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인생사 새옹지마 (싸가지 없음 주의)
게시물ID : soda_3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재와빨강
추천 : 18
조회수 : 3357회
댓글수 : 22개
등록시간 : 2015/08/14 03:33:14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멘붕게시판 옆에 제짝처럼 사이다 게시판이 있어 살포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 봅니다.

1. KTX


당시 전 금요일만 되면 한양으로 백일장을 치르러 가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백일장이 으레 그렇듯, 신청만 하면 시험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고, 예선을 통과해야 본선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 해엔 이상하게 문장의 신이 접신이라도 하셨는지 예선이란 예선은 모조리 통과해서 저는 매주 서울로 올라갔었죠.
아무래도 부산과 서울은 너무 먼 거리여서 KTX를 탄 뒤에 학교 인근 모텔로 가서 숙박, 다음 날 아침 시험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네트워크상에 몇 번 올라온 적 있는 이야기 입니다.
아이만 좌석 끊어놓고 엄마는 입석으로 끊어서 옆사람 눈치 주는 이야기.

네 제 이야기였습니다. 그저 지난 기억의 편린으로 놔두었던 그 일을 꺼내볼까 합니다.
으레 시험을 보기 전 긴장을 하곤 하지만 전 익숙한 일이라 능숙하게 책과 아이폰을 꺼내 기차의 움직임을 리듬으로 승화시켜 책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상하게 살짝 시끄러워야 집중이 잘 되더군요.
기차는 부산을 떠나 밀양으로 향했고, 밀양역에서 어떤 아이가 제 옆에 앉게 됩니다. 아이는 태연하게 엄마를 보며 묻습니다.

- 엄마는?
- 엄마는 밖에 있을 거야.

눈으로 들어오는 문장 사이에 섞여 제 귓속을 파고들어, 문장을 저장해야 했을 제 머릿속에 암덩어리처럼 스멀스멀 박히던 두 사람의 대화.
하지만 그땐 아무 생각 없었습니다. 설마 알바할 때 자주자주자주자주 보았던 진상은 아닐꺼라고 생각하며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답답한 탓인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앞좌석을 발로 차서 앞에 있던 아저씨가 역정을 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 엄마가 들어오셔서는 아이를 달래곤 하셨는데, 계속 저를 힐끔거리는 겁니다.
대놓고 양보해달라는 못하겠고 눈치만 준거겠죠.

뭐, 저도 그냥 양보해주면 그만이긴 했습니다. 그냥 밖에 앉아(KTX는 간의 좌석이 있는데 거기가 은근 조명이 밝아서 책 읽기 수월했었거든요) 책을 읽어도 상관 없었어요. 나중에 대구를 막 지났을 때, 아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시끄러운 나머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상태였구요. 재생리스트에 팝송이나 중국노래만 가득했지만 가사 있는 노래는 가독성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으니 빗소리를 켰었습니다. Rainymood 개꿀

박모가 시작되는 시간대의 아주아주 맑은 하늘이었지만 귀에선 빗소리가 흘러 나오는 기이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누가 제 어깨를 툭툭 치는 겁니다. 아이의 어머니셨습니다.

- 저기, 저희 애 때문에 그런데 자리 좀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솔직히 저런 부탁 한다면 좀 공손하게라도 말하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했을까요. 자존심에 스크래치라도 생길까요.
진짜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너는 당연히 자리를 양보해줘야 한다 식의 분위기와 말투를 저에게 시전하시는데
순간 저도 욱 하는 성질에

- 제가 왜요?

해버렸습니다. 그분은 흡사 보스몹을 잡았는데 레어템이 안 떨어져서 상황 판단이 흐트러진 MMORPG게임의 유저처럼 얼굴이 구겨졌습니다.

- 애가 계속 우니까...

라고 하시길래 그냥

- 애가 우는 건 그쪽 사정이고요,

라고 말을 끝낸 뒤 전 그냥 이어폰을 꽂고 책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께서 제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을 빼더라고요.

- 학생 가정 교육 그렇게 받았어요?

??????????????????????????????????????????
두 눈에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 어머니를 얼척없이 쳐다보았습니다. 

- 아니 내가 이렇게 까지 공손하게 부탁하는데!

아니 존나 현빈이세요? 순간 그 상황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 적어도 아주머니처럼 행동하라고 교육 받진 않았는데요?

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근처에서 풉- 하고 웃는 건 덤이었구요. 그 아주머니, 주변 시선 의식했는지 아니면 건너편에서 단말기 들고 걸어오는 승무원 때문이었는지 앉았던 연결칸으로 돌아가시더군요.

사실 아이 때문에 귀찮거나 한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이는 자거나, 동화책 읽거나 그랬지 수시로 들락거리는 아주머니가 더 거슬렸어요.
혹은 고삼이었던 그 때, 스트레스때문에 제가 예민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2. 하늘이시여


당시 명동이랑 회현 넘어가는 사이에 게스트하우스를 잡고 전 홍대로 놀러갔었습니다. 이때도 백일장 때문에 갔다곤 하지만 솔직히 이땐 70%가 놀러가는 심정이었으므로;;;;

아는 형님께서 앨범을 내셔서 홍대에 위치한 소규모 공연장에서 공연한단 소식을 듣고 달려갔었죠.
아무튼 홍대입구 9번출구에 내려서 상상마당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절 잡습니다.

- 학생~ 얼굴이 선해 보여서 그런데

...
머릿속에선 나는 무신론자인데 대체 왜 이런 사람의 설명을 듣기 위해 나는 내 시간을 허비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라고 1초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했던 방법이 생각났었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라

저는 아주아주 쪽팔렸지만 그걸 수행하려고 했습니다.

- 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솔직히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이것뿐이었습니다.

- 응? 학생 뭐라고? 일단 하나님이...

- 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스타카토로 뚝뚝 칼국수 면발 끊어지듯 끊어서 말했습니다. 솔직히 이때까진 쪽팔려서 목소리 크게 못 냈어요.

- 그러니까 내 말은 하나..ㄴ....ㅣ...

- 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진짜 큰소리 더하기 스타카토 더하기 눈 부라리기 시전하니까 이 아주머니 헐레벌떡 다른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제 얼굴은 빨개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장도 벌렁거렸습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날 홍대에서 저 보셨던 분들은 제발 잊어주세요.


아무튼 위 두 사건 다 고딩 때 일어난 일이네요. 암튼 파란만장한 고삼이었습니다.
백일장 안 보내줘서 담임이랑 대판 싸우고 예심신청서 들고 교장실 찾아간 일도 있었고(그리고 그 대회에서 상탐!)
옛날에 멘붕게에 썼던 식중독 사건도 이때 일어난 일이었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사 새옹지마는 참 명언인 듯 합니다.
출처 제 인생입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