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기다려왔던 조국통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쪽에서, 어떠한 이유로 시작됐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선군에겐 상관없는 일이였다. 자신의 존재 목적, 지긋지긋한 퍼레이드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얼굴마담의 역할이 아니라 전장에 나가 남조선의 나약한 서방 전차들을 분쇄시키는 것, 바로 그걸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달아올라 미칠 지경이였다.
그리고 소중한 그녀의 파트너들과 함께 첫 전투에 참여한 그녀가 본 것은 피와 철의, 그것도 압도적 비율로 아군의 것으로 이루어진 지옥도였다.
자신감은 짓눌려 뭉개졌으며 공포와 경악만이 점차 아군을 지배해갔다.
적들은 자신의 동생들을 하나하나 압도적인 힘으로 참살해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철의 비와 일시에 쏟아지는 파괴의 폭풍은 이날만을 위해 기름도 굶어가며 기다려온 공화국의 철귀들을 자비없이 도륙했고 그들의 장갑은 필사적으로 반격을 위해 내뻗은 팔을 사정없이 부러뜨려 싸울 의지 또한 잃게 만들었다. 선군 또한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몇번 씩이나 가로막히는 것을 보며 굴욕을 느껴야만 했다.
그제야 선군은 공화국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남조선의 전차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가끔씩 격파가 가능했던 적도 있었으나 공화국 병사들 사이에서 흑귀라 불리우는 남조선의 신형 전차가 출현했을 때면 어김없이 수많은 자매들을 잃고 후퇴해야만 했다.
결국 선군이 남조선으로의 투항을 결심했을 때 자신의 곁에 남은 자매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엘리트로 기대받던 동생 폭풍 뿐이였다. 그녀는 이 아이만큼은 결코 그렇게 허무하게 개죽음 당하게 둘 순 없다고 다짐했다.
일주일 여에 걸친 준비가 끝나고 자신의 사단에 대대적인 반격령-모두 죽으라는 거군. 하고 사단장이 코웃음쳤다고 한다.-이 떨어지던 날 밤에 선군은 행동을 개시했다.
야음을 틈타 폭풍을 끌고 지금까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 온 그녀의 동료들-전쟁 초기부터 함께 해 온 자는 전차장 한 명 뿐이였다.-을 싣은 채로 남조선의 진지 쪽으로 다가가며 선군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그녀의 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백기는 달아두었으나 혹시 모를 일이였다.
그냥 쏴버리면 어쩌지? 만약 속임수라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야하나?
여러 생각이 들며 무서워졌지만 여기까지 온 순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미 부대를 빠져 나오며 검문소를 박살내버린 참이였다.
괜히 속도를 줄이면 은밀기동으로 오인 받을 것 같아 전력으로 전진하던 도중, 마침내 선군과 폭풍은 남조선의 병력과 마주쳐 순조롭게 투항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솔되어 간 부대 안에서 선군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그곳을 쳐다 보았다.
"하, 빨갱이 거렁뱅이가 납셨네."
흑귀였다. 악명높은 남조선의 살수는 그 특유의 낮은 포탑 탓에 자세를 낮추고 사냥감을 노리는 한마리 아름다운 야수와도 같은 생김새를 자랑하며, 광학장비를 번들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그녀에게 당한 자신의 자매들이 생각나 강력한 살의가 일었다. 이거리라면 격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저 괴물에게 당한 아이들도 편히 쉴 수 있을텐데.
그러나 지금 자신만을 의지하고 있는 폭풍과 승무원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냉정적으로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 안녕하십네까."
전쟁 기간 동안 굴욕에는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으나 저절로 떨려 나오는 말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안녕 못하다 이 빨갱이 년아. 별 개같은 년이 기어들어오고 지랄이야? 그냥 니 부대로 돌아가서 얌전히 내가 니년 후장을 찢어 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 니년한테 죽은 내 동생들도 그걸 바랄 꺼다."
흑귀는 표독스래 쏘아붙였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할 때 그녀의 눈엔 한없이 슬픈 빛이 깃들었다.
"....."
그 순수한 악의에 선군은 움츠러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자신만이 동생을 잃은 피해자가 아니였던 것이다. 분명 수는 훨씬 적을 테지만 그런 논리가 통할 일도 아니였다. 선군은 그냥 얌전히 남조선 병사와 얘기 중인 자신의 승무원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흑귀는 멈추지 않았다.
"저기 마스터, 나 저년 날려버리고 싶어.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철물점에서도 못쓰게 만들어 주고싶단 말이야. 그냥 쏴버리면 안될까?"
아마도 그녀 내부의 전차장에게 하는 말인 듯 했다. 그제야 선군은 흑귀가 장전된 주포로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장갑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났다. 안보려고 해도 절로 흑귀의 포구 쪽으로 시선이 가고 혹시 사태 발생 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리라 예상되지만.
내가 흑표의 위치였다면, 나는 쏘았을까.
"그건 곤란한데. 저건 기계화 학교로 보내질 꺼 같다. 아마 못볼 꼴 많이 당하겠지."
낯선 목소리가 들려 다시 흑귀 쪽을 보니 흑귀의 전차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해치 밖으로 나와 있었다. 굳이 밖으로 나온 이유는 자신더라 들으라는 것이 겠지.
그 생각을 입증해 주듯 전차장의 입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켈켈켈."
전차장의 기괴한 웃음소리를 들은 자신 뒤에 있는 폭풍이 공포로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선군의 걱정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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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 일어나 보시라요, 언니!"
폭풍의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묘한 장소였다. 분명 남조선 부대에서 잠이 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멍하니 폭풍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던 선군은 곧 정신을 차리고 폭풍에게 물었다.
"폭풍아, 여기가 어딘지 아나?"
"잘 모르겠습네다, 저도 방금 일어났지 말입니다?"
두 전차는 갸우뚱하며 천천히 주위를 확인해보았다. 시동이 꺼져 있어 움직이지는 못했고 시야 닿는 곳을 이곳저곳 살펴보니 아무래도 무슨 격납고같은 곳인 것 같았다. 어디서 많이 봤거나 생소한 장비와 부품들이 이곳저곳 널부러져 있고, 벽 곳곳에는 왠지 꺼림칙한 기름 때가 껴 있는 곳이였다.
"장성 기계화 학교에 온 것을 환영한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건물 안에서 울려 어디서 난 건지 찾기는 힘들었지만 곧 천장의 스피커에서 나온 것임을 발견했다.
"저기, 제 승무원들은 어디있습니까? 그리고 여긴 남조선 입네까?"
폭풍이 스피커를 보며 걱정스래 물었다. 그제야 선군은 자신의 승무원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남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전쟁은 끝났고 통일한국만이 존재하지. 그리고 너희의 승무원들은 조국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걱정말도록.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났다니, 대체 얼마나 자고 있던 거지. 하지만 자신이 탈영하던 당시의 공화국 사정을 생각해보니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선군이 더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 뒤의 말이였다.
"조국을 위해 일이라니, 다시 군에 돌아가는 겁네까?"
스피커에서 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웃더니, 곧 비야냥거리는 어투로 대답이 돌아왔다.
"하핫.... 괜찮다, 군은 너희의 손이 필요할 정도로 바쁘진 않거든. 너희의... 그 몸을 샅샅히 검사할 뿐이야. 그리고 계속 여기서 지내겠지."
"!?"
선군과 폭풍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검사라고 말은 하지만 그 일이 어떤 것인지 직접 봐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국에서, 소위 검사라는 이름으로 쏘오련의 전차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걸 자신들이 당한다니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다.
"자, 잠시만요!"
"언니?"
선군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지금은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인 것이다. 폭풍도 그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만류하는 표정으로 선군을 바라보았다.
"공화국의 기술이 잘 드러나는 건 저입네다, 그러니까 제발 동생만은 박물관 같은데로 보내주십쇼, 부탁입네다... 모든지 다 할테니 제발..."
"언니! 안 됩네다, 어찌 그러십네까!"
폭풍이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억지로 들썩거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한 대라도 멀쩡히 살아가기 위해선 이 방법 뿐이였다.
스피커 속 목소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약간은 언짢은 투로 말했다.
"...신파극은 됐다. 하지만 일리도 있군. 좋다, 동생은 보내주지."
"....감사합네다."
곧 여러 인원들과 장비가 격납고 안으로 들어와 폭풍을 끌고 나갔다. 끌려 나가는 와중에 언니를 부르며 울부짖는 폭풍을, 선군은 그저 바라보며 앞날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평화 속에서 녹 안 쓸게 살기를.
"자, 이제 시작해볼까."
폭풍이 나가고, 스피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좀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이 격납고로 들어와 선군에게 다가왔다. 다짐을 하고 또한 선군이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공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공기도 묘하게 서늘해진 것 같았고, 공포에 시야가 어지러워 졌다. 결국 윤활유를 지려버린 선군은 각종 연장을 든 사람들을 피해 뒤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역시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 오지마! 안돼!"
그 외침이 헛되게도 곧 다다른 사람들이 선군의 차체를 이곳 저곳 건들기 사작했다. 조금씩 선군의 부끄러운 부분들이 밖으로 노출 되었고 선군은 수치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해치 열어."
"흐,흐윽... 싫습네다.. 흑흑.."
한명이 해치를 두들기며 요구하자, 선군은 그것만은 싫다며 반항하였다. 지금도 충분히 부끄럽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해치를 열어 자신의 소중한 곳까지 내보여 버리면 더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말에 선군은 굴복하고 말았다.
"동생이 어떤 꼴을 당해도 좋다는 건가?"
"......"
자신의 조종석으로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선군은 기름이 샐 정도로 브레이크레버를 악물었다.
"잠시만... 거기는.. 하읏!"
선군의 내부를 만지는 손길은 거칠고 투박하여 고통을 일으켰다. 그녀는 새삼 자신을 소중히 대하여 주던 옛 승무원들의 생각이 나 눈물 지었다.
"흐으윽........."
그렇게 천천히 유린되는 동안, 선군의 정신은 점점 혼미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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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에 걸쳐 유린 당한 탓에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 격납고에서 쉬던 선군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다시 그 '검사'가 시작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 문으로 들어온 것은 작은 전차 한대 였다.
"...설마, 폭풍이니?"
그 익숙한 실루엣의 전차는 무슨 짓을 당한 건지 그야말로 처참한 몰골이였다.이곳 저곳에 날탄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이 나있었고, 차체에 이상한 낙서 또한 되어 있었다. 날탄의 특성상 목숨은 간신히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였지만 아마 내부는 엉망일 것이 틀림 없었다.
"이봐! 폭풍이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이 애만은 봐주기로 약속했잖아..... 대체 왜!"
선군은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 하지만 스피커는 침묵할 뿐이였다.
한참을 분노가 가득한 저주의 말을 내뱉던 선군은 폭풍이 한쯤 깨진 렌즈로 자신을 보며 한 말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헤헤헤... 언니... 흑표 언니가 잔뜩★ 귀여워 해줬어요...♥ 에헤헤헤.... 언니도.. 같이 즐겼으면 좋았을텐데.... 에헷☆ 날탄 더 주세요. 날탄....."
출처
DC 인사이드 - 기갑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