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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에 간 전라도에 대한 오해란 글의 오해
게시물ID : sisa_2242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얘의의지
추천 : 3
조회수 : 50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9/05 19:37:01

베오베에 전라도에 대한 오해란 글이 있어서 읽어봤는데

이건 오해를 풀자고 쓴 글인지 오해를 더욱 고착시키려고 쓴 글인지 헷갈리게 만들더군요.
사료와 역사라는 것은 참 설득력 있는 논거입니다만 
동시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편집되어 왜곡과 조작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옆나라 일본이 하는 짓을 보세요.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역사의 편집 발췌 왜곡을 통한 역사 조작의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특정 부류에 의해 벌어지고 있지요.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106/h2011060614515386330.htm&ver=v002


기사 본문 중


"이영훈 교수는 '한국 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논문에서 갈등의 악성 구조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고찰한다. 악성 구조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호남 지역에 대한 지역감정의 경우, 60년대 이후 특정 지역 출신의 정치 세력이 장기간 집권하는 과정에서 생겼다기보다 고려ㆍ조선왕조의 1,000년에 걸친 지역 차별 정책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아시다시피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뉴라이트 시대정신 편집위원으로 대표적인 수구적 친일 사학자로 분류되는 인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저런 논리를 펴는지도 제대로 모르시고 왜곡된 역사와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내세우는 잘못된 논리에 

어느 순간 포섭당하신 듯 하여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 글을 올립니다.


상당히 긴 글이고 글자체가 이영훈 교수에 반박하기 위한 의도에서 쓰여진 글이라 

일면 편향적으로 쓰여져 있으므로 거슬리시더라도 사실 관계에 초점을 두시고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글 : http://blog.조선.com/casy/5662301




지역차별을 고려/조선시대 탓으로 돌리는 시대정신 단체 이영훈교수 주장이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106/h2011060614515386330.htm&ver=v002) 옳은가에 대한 고찰.

 

이영훈 교수님,

귀하의 글을 보면 땅이 척박하여 소출이 적고 기후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농산물이 적은 지역에 비해 땅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고 기후가 좋아서 이모작 등으로 농산물이 풍부했던 전라도의 세금 등급이 높다고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예를 드는데 그런 차이를 조정하지 않고 등급을 같이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게 진짜 차별 아닌가요? 당시 어디가 잘살았는지는 전국을 돌아다닌 김시습,김병연(김삿갓),개성상인,이순신,정약용등이 남긴 자료와 못살겠다고 일으킨 민란,반란의 숫자가 정확하지 않을까요?.

 

또한 경상도기반 박정희 유신독재/전두환 군사독재 여파로 지역갈등이 사상 최대로 악화되어 지역갈등이 제일 큰 사회 문제가 되었던 시기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지역갈등이 아주 작아졌다는 근래의 조사자료(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1/2011090100952.html?news_Head3)는 외면하고 고려ㆍ조선 중앙정부 차원의 차별이라면서 조정과 왕실에서 버림받은 세력이나 비주류의 주장을 인용하여 짐작, 왜곡, 음해성 주장을 하는 귀하의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아래 예시 된 것처럼 고려ㆍ조선왕조의 기반이자 여당이었던 호남지역을 1000년 호남차별 운운하며 왜곡하여 깍아내리고 귀하 지역을 띄우려는 귀하 글이 실린 시대정신 간행물을 회수하기 바랍니다.

 

가. 고려왕조에서의 전라도지역 고찰

1. 고려 건국시기 - 왕건은 전남사람인 도선국사(道詵國師)을 평생 사표로 삼았고 젊은 시절에는 전북 聖壽山에서 수양을 쌓았고 (http://http://blog.조선.com/blog.screen?blogId=68721&menuId=299239), 왕건의 최 측근 책사는 전남 출신 태사 최지몽이고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전남 곡성 출신 신숭겸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하여 신숭겸을 죽을 때까지 추모했지요. 이외에도 왕건이 중용한 다수의 고려개국 삼한벽상공신들이 있고 전남 서남부 지역의 풍부한 물산은 왕건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제공하죠. 외척들이 득세할 여지가 많은 왕실의 인적 구성을 보면 전라도 태생 장화왕후/혜종 외에도 왕건과 말년을 함께 보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고려개국공신 박영규의 여식으로 전남 승주(昇州) 태생입니다. - 고려 개국에 핵심 역할을 한 공신들부터 베갯머리 송사로 이어지는 왕실 내명부까지 호남인들이 총애 받는 걸 보면 태조 왕건은 전라도를 믿고 의지한 거 같네요.

 

2. 고려초기 - 태조 왕건은 청년시절 전국에서 물산이 제일 풍부한 전남 서남부 지역을 복속시켜 머무르면서 힘을 기르고 나주 호족 오다련의 여식과 결혼하여 아들 왕무를 낳아 키우지요. 고려개국 후 나주 부인은 정비 장화왕후로 삼고 아들 왕무는 세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니 2대왕 혜종입니다. 3대왕부터 6대 성종때까지 전라도 출신 최지몽이 태사로서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요. 4대왕 광종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학문이 높아 지공거와 최고위직 문하시중에 오른 유방헌은 전주 출신이고 김심언, 장연우, 전공지 등 다수의 인물들이 중앙 요직을 역임했네요 - 왕실 권력의 핵심인 정비,세자,태사와 중앙 조정의 요직까지 전라도 출신들이 장악하였으니 지역주의자들 방식으로 해석하면 전라도가 여당지역이네요.

 

3. 고려초중기 - 8대왕 현종은 거란이 침입하자 公州江以南인 전남 나주로 피신하고 또한 公州江以南 지역인 전주 박온기의 여식과 와 공주 김은부의 여식들을 후궁으로 들였습니다. - 고려왕조가 公州江以南 지역을 꺼렸다면 현종이 경상도나 강원도로 피신을 가지 거란군이 한강을 넘지도 않는 상황에서 굳이 멀리 공주강을 건너 충남 공주, 전북 전주를 거쳐 머나먼 전라도 남쪽지역 나주까지 가서 머물렀을까요? 아마도 나주와 서남부 지역은 태조 왕건이 청년시절 대업의 기반을 닦았던 지역이라 왕조가 위기에 처하자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나주까지 일부러 피신 가서 그곳 백성들과 함께 왕실수호와 국난극복의 의지를 다졌겠죠. 다른 왕조에서도 그런 전례가 있으니 전라도 지역이 타 지역보다 믿고 의지했던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현종 때도 公州江以南이 경상도보다 훨씬 우호적이네요.

 

4. 고려중기 - 17대왕 인종은 전남 장흥에서 나고 자란 공예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이후 고려는 망할때까지 공예왕후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B5%EC%98%88%EC%99%95%ED%9B%84, http://travel.jangheung.go.kr/html/Tour.jsp?idx=1008&page=1&s_key=&keyword=&menu_cd=0106&act=v). 이후 장흥 임씨들은 문하시중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을 대거 배출하면서 고려가 망할때까지 영화를 누리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족인 개성 왕씨와 함께 장흥 임씨들도 같이 학살 당하는 아픔을 겪죠. 전주 김씨 시조인 김태서의 후손들이 왕실 및 귀족들과 통혼이 많았죠. - 지역주의자들 방식으로 해석하면 17대왕 인종부터 고려가 망할 때까지 전라도 정권입니다.

 

5. 고려중기 - 전라도출신 공예왕후 아들이 즉위한 명종 때에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경상도 지역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3년간에 걸친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밀양 오치재에서 관군에게 반란군 만여 명이 학살당하고 진압됐죠. 외세의 침략을 제외하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에 의한 최대의 학살이자 비극이죠. - 지역주의자들 방식으로 해석하면 이때의 경상도는 답이 안 나오네요.

 

6. 고려후기 - 고려 26대 충선왕은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누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우두머리'인 당대 1급 가문들 15개를 발표했는데 경기도 7개, 황해도 2개, 강원도 2개, 전라도 2개 (전남 장흥 임씨 (시조 임호), 전북 전주 김씨 (시조 김태서)), 충청도 1개, 경상도 1개이니 전라도가 경상도보다 많네요. 전북 남원출신 이능간이 충혜왕부터 공민왕때까지 4대 왕을 모시며 일인지하만인지상인 문하시중을 지냈고 전북 부안 출신으로 지공거, 평장사를 지낸 대학자 지포 김구 (http://www.mjbnews.com/sub_read.html?uid=115766) 등이 있네요 -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라면 전라도는 삼남지방 중 으뜸이네요.

 

7. 동서양을 막론하고 특정 종교가 국교이면 그 종교는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고 승려나 성직자는 상류계급으로 권세가 있었죠. 고려는 개국부터 망할 때까지 철저한 불교국가이자 귀족사회였습니다. 태조 왕건과 고려초기 왕들이 전라도 출신 도선국사를 국사로 삼았고 전남 송광사는 고려시대에 16국사를 배출하여 승보 사찰이 됐지요. 조선초기에 효령대군이 머물면서 중창했던 전남 백련사는 고려후기에 8국사를 배출했지요. 고려 국사들은 대부분 전라도/경기 지역 출신이거나 전라도/경기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 지역주의자들 방식으로 해석하면 국사와 그의 제자, 인맥들이 포진한 전라도는 고려 문화와 사상의 중심지이자 고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네요.

 

8.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시대 천민집단거주지 향 소 부곡이 전국 785곳 중 경상도에 396곳, 그 중에 제일 천시 받은 부곡은 전국 406곳 중 경상도에 217곳이 집중되어 있네요. 이는 전국의 1/2를 상회하는 엄청난 비율이네요. 향,소,부곡 천민들에 대한 핍박과 천대로 인해 일어난 대표적 반란이 공주 명학소의 난으로 나중에 현으로 승격시켜서 천민들을 달래주고 다른 지역들도 고려후기로 가면서 대부분 승격되지요. - 역사적 fact인 천민주거지역 숫자로 본다면 고려 초,중기에 사람 대접 못받고 차별과 착취, 멸시를 받았던 지역은 경상도네요.

 

9. 훈요십조 車峴以南, 公州江外는 어디인가? 태조 왕건 때는 전라도란 지역개념이 없었으므로 公州江外가 公州江以南을 가리키는 것인지,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현재 지명이 남아있는 차현고개(車峴) 남쪽(以南)과 공주현을 감싸고 있는 公州江 외곽(外) 사이에 있는 현재의 청원군 江外面 지역인지 또는 위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지역주의자들 방식으로 公州江外를 公州江以南으로 바꿔서 해석해봅시다.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변형하여 해석하면 원 뜻과 달라지므로 그리하면 안되지만 어쨌든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 해봅시다. 公州江以南은 공주, 부여, 논산, 대전, 옥천 등 오랜 기간 충청지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 인구가 많은 충청 中南部지역과 전라도 지역이 되겠지요. -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있는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노·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黃龍寺)의 중창(重創)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노(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승노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건국대 신복룡 명예 교수 논문)

 

10. 고려사에 보면 충북 청주지역 차별 기록이 나오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경북 상주사람이며 경북 서부지역, 公州江以南인 충청 중남부와 전북, 전남 동부지역이 오랫동안 후백제의 영토였죠. 고려, 조선때의 古地圖들을 보면 금강은 충북 음성과 전북 장수에서 나온 강물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고 고려초는 충북 음성에서 청주 미호강을 거쳐 공주강으로 흘러가는 금강 물길이 전북지역보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지요. 훈요십조가 기록된 고려사를 보면 936년 태조 왕건 19년에 후백제를 평정하고 후백제 지역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는데 安은 長安의 뜻으로 왕이 있는 개경을 뜻하며 安南은 개경의 남쪽 지역이란 뜻이다. 또한 경주(慶州)를 개경의 동쪽지역이라 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경의 서쪽지역 해주(海州)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라 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입으로 훈요십조 원본이 불타기전인 고려 6대왕 성종 995년에 지방 행정구역을 공주,대전지역의 공주강 남쪽지역을 하남도(河南道), 전북지역을 강남도(江南道), 전남지역을 해남도(海南道)라 하였다. 개경에서 봤을 때 공주강 남쪽에 있으면 河南道, 江南道라 하였고 개경에서 봤을 때 백두대간 남쪽에 있으면 嶺南道, 동쪽에 있으면 嶺東道라 하였다. 왕이 있는 개경에서 봤을때 명칭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봤을때 전라도는 금강 남쪽이란 뜻의 湖南, 경상도는 백두대간 남쪽지역이라하여 嶺南, 강릉지역은 嶺東, 원주지역은 嶺西라 하였다.

위의 경우처럼 고려 태조 왕건부터 조선말까지 금강이남지역은 개경과 한양에서 봤을때 남쪽이므로 南이란 단어를 넣어서 기록하였다. 태조 왕건이 생전에 公州江以南을 개경에서 봤을 때 남쪽이라 하여 南을 써서 표기했고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조상들이 기록한 정사에 금강이남지역을 개경이나 한양에서 봤을때 南으로 표기했지 外라는 희한한 표기는 없다. 그러나 이병도는 훈요십조의 車峴以南 公州江外를 車嶺以南 公州江以南으로 원본을 왜곡 조작하여 公州江外가 公州江以南이라고 비정하였고 오늘날 상당수 사학자는 이병도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훈요십조의 車峴以南 公州江外는 어디인가 (http://blog.조선.com/casy/3220308). 원본을 왜곡 조작하면서까지 공주강외가 전라도라고 비정하는 이유가 이병도에게 있는 걸까. 조선을 팔아먹은 우봉이씨 이완용의 종친인 이병도가 조선왕조 전주이씨 본향인 전주가 속한 전라도를 배척하려한 것일까 또는 지리개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잘못된 주장이 학계에 정착됐다는 연세대 설성경 명예교수 논문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5/nd98050100.html).

 

고려 초,중,후기 중앙정부 상황 또는 어떤 정책을 보고 짐작이나 추측이 아닌 역사적 fact로서 고려왕조의 권력가들인 왕실, 권문세족, 승려계급, 무신정권 등이 고려중앙정부 차원의 전라도 차별정책이 있었다고 하십니까? 오히려 경상도나 일부 지역들보다 전라도가 더 많은 권력과 부를 누렸다는 증거들이 있군요. 또한 전국 세수의 40~50%를 담당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여 가장 잘 먹고 잘살았네요.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 위의 사례들을 해석하면 고려왕조는 개성지역을 빼고 전라도가 가장 잘 살았고 여당지역이었네요.

 

나. 조선왕조에서의 전라도지역 고찰

1. 국가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 실록, 조선의 건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5/01/2011050101248.html), 경기 남인인 이익의 성호사설, 영남 유학의 종조 점필제집 등에서 조선왕조는 전라도 전주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 지역주의자들이 훈요십조 등의 자료를 인용하는 방식대로 해석한다면 조선왕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라도, 公州江以南 정권이네요.

 

2. 조선왕조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왕조가 탄생한 경사스러운 곳이란 뜻의 慶基殿을 짓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비롯하여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셨지요. 또한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풍패지향이라 하여 풍패를 따서 전주성 남문을 풍남문, 서문을 패서문 (http://blog.조선.com/blog.log.view.screen?userId=casy&logId=3651498) 으로 지었지요. 조선왕조의 시조묘 조경단,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편액을 쓴 풍패지관, 고종황제 주유비가 있는 오목대등이 있습니다. 이것도 일제가 조선왕조의 흔적을 지우고 민족 정기를 말살하고자 그 많던 조선왕조 유적을 허물고 그자리에 학교, 관공서 및 주택을 짓고 일반 시장이 들어서고 길을 냈는데도 남아있는 유적들입니다. - 전라도의 수도였던 전주의 유적들은 본관제와 신분제의 유교 국가인 조선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대접받고 추앙 받았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줍니다. 이런 유적도 없으면서 전라도보다 잘난 척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3. 조선초기 – 태조 이성계는 전주가 왕조의 발상지라 하여 전주를 개성과 더불어 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전주출신 대제학인 부성군 심효생의 여식을 세자 방석의 세자비로 삼아 세자의 후견인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이방원에게 정도전 과 함께 죽임을 당하죠. 태종,세종 때 요직을 두루 거친 심도원은 심효생의 아들이죠. 태종을 몰아내려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의 형 회안대군이 전라도 익산, 전주지역에 살다가 전주에 묻히고, 1차 왕자의 난 때 아버지 태종과 대립한 세자 방석의 후견인 심효생과 세종의 장인 심온 (영의정, 증조부가 전북 익산, http://blog.naver.com/ldg7169/10033271155)을 죽인 박은(좌의정) 등이 전라도라 세종은 전라도에 대해 부정적 일수도 있었지만 전라도 사람으로 알려진 황희를 (http://blog.조선.com/blog.screen?blogId=68721&menuId=299341) 영의정 18년 포함 30여 년간 정사를 맡겼고 문무를 겸비한 전남 순천출신 김종서한테 국방을 맡겼으나 경상도 백성들은 김종서가 개척한 춥고 척박한 함경도로 강제 이주시켰지요. 단종의 정비 정순왕후는 전북 정읍 출신이고, 전북 남원 출신 정인지와 전남 나주출신 신숙주는 세종의 총애를 받아 요직에 있었으며 세조는 정인지, 신숙주를 최 측근으로 삼아 영의정으로 정사를 맡겼고 예종의 태실은 금강이남인 전북 완주에 만들었습니다. - 조선초기에 전라도는 정권을 담당했거나 정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거나 왕실과 통혼했던 여당이었네요. 태조 이성계가 궁궐과 한성을 쌓으면서 백성들을 강제 부역시켰는데 잡혀온 부역 백성이 경상도 5만여명, 평안도 3만여명이나 전라도는 당시 인구가 많음에도 겨우 1만8천명이었네요. 조선시대초부터 경상도와 평안도는 강제부역으로 이루 말할수 없이 고생했으나 전라도,경기도,황해도,충청도 등은 그렇지 않았네요.  

 

4. 조선중기 – 예종/성종때 훈구파로 남원출신 부원군 영의정 최항, 훈구파로 무오사화를 주도한 무령군 유자광, 을사사화를 주도한 임백령,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동인의 영수 이발, 백비로 유명한 박수량, 정여립, 선조때 영의정을 14년간 했던 나주출신 서인의 수장 박순(대제학에 제수됐을 때 나이 많은 이황을 배려하여 양보했던), 기축옥사를 주도한 서인의 영수 정철, 광해군때 파주로 천도를 추진했던 이의신, 인조때 完城府院君 영의정 최명길, 현종 때 남인의 영수 윤선도 등 권력가나 당파 지도자중에 전라도 출신이거나 부모가 전라도라 전라도 출신으로 분류된 인물들이 많았네요. 전라도의 위상을 보여주듯 임진왜란 때 관군 총사령관 및 도원수는 전라감사(이광, 권율)가 맡았고, 수군은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8도 의병대장은 전라도 광주출신인 김덕령이었네요. 임시 조정인 준조를 전주에 두었네요. - 조선 중기에도 정권을 담당했거나 정권을 두고 다툼을 벌였던 영수들을 보면 전라도가 여당지역이네요. 인조반정 이후 경상우도 출신은 관직에 제한을 받으면서 영남 차별이 시작되네요.

 

5. 조선후기 – 조선 후기로 오면 몇몇 가문들이 벼슬을 대부분 독식하게 되는데 公州江以南인 충남 중남부 및 충북, 전북 북부지방에 기반을 둔 서인/노론파인 광산 김씨 가문 (김장생, 김집, 김만기 (http://blog.naver.com/ldg7169?Redirect=Log&logNo=10029165177))과 제자들, 은진/여산 송씨 가문 (송시열,송준길 등)과 제자들, 전주 이씨, 전주 최씨, 반남 박씨, 장동 김씨(장동 김씨는 근래에 안동 김씨로 불림), 풍양 조씨 등이 권력가가 많았고 영남 남인들은 정희량의 반란이후 100여 년간 과거시험 보는 것 조차 금지 당하다가 순조때 풀렸지만 당상관 이상은 승진하지 못하도록 고종 때까지 이어졌지요. 조선후기 성리학과 국가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기정진을 비롯하여 신경준, 황현, 서재필 등 호남출신 벼슬아치가 적지 않네요 - 조선후기 권력가들은 김종서의 부모처럼 일가 친족들이 모여 사는 전라도와 한양 양쪽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중간지역인 충청도에 정착했거나 한양에 정착한 후손들로 전라도 지역 본관들이 많았고 중앙정권 차원의 호남 차별 기록은 없고 인조반정 이후의 경상우도 출신에 이어 이인좌/정희량 반란 이후로 경상도 출신 전체가 차별 받았네요.

 

6. 임금이 이극배에게 이르기를, “전라도의 풍속이 어떠한가? 내가 들으니 백제의 남은풍습이 아직도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데, 그러한가?” 하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신은 구치함에 급하여 자세히 방문하지 못하였습니다마는, 듣건대 서로 죽이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니… 등등 식으로 전라도의 풍속, 지세 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역사 기록이 있지만 그런 기록과 중앙 정부 차원의 차별 정책은 180도 다릅니다. 이극배 동생인 이극견이 처가가 있는 전라도 임피로 이주하여 살았고 그 후손들 중에 이수성 전 국무총리 등 인물이 많이 나왔지요. – 지역주의자들이 인용하는 일개 관료 말이 지역차별 정책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당시 지역감정은 일반적인 tolerable한 수준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전라도 차별정책과 관계 없지요.

 

7. 실학자 성호 이익의 호남에 대한 부정적 평가: 성호 이익에게 큰 영향을 끼친 반계 유형원은 이익이 저주한 전라도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익에게 큰 영향을 받은 이중환, 안정복도 이익처럼 전라도에 대해 안 좋게 평했네요. 그런데 이익의 영향을 받은 정약용은 이들과 달리 전라도에 대해 좋게 평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익의 여주 이씨 가문은 숙종때 서인/노론이 집권하면서 가혹한 경신대척출로 남인이었던 이익의 아버지가 유배가서 죽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익을 부양한 형은 역모혐의로 장살당해 죽고 가문은 풍비박산 났지요. 당시 권력층은 숙종의 장인이자 國舅인 김문기등 광산 김씨 문중 및 제자들, 송시열/송준길 등의 은진/여산 송씨 및 제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대부분 금강이남인 충청 중남부 및 전북 북부가 기반이거나 금강이남에 본관이 있었고 이들로 인해 여주 이씨들은 큰 피해를 보았지요. 당연히 경기도에 본관을 가진 여주 이씨인 이익/이중환, 여주 안씨 안정복은 금강이남에 본관과 세거지를 둔 광산 김씨, 은진/여산 송씨 가문및 문하생들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분노와 원한을 가졌을 테니 훈요십조 원문에 없는 반궁수라는 말까지 더하고 (경상도의 낙동강 반궁수는 언급도 안하면서) 전북 장수와 충북 음성에서 발원하여 충청도를 관통하는 금강, 전라도와 경남의 경계를 짓는 섬진강까지 집어넣어서 전라도 산수는 산발수라면서 전라도에 대해 원한에 사무친 악담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왕실의 본관인 전주까지 악담하면 잡혀가 죽을 수 있으니까 聖朝는 전라도 전주에서 나왔다면서 전주에 대한 공격은 비껴갑니다. 하지만 같은 근기 남인으로 금강이남인 전라도 나주가 본관이고 외가가 전라도 해남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그들과 달리 금강이남을 좋게 평했습니다. 부모형제의 죽음과 가문의 몰락에 대해 철전지 원한이 쌓인 사람이 자기 저서에서 원한과 관련된 지역을 저주하고 공격할 수 있지요. 그런 예가 성호 이익만 있는 건 아니죠. 저서의 내용을 인용하여 전라도를 음해, 악용하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지요. 당시 집권당인 서인/노론과 왕실에서 버림받아 평생을 경기도 안산에 칩거하며 조선이 망할 때까지 남인들이 정권을 잡지 못해 조선후기 주류사회 및 권력층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던 성호 이익이 근래에 지역주의자들에게 주목 받는 것은 성호 이익의 호남에 대한 악평이 지역주의자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죠. - 학자가 자기 저서에서 뭐라고 하는 것과 중앙정부 차원의 호남지역 차별과는 관계 없지요.

 

8. 이중환 택리지의 호남에 대한 부정적 평가: 이익의 제자이자 같은 여주 이씨 종친으로 전라도를 좋게 평가하겠습니까. 더구나 본인이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고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에 대한 평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겠죠. 고려후기 문하시중을 지낸 이능간, 3부자 영의정을 배출한 영의정 황희의 조부모가 묻혀있고, 영의정 최항, 영의정 정인지, 권력가 무령군 유자광 등이 출생한 인재의 보고 전북 남원(http://namwo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600979)을 호남 중 가장 안 좋게 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또한 조선의 지세가 중국에 절하는 노인 모습같다고 비하하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16/2011091601291.html). 이런 자의 주장을 지역주의자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분별하게 인용하는 것이 문제이고 중앙정부 차원의 호남지역 차별과는 관계 없지요.

 

9. 조선은 본관제와 신분제 사회로 본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신라를 개국한 사로 육촌 중 대수촌장 구례마 시조의 77대손이자 밀양 손씨 군사공 영파로 신라/고려때 귀족집안이었던 본인은 시제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일가 친척들이 가문을 위해 목숨 바쳐 잘하자고 하지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습니다. 손씨 일가 친척에게 지역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보다 본관제와 일가 친척에 대한 연대가 훨씬 깊었던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조선후기 정약용은 몇몇 가문만이 벼슬을 독차지한다고 개탄하였고, 김해 김씨는 숫자가 제일 많았음에도 조선시대에 겨우 정승 1명만 배출했을 정도로 극도로 부진했지만 김해 김씨의 5분1밖에 안되는 전라도 광산 김씨는 연리광김이라하여 조선 최고의 양대 양반가문이고, 전라도 반남 박씨는 경상도 밀양 박씨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고위직 벼슬아치가 더 많았습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본향이기에 조선왕조 마지막 황손 이석씨가 전주 승광재에 현재 거주하는데 전주가 고향에 온 거 같다고 합니다. 본인도 사로 6촌 시조를 모신 경주 양산재를 방문했을 때 마음이 편하고 좋았습니다. 조선은 지역주의가 지배했던 사회가 아니라 본관제와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 지역주의자들 방식대로 해석하면 조선왕조의 본가부터 권문세가의 본가가 많았던 전라도가 여당입니다.

 

10. 조선의 형벌 중에 절도안치와 위리 안치가 있는데 전라도는 섬이 많고 기후가 따뜻하여 탱자 나무가 잘 자라 절도안치, 위리안치 형을 집행하기에 좋고 전라도가 미워서 일부러 유배지로 보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약용은 경상도와 전라도 양쪽에서 유배생활을 했지만 전라도 유배시절에 민족문화에 빛나는 세계적인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은 전라도 유배지에서 마음편하고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어서였습니다. 유배자들은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거나 지역민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는데 전라도지역 유배자들이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긴것은 그만큼 전라도가 풍요롭고 인심이 넉넉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1.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의병, 구한말 의병, 6.25전쟁에서 국군과 학도병 숫자를 보면 전라도 지역이 1,2위로 나옵니다. 차별받고 소외받은 지역일수록 국가에 대해 불만이 많은 관계로 국란시 의병 같은 것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대표적 차별지역으로 조선왕조에 대해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평안도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이 거의 없었고 서인들이 장기집권 하도록 기반을 닦았다는 평을 듣는 사계 김장생이 병자호란 때 충청,호남에서만 모병하고 서인정권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경상도에서는 모병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경국대전에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의 등용을 제한한다는 기록이 있고 양계의 금이라 하여 평안도/함경도 사람들의 한양 도성 출입을 금하고 이를 어겨서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인조반정 이후로 경상우도 출신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고 이인좌/정희량의 반란이후 영남 출신은 과거시험 자체를 못보게 되거나 당상관 이상의 등용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라도에 대한 조선 중앙정부 차원의 차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에서도 전라도는 여당이나 준 여당 지역이었고 경제적 측면을 보면 고려/조선시대 최 첨단 제품인 청자, 백자를 생산하고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쌀,소금 등 농산물,해산물이 풍부하여 고려,조선 조정 세수의 40~50%를 담당할 정도로 전국에서 제일 잘 먹고 잘살았던 전라도와 세금은 커녕 먹을 것이 없어서 유랑민 부랑민이 많았고 시집갈 때까지 흰쌀 2말을 못 먹었다는 지역이나 조선 초ㆍ중기에 유학자들은 많았어도 변변한 권력가가 없었고 조선중기 이후로는 출사가 막혀서 유교관습이나 지키고 살았던 경상도 지역과 비교가 됩니까.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물자가 풍부하면 음식문화, 문화 예술이 발달하는데 고려/조선의 수도였던 개성/한양을 빼고 전라도만큼 음식문화, 문화 예술이 발달했던 지역이 있습니까?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음식문화, 문화예술이 발달합니까? 과거를 꼭 봐서 출세할 필요성도 그만큼 떨어졌지요. 그렇다고 인구대비 과거 급제자수에서 전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고시 합격자 수가 많다고 집권당 지역이 아니고 고위 관료 숫자및 대통령과 가까워야 집권당 지역이듯이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해 고위 관료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왕실및 권력가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지요. 조선왕조 역시 호남이 여당지역이이었네요.

 

다. 1945년 해방 후의 지역간 갈등은 어떠한가

1. 전라도 출신인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등이 한민당을 만들어 이승만과 연합하여 해방 후 여당역할을 했지만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 빠져나가듯이 한민당에서 자유당이 독립하면서 민주당이 열린당과 원수가 되어 노무현 탄핵에 앞장섰듯이 한민당과 자유당은 전라도 출신 부통령 김성수/대법원장 김병로를 중심으로 뭉친 전라도 정치세력과 이북출신 대통령 이승만을 중심으로 뭉친 이북지역 정치세력의 극렬한 대립으로 서울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이북사람들과 당시 소수였던 전라도 사람들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또한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을 밀었던 중부사람들(서울,경기도,강원도,충청도에서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승리)과 박정희를 밀었던 남부지방(전라도,경상도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에 승리)의 압도적 지지로 박정희가 윤보선을 겨우 10만 표차로 이겼는데 그것 땜에 전라도 사람들과 중부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지요. - 대체적으로 이때까지 지역감정은 일반적인 수준, 감내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전라도 사람이 서울,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2. 1971년 경상도 박정희와 전라도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붙으면서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최초로, 세계 역사에서도 드물고 후진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중앙정부 차원의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이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반적 수준의 지역감정을 넘어서 호남지역민들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주 큰 죄악을 저질렀지요. 지역감정 조장으로 정권을 재 창출한 박정희는 유신 독재로 철저한 언론 통제를 하면서 야당의 대표인 김대중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거세하기 위해 손쉽고 효과만점인 지역감정 조장을 이용합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대구출신 이효상 국회의장 등의 방송연설은 매우 유명하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같은 경상도출신 권력가, 오영수 같은 경상도 출신 지식인들의 지역감정 조장도 매우 유명하죠. 권력에 아부하는 비영남 유신독재 권력가 및 지식인들이 덩달아 지역감정 조장을 부채질 했죠. 이때부터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서 국회의원 당선되고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국회의원 당선되는 경우는 없어져 버렸죠. 여기에 박정희가 자기 고향 구미에 전국 최대의 공단을 만드는 것을 필두로 개발과 인사에서 경상도 퍼주기, 전라도 푸대접이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알려지게 되고 이것이 민주화 열망과 뭉쳐져서 폭발하는 지경에 이르러 정권에 위협이 되니까 유신정권은 더욱 발악을 하다 몰락하죠.

 

3. 광주사태가 벌어지면서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학살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군부의 수장인 전두환과 군부 핵심 세력인 정호용, 노태우, 유학성, 허삼수, 허화평 등이 모두 경상도출신이고 군대는 철저히 상명하복이기 때문에 당연한 논리입니다. 자기들 고향인 경상도에서 저런 시위가 났다면 과연 광주사태처럼 경상도 군부 지도자들이 무자비한 진압 명령을 내렸을까요? 군부를 장악한 경상도 군인들 명령으로 자행된 광주학살에 대해 전라도가 경상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짐작하리라 봅니다. 그럼에도 198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가 민정당 임방현의원한테 투표했을 정도로 언론통제가 심하여 그때까지 진실을 모르는 국민들이 많았지요.

 

4.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언론 통제가 사라지자 박정희, 전두환의 시대의 호남에 대한 개발 소외와 인사상 불이익이 호남 곳곳에 낱낱이 알려지고 정치인들이 부채질하면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영삼/노태우가 대구와 광주에서 돌팔매질를 당할 정도로 지역감정은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고 기승을 부리게 되죠. 해외 언론들은 한국의 지역갈등은 아프리카 인종갈등보다 심한 거 같다고 보도했지요. 예전에 언론통제와 정보부족으로 공화당, 민정당을 찍었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특정 지역 정당에 대한 몰표현상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5. 최근의 지역감정 조장 사례를 보면 2005년 방폐장 선정때 부안사태로 전북도민들이 적잖은 상처를 입었지만 정부에서 많은 혜택을 준다고 약속하면서 지역발전을 위해 전북 군산시가 방폐장 유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희생도 없었던 경주시가 정부가 준다는 혜택을 보고서 자기 지역으로 방폐장 유치하겠다고 갑자기 뛰어들고 방폐장 선거에서 판세가 불리해지자 경주시장이 단식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결국 군산을 누르고 방폐장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경상도가 얼마나 얍삽하고 비열하게 느껴지던지 경상도 출신 회사 동료 얼굴을 다시 보게 되더군요. 당시 전북도민의 경상도에 대한 분노가 매우 컸었지요.

그런데 이번에 LH공사 이전 도시를 선정하면서 경남에 가기로 한 세수 110억 주택공사와 전북에 가기로 한 세수 200억짜리 토지공사를 합쳐서 세수 310억짜리 알짜배기 LH공사를 만들어 경남 진주로 이전하기로 하고 전북은 대신에 세수 6억짜리 쭉쟁이 국민연금공단을 이전시키기로 하니까 전북 도민부터 국회의원 도지사 모두 들고 일어났지요. 아마 그때 경상도 사람들 전북에 있었으면 싫은 소리 들을 수도 있었겠지요.

얼마 전에는 과학벨트를 두고 방폐장선정 때처럼 경북도지사가 또다시 단식과 혈서를 써서 지역정서를 자극하고 이에 다른 지역에서도 맞대응으로 단식하고… 지역감정 조장을 먼저 하는 경우가 많네요.

 

최근에 터진 이런 종류의 지역감정을 악화시킨 사례들 보다 더 심한 경우가 박정희, 전두환의 25년 집권기간 동안 일어났으니 일반적 감내할만한 수준을 넘어선 지역감정 발생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지역감정이 감내할만한 수준에서 패악한 지경으로 발전한 것은 지역감정을 선거와 정권잡기 및 정권유지, 광주학살에 악용한 집권 세력 및 그 세력의 수장인 박정희, 전두환의 잘못이 제일 큽니다. 그 다음이 여기에 반발하여 지역감정 조장에 일조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가들 잘못으로 그런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지 고려,조선왕조 1000년의 차별이 근래의 패악스런 지역감정을 유발한 주요인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여 호남의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아서라도 박정희, 전두환을 변호하려는 궤변이고 위에서 예를 든 고려/조선 왕조 사례와 60년대 이전 상황 및 지역감정이 현저히 희석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지요.

 

예전에 해태타이거즈 선수단이 서울,인천,대전,수원 등에서는 맘놓고 야구했지만 대구에서는 항상 맘 졸이고 불안하고 해태타이거즈 선수단 버스가 불타고 대여섯시간씩 감금당하고 돌팔매질 당하고 광주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었지요. 지금은 대구에서 전라도 야구단 열렬히 응원하고 광주에서 경상도 야구단 열렬히 응원해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 무덤덤하고 별 관심도 없습니다.

지역감정 조장의 주역들이 대부분 떠난 지금은 지역감정이 점차 일반적 수준의 감내할만한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보여지고 그것이 직접 피부로 느껴지고 각종 의식조사에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한다면 예전 60년대 이전처럼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강원도에서 선거에 당선되고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선거에 당선되는 날이 멀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처녀가 성폭행 당했다고 거짓 소문났다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어도 사람들은 처녀의 순결을 의심합니다. 경상도는 조선중기 선조 때에 처음 영의정이 나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반정 이후 차별 받기 시작하여 과거도 못 보거나 당상관이상은 못하도록 차별받았지만 전라도는 고려/조선시대 왕실과 통혼하여 왕도 나왔고 수 많은 영의정 및 권력가가 나왔죠. 훈구파로 사화와 옥사를 주도하여 많은 선비들을 죽게 한 전라도출신 권력가들 때문에 사림파 선비들로부터 비난받았지만 고려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고려/조선왕조의 중앙정부차원의 차별은커녕 대부분 시기가 여당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언론통제, 검열이 심했던 박정희, 전두환 때 주장하던 식으로 "악성 구조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호남 지역에 대한 지역감정의 경우, 60년대 이후 특정 지역 출신의 정치 세력이 장기간 집권하는 과정에서 생겼다기보다 고려ㆍ조선왕조의 1,000년에 걸친 지역 차별 정책에 기인..." 어쩌고 하며 아전인수 식의 짐작과 추측으로 고려ㆍ조선왕조 집권세력이 마치 호남지역을 차별하고 경상도 지역을 우대했던 것처럼 유도하거나 암시하는 행위는 지역갈등 심화의 진실을 호도하여 박정희, 전두환의 죄악을 덮어보려는 더러운 정치적 목적이 있거나 무지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전라도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말고 그냥 두는 게 전라도 도와주는 겁니다. 왈가왈부 하려거든 귀하 지역부터 하세요. 내버려 두면 지역감정은 감내할만한 일반적 수준으로 자연히 치유됩니다. 더구나 경상도지역 출신들 및 그쪽과 가까운 인맥들이 주도하여 상당수 사람들이 깊은 불신과 의혹을 느끼는 뉴라이트계열 시대정신입니다. 시대정신이 호남에 대해 뭐라 할 수 있겠지만 오해 살만한 주장을 하려면 공무원 신분을 떠난 후에 하세요.

 

마지막으로 고려, 조선왕조를 열등하게 해석하지 마세요. 우매한 군주와 정치가들 때문에 시련을 겪고 나라를 잃었던 적도 있었지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자랑스런 역사와 유산, 전통과 문화를 남겼는데 그것은 왕부터 집권세력, 백성들이 일치 단결하여 만든 것이고 호남 없이는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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