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가 대화를 하고서 권근(權近)이 학식이 있는 것을 알고는, 제목을 명하여 시 24편(篇)을 짓게 하였다. 권근이 명에 응하여 지었는데...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제목에 대하여,
“듣자하니 머나먼 그 옛날, 단군(檀君)이 단목(박달나무)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가 요임금의 시절. 몇대를 전해왔는지, 햇수는 천년을 지났다 하오.”
라 지었다.
(주:권근(權近)이 중국에 황제를 찾아가 만났는데 황제가 권근에게 24개의 제목을 주고 시를 짓게 하였다. 그중 하나가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라는 제목이었는데 그 뜻은 '태초에 동이(東夷) 즉 배달민족이 문명을 처음 열었다' 이다. 중국 황제가 이러한 제목을 권근에게 주었다는 자체도 놀라운 일이다.)
[태종 7년]
평양 부윤 윤목이 보고서를 올렸는데
“평양(平壤)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 지방(西北地方)의 본영(本營)이 되었고..."
[태종 12년]
하윤(河崙)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朝鮮)의 단군(檀君)을 나라에서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廟]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 16년 -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내야 한다는 경승부윤 변계량의 상서문]
(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낼수 있다는 중국의 압력으로
태종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포기하려 하자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변계량(卞季良)이 주장한 글)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천제) 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하늘에 제사지냄을) 폐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하늘에서 내려왔고, 중국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요임금 때 일이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태조 대왕(太祖大王 - 이성계)이 또한 이를 ( 단군(檀君)의 전통을) 따라 엄숙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임금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제천문(祭天文 - 하늘에 제사지내는 글)을 짓게 하고
...변계량이 지어서 바친 글이 뜻에 맞으니, 상을 주었다.
[세종 7년
단군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제사하게 하다]
(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기자 사당(箕子祠堂)에 함께 모셔졌던 단군(檀君) 신위를,
따로 모셔야 한다는 상소)
사온서주부 정척(鄭陟)이 글을 올리기를,
“단군은 당(唐)나라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남쪽을 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합당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9년]
(임금이) 지시하기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묘에 관한 제도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의 묘를 세워 제사지내는 일을
모두 옛 제도를 살펴서 상세하게 정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세종 9년]
변계량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음(陰)과 양(陽)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단군(檀君)과 삼국(三國)의 시조도 함께 한 단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옳습니다.”
[세종 10년]
우의정이었던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저의 본향(本鄕)입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이 산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 - 성스러운 사당이 있는 마을)라고 일컫습니다.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세종 11년에 사당을 (기자와 따로) 세우고 고구려 시조(始祖) 동명왕(東明王)을 같은 사당에 모셨는데, 봄·가을마다 (임금이) 향과 축문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동명왕 묘가 평양부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세조 1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 - 마을이 만개 있는 나라, 또는 넓이가 만리 (약 4천 키로미터)되는 나라) 라 불렸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한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중국과)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중국과)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독자적인 나라 였으며...
우리 나라는... 수나라·당나라의 창성(昌盛)함으로도 신하로 삼지 못하였으며, 요(遼)나라는 우리를 이웃나라의 예의로 대하였고, 금(金)나라는 우리를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송(宋)나라는 우리를 손님의 예절로 대하였고..."
[세조 2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 묘향산(妙香山)은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조선 단군 신주(朝鮮檀君神主)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東明王之位)로 고쳐 정하였다.
[세조 6년]
임금이 절하는 자리를 조선 시조(朝鮮始祖) 단군(檀君)과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동명왕(東明王)의 신위(神位)의 사이에 설치하고...
임금이 친히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묻기를, “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강하였다.” 하였다.
[세조 12년]
대사헌 양성지가 상서(上書)하기를,
"우리 나라의 역사기록은 단군(檀君)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沮? 많이 있으니, 요(遼)·금(金)·서하(西夏)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세조 13년]
대사헌 양성지가 상서(上書)하기를,
" 중국(中國)은 요임금 시대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무릇 23번 나라가 바뀌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겨우 7번 바뀌었습니다."
[성종 3년]
황해도 관찰사 이예(李芮)가 보고하기를
“단군(檀君)께서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당은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삼성당의 제사 그릇은 옛날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기우제 지내는 제단이 삼성당(三聖堂) 아래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의 옛 유적을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하였습니다."
[성종 19년]
원접사 허종이 중국 사신에게 베푼 일을 보고하다.
" 중국 사신 대표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단군묘(檀君廟)입니다.’ 대답 하니... 중국 사신 대표가 말하기를, ‘(단군에 대하여) 나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고, 사당에 들어가 절했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이 분은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선조 30년]
예조가 아뢰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면 ‘삼성사 역시 문화현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바로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사당이다. 봄·가을로 임금이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하는데, 홍수,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응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효종 7년]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글을 올리기를, "단군(檀君)은 동방에서 맨 먼저 출현했던 임금입니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중국의 요(堯)임금과 함께 왕위에 올라 태백산(太白山)으로 내려와 철옹(鐵甕)에 도읍을 정했다가 패수(浿水) 가로 옮겨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었는데 인문(人文)을 밝게 편 기초가 여기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현종 1년]
윤강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해서(海西) 삼성묘(三聖廟)의 단군(檀君)·환인(桓因)·환웅(桓雄)의 묘를 수리하는 일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그런데 예관이 와서 제사를 지내어 제사의 격을 높였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조의 낭관을 보내 일을 하게 하라.”
[숙종 3년]
우의정 허목(許穆)이 글을 올리기를,
"동방(東方) 역사책 22가지를 지었습니다. 대개 동방 구역(九域)은 상고(上古 - 태초.아주 오래전.) 때부터 임금을 두고 나라를 세워 중국 바깥의 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단군(檀君)은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숙종 5년]
정유악이 아뢰기를,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기자의 사당 옆에 있어, 세종(世宗) 때부터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도 전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숙종 21/06/06]
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 하였다.
[숙종 23년]
이인엽이 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의 [단군] 관련기록 - 두번째- |작성자 태을주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