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입니다. 어제는 하늘이 뚫린것처럼 비가 쏟아지더군요. 외출을 하고 있던터라 생쥐꼴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었습니다-_ ㅠ 요 며칠은 항상 우산을 챙겨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서늘한 장마철,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고:D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말씀 드립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LA VIE EN ROSE[라 비 앙 로즈] Written by. 김희성
6화.
“술 한잔 할래요?”
상영이 종료되고, 상영관을 빠져나오는 인파속에서 해준이 소예에게 물었다. 붐비는 인파속에,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도록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위태롭게 걷던 소예는 워낙 소란스러운 통에 해준의 말을 잘 듣지 못했는지 네? 하고 되물었고, 해준은 그런 소예를 저의 쪽으로 잡아 당겨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도록 지탱해 주었다.
소예는 말 끝을 얼버무렸다. 물론 그녀 역시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지만, 바로 승낙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잠시 그 이유에 관해서 골몰히 생각하던 그녀는 곧 떠오른 듯, 해준씨야 말로, 약속이 있지 않나요? 하고 물었고 해준은 그런 소예의 물음에 의아한 표정을 했다.
“약속이요?” “네… 여자친구분께 연락드려봐야 하지 않아요?” “여자친구… 아마 아직까지도 잊고 있을거에요. 저랑 오늘 약속한건…….” “그래도, 한 번 확인해 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게다가 영화 보는 내내 휴대전화 전원은 꺼 놓으신 것 같던데… 만약 여자친구 분이, 늦게라도 약속이 기억나서 연락을 해봤다면, 지금쯤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요?”
소예의 말에 해준은 절대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기대감에 부풀어 그는,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어 확인했다. 그러나 해준의 기대와는 다르게 부재중 전화는커녕 문자 메시지 하나 없어, 해준은 예상하고 있던 일임에도,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는지 조금 상심한 표정으로 다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왜 그냥 넣어요?” “연락이 없네요…….” “그럼 먼저 해봐요… 이대로 그냥 둘이서 움직이기엔 조금 찜찜해서 그래요… 혹 나중에라도 여자친구분께 연락이 오게되면, 해준씨가 난처하지 않겠어요?” “역시… 그렇네요… 그럼 여기서 잠깐 기다려줄래요? 조용한 곳에 가서 전화해 보고 올게요.” “네.”
소예의 대답에 해준은 양해를 구하는 듯한 제스처를 한 번 취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마땅한 곳이 없는지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고, 소예는 예매창구 앞에 일렬로 늘어선 의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영화관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에게 의미없는 시선을 던졌다. 해준은 화장실 한켠에 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지정된 단축번호를 길게 눌렀다. 그러나 익숙한 통화연결음 대신에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음이 들렸고 해준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해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동안 휴대전화를 보다,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화장실을 나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가요.” “연락됐어요?” “아뇨… 일이 있나봐요. 전원이 꺼져있네요…….” “그래요…….” “괜찮아요. 너무 맘쓰지 마요. 가요.” “네…….”
해준은 전과 같이, 씁쓸함을 숨기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별 수 없이 들어나는 해준의 잔뜩 기운빠진 얼굴에 소예는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해준에게 위로가 되기 보다는 실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내색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진 두 사람은 한 동안 별 얘기 없이 영화관의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출입문에 다달아 건물을 빠져나오자 꽤 스산한 바람이 옷속으로 파고들어 서늘했다.
“꽤 춥네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래도 오늘은 조금 따뜻한 편이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역시 살에 닿는 공기가 차가운 탓에 몸을 움츠린채 걷는 소예를 보다, 해준은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거라도 둘러요.”
보는 것 만으로도 따뜻한 회색의 양모 머플러를 소예에게 내밀며 해준이 말했다.
“괜찮은데…….” “둘러요. 소예씨, 좀 추워보여서 그래요. 목 주변이 휑한게…….” “해준씨는 어떡하구요…….” “전 괜찮아요. 그리고,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는데, 여자는 추위에 잔뜩 움츠려서 걷고 있고 옆에 있는 남자는 머플러를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걸요? 하하. 괜스레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기 싫어서 그러는거니까 그냥 받아도 되요.” “고마워요…….”
소예는 해준이 내민 머플러를 받아 들어 목에 감았다. 머플러에서는 해준의 스킨향이 배었는지 청량감 있는 향이 났고, 소예는 그 청량감이 유쾌한 해준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해준씨는 참 자상한 사람인 것 같아요.”
뚜렷한 대화의 주제를 찾지 못해 의미 없이 간단하고 짤막짤막한 몇마디를 이어가던 중에 소예가 문득 말했다.
“제가요?” “네. 행동 하나하나에 배려가 묻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하하하.” “유쾌한 사람이기도 하구요.” “늘 들어요, 유쾌하단 말은. 잘 웃어서 그런가? 여자친구는 이런 절 보고 걱정이 없어 속편하겠다고 얘기하곤 하지만요.” “늘 걱정이 많아보이는 것 보단 낫죠 뭐. 전 주변에서 늘 그래요. 너는 쓸데없이 걱정이 많다. 생각을 좀 줄여라. 널 보고 있으면 세상에 즐거움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라구요. 전 좀 유쾌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요. 그래서, 해준씨 같은 사람을 보면 부럽던데…….” “그래요?” “네. 늘 생기있어 보이잖아요. 전 해준씨의 그런 면, 참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아, 근데… 제가 생각하는 건 별 소용이 없죠… 여자친구분이 해준씨의 유쾌한 부분을 탐탁지 않아 한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다른 사람 의견보다는 연인의 의견이 가장 먼저 존중되어야 하는거니까요.” “그런점에선 괜찮아요.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니까… 제 여자친구 역시 늘 유쾌하고, 생기있던 때가 있었는데… 아무튼 소예씨는 자신과 유쾌함이나 생기가 있는 것 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렇지 만도 않아요. 소예씨도 충분히 생기있어요.” “말도 안돼요.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정말이에요.”
해준의 빈말일지도 모를 그 말에 소예는, 저녁무렵까지만 해도 온 몸을 누르던 무기력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이, 의욕이 생겨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해준의 유쾌함은 그 자신만이 유쾌한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상대방에게도 그것을 전염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해준씨와 얘기하고 있으니 마음이 가벼워 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나는, 유쾌함이란 인공적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새로이 생겨날 수도, 완전히 소멸될 수도 있는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늘 스스로를 나는 유쾌한 사람이다. 나는 의욕적인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소예씨는 그런 모습이 더 어울릴 거에요.”
소예는 현재의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을, 그리고 그녀 스스로가 몹시도 바라왔던 말들을, 만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남자에게서 듣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했다. 그럼과 동시에 그녀의 내면에서 해준에 대한 궁금증이 몰아쳤다. 나아가 해준의 소탈하면서도 섬세하기까지한 모습에게서 호감마저 느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여러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놀라워 혼란스러우면서도, 어떤 여자가 이런 남자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준씨는 참 여러의미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제가요? 왜요?” “그건, 비밀이에요.”
소예의 느닷없는 말에 의미를 묻자, 비밀이라 말하며 한쪽눈을 찡그리는 그녀의 모습에 해준은 의아한 표정을 했고, 소예는 그런 해준을 보며 빙긋 웃었다.
“술 한 잔 하자고 하셨죠? 제가 일하는 바에 갈래요? 지금쯤이면 꽤 한산할텐데.”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해준에게 소예가 물었다. 해준은 그런 소예를 보며 그녀의 의중을 캐려는 듯 했지만 통 알 수가 없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갈까요?”
소예는 겉보기에도 이전보다 훨씬 유쾌해진 음성으로 말하며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들뜬 마음이 잔뜩 베어 있었다. 해준은, 여전히 그녀의 말의 의미를 찾으려는 듯 묘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있다가, 어린아이와 같이 이곳저곳 사뿐거리는 소예의 모습에 웃음이 나 곧,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조금 속력을 내어 걸었다. 높다란 건물이 늘어진 거리에, 두 사람의 명랑하고 밝은 웃음이 요동치며 퍼져나갔고, 그 웃음 위로 새까맣게 물이든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송이들이 천천히 한 알 한 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눈 오나 봐요!”
달뜬 발걸음으로 해준보다 좀 더 앞서 팔랑거리며 걷던 소예는, 문득 콧망울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하늘을 올려다 봤고 곧 소리쳤다. 정말이네? 소예의 외침에 해준 역시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눈을 뿌리고 있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추키고서, 한동안 별다른 말 없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