟁터 포로’에 빗댔다. 국정원 직원들의 ‘꼼짝마’ 지시에 따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인신 구속과 다름없는 일이 벌어지고, 영장 혐의에 과장되거나 거짓된 내용이 들어 있어도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이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채희준 변호사는 “대상자를 강제로 입회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감금이다. 거꾸로 대상자가 압수수색에 참여할 권리는 무시당하는 게 큰일이다”라고 말했다. 압수수색 입회는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법원이 과장되거나 허위 내용이 있는 영장을 내줘 인권 침해가 버젓이 벌어진다. 또 수사기관은 영장 청구 사유와 무관한 것까지 가져가 다른 혐의와 엮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공안당국, 인천에서 뭘 노리나 송준호 ‘6·15 공동선언 실천 인천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강한 연대를 유지하는 인천지역 개혁·진보진영의 고리를 끊으려고 치밀하게 벌이는 국정원의 공작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50여개 단체가 꾸린 6·15 공동선언 실천 인천본부는 요즘 명맥을 잇기가 어렵다. 왕재산 사건 뒤 종교단체는 물론 노동단체나 진보적 인사들도 활동을 꺼린다. 후원 등도 끊기기 시작했다. 이광호 인천연대 사무처장은 “인천지역 진보·개혁 성향인 단체는 60여개, 회원은 1만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국정원 수사로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김미형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직2국장은 “국정원 직원한테서 ‘왕재산 한 건이면 3년은 먹고산다’는 말까지 들었다. 실체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겁주기 수사’로 보인다”고 말했다.발표 당시 200명의 조직원이 있다고 했던 왕재산 사건은, 현재 5명만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1심에서 왕재산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국정원 대변인실은 “인천지역의 공안 관련 수사는 통상적이고 합법적인 수사였고 금융계좌 추적 등 모든 압수수색은 법원의 영장에 의해 집행된 적법한 공무여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만 밝혔다.인천/김기성 김영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