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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한테 감사패 주러 갔다왔다.
게시물ID : sisa_3466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매로
추천 : 4/3
조회수 : 455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3/01/12 00:18:14



안녕? 횽아는 그냥 갤러야. 눈팅족, 내 나이가 사십이 넘었고 박근혜 지지자였지. 이번에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보니 감회도 새롭고 가슴도 뭉클하더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신을 보고 자란 세대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고, 박 전 대통령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그저 내용도 잘 모르고 박 전 대통령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난 유신 옹호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어렸을 때는 국민들이 똘똘 뭉쳐 잘 살아보자는 사명감, 희망감이 있었어. 그리고 실제로도 해를 넘기면 넘길 수록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자랐다.

난 왕십리 토박이야. 3대가 이곳에서 살았어. 나 어렸을 때 여긴 정말 촌동네였지. 그러던게 지금은 높은 건물이 들어서고 정말 많은 발전을 했어. 이 모든 것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고, 경제 5개년 계획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박 전 대통령의 숨겨졌던 땀 방울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대선을 다시 생각해보니까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많은 공헌을 했던 통합진보당의 이정희가 떠오르더라. 그 여자도 분명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궈놓은 경제발전의 녹을 먹고 자라왔을 거야. DJ가 보리밭을 심을지언정 절대로 만들 수 없다며 드러누웠던 경부고속도로도 이정희는 선거유세 한다며 많이도 왔다갔다 했겠지.

이정희가 TV 토론에서 했던 말이 생각나네... 뿌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라고 했지.그거 맞는 말이다. 호랑이는 개새끼를 낳지 않는 법이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그 분의 언행을 보고 배우며 자란 박근혜는 잘 할 거라 믿는다. 

선거 마치고 보니 이런 고마움을 꼭 이정희에게도 표현하고 싶더라.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말야. 그래서 상패도 특별히 크리스탈로 제작하고 약소하지만 성의의 표시로나마 봉투에다 돈도 좀 담았어. 통진당이 이번에 가지고 간 국고보조금이 27억원이라더만. 나는 그런 큰 돈이 있을 턱은 없고 그냥 측근들과 식사나 하라고 국고보조금의 0.001% 밖에는 되지 않는 소소함 금액이지만 27만원 넣었다. 측근들과 식사를 하던가 아니면 이정희 비서관들이 경선부정을 저질러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분들에게 추운 겨울에 내의라도 한 벌씩 사입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어때? 나 착하지? 돈지랄 한 거 아니지?


디시 정사갤 펌














새마을운동


이 운동은 1971년 새마을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1973년 1월 16일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정부는 1980년대 초반까지 시멘트와 철근 등 총 비용의 절반 가량을 투자하여 지원하였다.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원, 72년 33억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1974년 308억원, 1979년에는 4252억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원에서 1979년 2032억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


위키백과 펌













지금 40대면 40년 전 아무리 많이 잡아도 9살....

박정희 총맞을때 아무리 많이 잡아도 16살 꼬맹이...































이해함... 그땐 너무 어려서 새마을운동만 기억에 있는 거라고 봄...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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