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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전술교범에 모범사례로 있는 용문산전투
게시물ID : lovestory_351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쵸이Ω
추천 : 4
조회수 : 175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6/22 16:06:51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7일부터 21일까지 육군 6사단 용문산연대 장병들이 중공군 3개 사단 2만여 명을 막아낸 전투로 미 육군 사관학교 전술교범에 모범사례로 기록돼 있다.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통해 철의 삼각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5월 공세를 펼쳤다. 이 공세에서도 중공군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격멸하고 전선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 미군을 전, 측, 후방에서 공격해 소멸시킨다는 개념으로 작전을 구상하고, 미 9군단 중앙 용문산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6사단을 주 공격목표로 선정했다. 6사단은 한달전 중공군의 대공세로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사단을 재편성, 절치부심하면서 설욕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중 특히 2연대는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결사'머리 띠를 매고 지휘관들까지 자신의 식량을 휴대해 진지사수를 다짐하면서 결전에 임했다. 중공군은 19병단 예하 63군(3개 사단)을 투입해 공격했으나 6사단 2연대는 군단에서 지원된 5개 포병대대의 조명 및 화력지원을 받아 백병전까지 하며 이를 격퇴하였다. 중공군에 의해 고립된 2연대는 10여 차례의 항공지원과 포병지원을 받아가며 이틀 동안 고지를 지킨 것이다.


그동안 용문산 후방에서 반격준비를 끝낸 6사단 7, 19연대가 5월 20일 05시를 기해 역습을 개시하자 이틀간의 전투에서 기진맥진한 중공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군에게 포위당할 것을 두려워 한 중공군은 21일 새벽 북한강 이북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로 국군은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의 피해를 입은데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전사라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참전 장병들의 기록을 보면 복부에 무수한 파편상을 입고도 콸콸 쏟아지는 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죽어라 방아쇠만 당겼고, 오른 팔에 총을 맞으면 왼손으로 당기고 두 팔을 다 못쓰게 되면 이빨로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서 발로 차 굴렸다고 하니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용문산 전투는 극한상황 속에서 오직 조국수호의 일념으로 이룩한 한국전쟁사의 쾌거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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