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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대한 몇가지 오해들
게시물ID : humorbest_3508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일런트힐
추천 : 38
조회수 : 4985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4/28 21:47:14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4/28 08:41:13
아래 '조선의 축소된 역사가 무엇이 있냐'에 대해 적다가 글이 길어져
리플 대신 게시물로 올립니다.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table=history&no=1032&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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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붕당정치도 있지요.
당파싸움으로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당파싸움은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도 미친듯이 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만 보면 현대 민주주의도 하면 안 되는 거지요.

오히려 붕당정치의 경우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학문적 유대나 공감을 이룬 뒤
정치적 의견을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연히 서로 견재하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면서 정치적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현대에 와서 붕당정치를 하지 않는 국가는 북한 밖에 없을 것이고
이걸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이미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요. 


또 하나 위에도 언급된 것이지만 조선 백성은 수탈에의해 언제나 고통받았다.
라는 것인데, 현대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런데 어떤 나라는 안 그럴까요?
시대의 현상을 비교할 땐 현재와 비교하는 게 아닌 당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야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백성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국가의 백성들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라고 전 생각합니다.
세금도 타국에 비해 훨씬 적었고, 군역 역시 무리한 전쟁을 감행하지 않음으로써 어떻게든 백성들에게 짐을 덜어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전쟁준비를 안 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준비를 너무해서 백성들의 반발을 너무 산 경우지요. 
백성들 입장에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전쟁 준비를
국가에서 시키니 거기에 대해 엄청난 반발이 상당했었고 선조역시 그것에 미안해했습니다.
아마 당시 군주제 국가에서 조선 왕들만큼 백성들 눈치를 본 경우가 없을 겁니다.

국방이란 건 언제나 국민들의 희생과 국고의 소비를 동반하고.
무의미하게 과도한 국방은 언제나 국민들의 고충과 재정적자로 이어지는 거지요. 
(현대에 대표적으로 북한이 있을 겁니다. 과도하게 무기사고 핵무기 만드느라 인민들이 굶고 있으니까요.)

주위의 적대 세력이라고는 왜적과 북의 오랑케 뿐이 없으니 당연히 그것에 맞춰 국방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인데,
북방을 정벌하기엔 대규모 정벌을 하려고 하면 국가적으로도 무리가 생기는데다 상대가 유목민족이니 도망가 숨어버립니다.
의미가 없는 정벌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고 쇼규모로 하려니 그들 역시 전투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 위험합니다.

결국 태평성대라는 성종 때는 북방에 대한 정벌의 거의 전무하다싶이 했고 가능한 외교로 풀려 노력했습니다.
정벌은 언제나 백성들의 고충으로 이어지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북방 정벌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가 임진란 준비를 안 해 욕먹는 선조 때이지요. 
이순신, 이일, 신립, 원균...등 임진왜란 때 인물이 모두 이 정벌에 참전했고
임진란에서 패배로 무능한 장수처럼 여겨지는 신립의 경우 이 때 500 기병으로 1만의 적을 격파하기도 합니다.

이게 거의 100년만의 실질적 성과가 있던 정벌이었을 겁니다. 
조선의 북방 오랑캐를 막아내거나 정벌할 국방력은 충분했다는 거지요.
다만 안 했을 뿐입니다. 이겨서 생기는 이득이라는 게 별로 많지 않으니까요. 
대마도의 왜적이고 북방의 오랑캐고 이기고 정벌해도 어차피 또 약탈하러 오는 놈들이 그들이니까요.

성종 때 북방의 적들이 쳐들어와 약탈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실제 4만의 군사로 대규모 북방 정벌을 실행합니다만 적들이 다 숨어버려 성과도 없이 돌아왔지요.
이 때 김극검등이 상소를 올리며 반대했었는데, 그 중 인상적인 말이 하나있습니다.

' 요행히 한 번 승리한다면 오랜 분(忿)을 쾌하게는 할 것이나,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고 재정이 고갈되게 하며 원망을 돋우고 화(禍)를 초래하게 하여 변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생업을 잃어버리게 하며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성종 252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4월 26일(신미)

이겼을 때의 통쾌함은 잠깐이나 그로 이어지는 백성의 고충은 한 없이 길어질 것이다라는 것이었죠.


이제 반대로 남쪽 바다로 가보면 삼포왜란 때(중종시기) 경상도가 한 번 크케 털립니다.
뭐, 며칠만에 진압하긴 합니다만, 수천명의 왜적에 의해 초창기에 부산포, 제포, 영등포등이 모두 함락 당하죠.
또 40년 정도 후에 을묘왜변이 다시 수천명의 왜적이 처들어옵니다. 역시 격퇴를 하긴 합니다만, 조선도 피해를 입습니다.

두 번의 왜변 때문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의 수군이 월등히 발전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대단하기는하나 기본적인 조선 수군의 인프라가 받쳐준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원균의 삽질로 조선 수군을 모두 날려버린 정유재란은 예외입니다.)
임진란 때도 조선이 육지전에서 그렇게 맥없이 밀림에도 해전에서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시 원균만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정리하면 조선 수군이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결국엔 그 부족한 부분에 맞춰 발전을 했다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어떠한 국방력도 이유 없이 필요 이상으로 강화되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또 세종, 문종이후 맥이 끊긴 조선의 뛰어난 화포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급격히 발전하고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조선의 왕이 누구든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초창기엔
그렇게 밀릴 수 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국방력이라는 것은 현 상황에 맞춰서
운영되는 것인데, 만약 그 메뉴얼 이상의 적이 쳐들어오면 당연히 밀릴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중요한 건 그 뒤의 전쟁양상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게 중요한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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