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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스압] 4월의 여왕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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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GeeSongPak
추천 : 1
조회수 : 123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9/17 20:30:00

4월의 여왕


새 학년이 시작된 교실의 풍경이란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이 방학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온 교실이 떠날 듯 시끄러워야 할텐데 지금 이곳의 풍경은 너무나 낯설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은 기억 속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만, 반 교실에 냉랭히 흐르고 있는 대화의 은밀함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올해 4월의 여왕은 누가 될까?'


2학년 교실 전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우연히 마주치면 몰라볼 정도로 예뻐진 모습이나,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수술자국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오늘 2학년이 된 학생들 모두가 미스코리아나 모델선발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희영아, 설아 좀 봐. 코 높이고, 턱 깎고, 지방흡입술까지 한 것 같애. 장난 아니다."


옆에 앉은 단짝 미주는 몰라보게 예뻐진 설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쌍꺼풀 수술 했잖아?"


미주가 쌍꺼풀 수술하기 전에 지금이 훨씬 예쁘다며 말렸지만, 미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난 어색한 친구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를 하고 있다.


"주위를 한번 둘러봐. 쌍꺼풀 수술은 수술도 아닌걸 뭐. 너도 봤잖아? 쌍꺼풀 하러 갔을 때, 병원 대기실에 앉을 자리도 없었잖아."


미주를 따라갔던 성형외과는 우리 또래의 여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고, 얼굴에 붕대를 감거나  큼직한 반창고를 붙이고있는 여학생들이 모두 우리 학교의 같은 학년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때,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사람들의 값싼 호기심과 우연이 합쳐지며 만들어진 4월의 여왕이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있나 하는 것과 4월의 여왕이란 철저한 불행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불행마저도 그들은 단순히 부상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이어트라도 해야지 이러다 우리 학교 폭탄되는 거 아닌지 몰라."


미주는 주변을 왔다갔다하는 동급생들의 모습을 연신 훔쳐보며 말했다.


"어차피 우연일 뿐이고, 소문일 뿐이잖아.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우연이 12번이 계속될 수 있어? 그리고 12번씩이나 계속된 우연은 이미 우연이라기보다는 법칙이야."


교실 앞문이 열리며 복도를 걷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듯한 중년의 아저씨가 출석부와 다른 몇 가지 서류뭉치 같은 것들을 들고서는 교실로 들어섰다. 저 사람이 담임이겠군...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누가 담임이 되든 학교생활은 늘 그저 그랬으니까. 교탁 앞에 선 담임은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하고 출석을 한번 부르고는 의미심장한 헛기침과 함께 학년초 훈시를 시작했다.


"너희들도 오늘 2학년 전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꼈을 거라고 본다. 이 반도 그런 것 같군."


그는 곳곳에 아직 수술자국이 얼굴에 남아있거나 반창고를 붙이거나 붕대를 감고있는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난 도대체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 12년전부터 매년 2학년중에 한명이 4월 1일에 사고로 죽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죽은 학생이 2학년 중에서 가장 예쁜 학생이라니! 그리고 죽은 학생들을 4월의 여왕이라고 부르며 이 말도 안되는 소문을 너희가 믿고있다는 것은 너희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선생님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아니, 믿고 안 믿고는 너희들 자유니까 뭐라 하지 않겠다. 하지만, 지금 너희들의 모습을 한번 봐라. 지금 서로 죽으려고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뭐야?"


그의 부릅뜬 눈과 단호한 말투는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듯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부추길 뿐이었다. 소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담임은 출석부로 교탁을 내리쳤다.


"그래서, 학교측에서는 오늘부터 일체의 성형수술을 용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 성형수술을 하는 학생은 제적이다."


담임의 격앙된 목소리 때문이 아니더라도 학교측의 처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학교는 거대한 성형외과 병동처럼 되어 버렸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교문 밖은 우리들의 첫 등교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미주와 함께 '조용한 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학교에서의 끈적끈적한 불쾌감이 조금씩 씻겨지는 상쾌함을 느꼈다. 미주와 내가 이 '조용한 길'을 중 2때 발견한 건 커다란 행운이었다. 우리가 이름 붙인 대로 이 길은 조용했다.


수년을 이 길을 통해 하교를 했지만, 사람과 마주쳤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차가 지나가는 일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좁고 포장이 안 된 길이지만, 적막함에 가까운 고요함과 잘그락잘그락거리는 자갈 밟는 소리는 하교를 즐겁게 해주었고, 그 즐거움은 이 길을 발견한 것이 삭막한 세상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선물이라고 느끼게 할 정도였다. 삭막한 세상이라...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미친 세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난 답답한 마음을 미주와 나누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뭐가?"

"4월의 여왕 말이야. 작년을 기억해 봐. 우리가 1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소동은 없었어. 수진이 선배가 집에서 키우던 개한테 물려 죽었을 때,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모여들긴 했지만, 작년엔 학년초부터 이렇게 매스컴의 관심을 끌진 않았잖아. 그리고, 지금 3학년 선배 중에 성형수술 했던 사람 있었어? 간단한 쌍꺼풀 수술 정도야 방학 때면 늘 몇 명은 하던 거고. 근데 올해는 왜 이럴까?"


"그 대답은 아침에 말해줬잖아. 법칙이 되었다고...작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을 거야. 하지만, 작년에도 어김없이 수진이선배가 4월 1일 사고로 죽음으로써 확신으로 바뀐 거야. 올해도 가장 예쁜 사람이 4월 1일날 죽을 거라는..."

"하지만, 정말 바보 같지 않아? 예쁘다는 데 기준이 어디 있어? 보기에 따라 다른 거 아냐?"

"아니야."


미주의 끊어내는 듯한 말투에 적잖이 놀랬다.


"12명의 선배를 생각해 봐. 사진으로밖에 못 봤지만, 얼마나 예뻤어? 아니, 예쁘다는 말보다 확연히 다르다는 말이 어울리겠지."


미주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 11명의 선배는 제쳐두고서라도, 작년에 복도에서 마주친 적 있는 수진선배의 모습은 같은 여자이지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4월의 여왕을 선발하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의 심미안은 정확했다.


나도 어느새 4월의 여왕을 인정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주가 '조용한 길'이 끝나는 길모퉁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기에 눈에 익은 D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 남자친구인 대명이와 미주의 남자친구, 아니 애인인 진성이었다. 진성이를 보고 한껏 밝아진 미주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희는 아직 그 상태야?"

"그렇지 뭐."

"대명이도 D고등학교에서는 알려진 킹카쟎아. 저 정도면 네 애인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은데..."

"너희는 정말 사랑해?"

"그럼, 난 진성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진성이도?"

"...그럼, 진성이도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잠시의 머뭇거림을 난 놓치지 않았다. 진성이는 누군가에게 확신을 줄 타입이 아니란 걸 처음 만나던 날부터 알 수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왼쪽 귀를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겉도는 눈빛 때문이었다. 이런 진성이와 매사에 모범적일 것 같은 대명이가 둘도 없는 친구사이라는 걸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 누구라도 알기 힘들 것이다. 대명이만큼 스포츠머리와 무테안경이 잘 어울리는 또래를 아직 본 적이 없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오고간 뒤, 진성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미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자신의 하숙집이 있는 골목으로 미주를 데리고 갔다.


뒤에 서있는 우리는 의식도 하지 않은 듯 그는 연신 미주의 귓가에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뜨뜻한 입김이 내 귀에 닿는 것 같아서 잠시 오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둘의 뒷모습이 골목길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되자, 부럽게 바라보던 대명이가 그제야 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둘, 정말 보기 좋지?"

"왜, 부러워?"

"아니, 부러운 게 아니라..."

"그만 둬. 넌 거짓말이 체질적으로 맞질 않으니까."

"그런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대명이는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H아파트의 놀이터로 갔다. 삐거덕삐거덕 하는 그네소리만이 노을에 물들고 있는 놀이터를 감싸고 있었다.


"오늘 너희 학교 분위기 어땠어? 4월의 여왕 때문에 난리지?"


이런 좋은 분위기를 하필이면 그 이야기로 깨뜨리다니...


"왜? 너도 관심 있어?"


대명인 두 손을 요란스럽게 내저으며, 내 눈빛을 무마시키려 했다.


"아니야. 관심은 무슨... 요란하게 신문, TV에서 떠들어대고, 우리 학교에서도 애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니까, 그냥..."

"무슨 얘기를 하는데?"

"누가 4월의 여왕이 될 것 같다 뭐 그런 거..."

"누가 될 것 같대?"

"난 잘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표정을 짓는 대명이의 모습. 이럴 땐 대명이의 손을 꼭 잡아주어야 했다. 우리는 밤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다.


"어제 TV 봤어? 어제부터 4월의 여왕에 대해서 특집방송을 시작했잖아."


지금 교실은 어제부터 시작한 '4월의 여왕, 그 영광과 저주'라는 황당한 제목의 방송이야기로 한창 떠들썩하다. 학년이 처음 시작했을 때 온 학교를 휘감고 있던 이상기류가 아이들의 성형수술한 얼굴에서 부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잠잠해지기를 바랬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 이상기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그 파장을 더욱 넓히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우리 학교가 있었다.


"희영아, 너도 어제 그 방송 봤어?"

"한 십분쯤 보다 말았어."


십분 정도 보는데도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4월의 여왕이 되어도 어울림직한 예쁜 아나운서가 학교 정문에 서서 얼굴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이야기를 자신만 아는 무서운 이야기를 친구한테 얘기하는 것처럼 다양한 포즈와 표정으로 설명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하지만, 12년 동안 4월의 여왕이 되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씩 모자이크 처리된 채 클로즈업되었을 때 저녁식탁에서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더욱 비위를 거슬렸던 것은 가족들의 반응이었다. 나이가 어려 철이 없는 남동생은 그러려니 해도,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옆에서 열띤 목소리로 어제 방송의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는 미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어?...어. 어디까지 말했어?"

"얘는... 경아 선배의 어머니가 인터뷰에 나왔다고 했잖아."

"아, 그래? 뭐라고 하던데?"

"아름다운게 죄라고 하면서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경아를 기억해주는 건 고맙다고 했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경아 선배는 우리가 입학하기 두 해 전, 하교길에 벌떼에 쏘여 죽은 선배다. 이 지역에서는 그런 벌떼들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출현한 적이 없다고 했고,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마치 벌떼들이 경아 선배만 노린 것 같다고 했었다. 온 몸이 벌에 쏘여 퉁퉁 부은 채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딸의 모습을 벌써 잊은 것일까? 아니면, 딸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보다도 4월의 여왕이 된 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큰 것일까?


"오늘 저녁엔 경아선배의 애인이었던 사람과 친구들이 나올거라고 예고했어. 진짜 재미있을거야, 그지?"


난 미주의 얘기에 지치기 시작했고, 우리 둘의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너 진성이랑은 어쩔 거야?"


사실 이 이야기를 한 번은 꼭 진지하게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좀더 조용하고 은밀히 얘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지만, 교실의 다른 아이들은 전부 4월의 여왕 이야기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어쩔 거냐니?"


미주는 천연덕스럽게 반문을 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둘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보이고 싶지 않는 문제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다.


"우린 아직 어리잖아.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만 둬. 넌 사랑을 아직 안 해봤기 때문에 이해를 못해."


미주의 목소리톤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지만, 나 역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 대화가 끝난 후 미주가 다시 안 보려한다고 해도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잘못된 곳으로 웃으며 걸어 들어가는걸 그냥 볼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해서, 진성이가 그렇게 좋은 애라는 생각이 안 들어."


미주가 벌떡 일어서서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무조건 화만 내지 말고, 앉아서 차분히 얘기해."

"얘기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너만은 좋은 친구라고 생각을 했는데 내가 착각을 했나보구나."

"미주야! 그래, 좋은 친구니까 이런 이야기도 하는 거야. 우린 정말 좋은 친구잖아. 그 우정을 걸고 말하는 거야. 제발 듣기만이라도 해 줘."

"아니, 들을 필요 없어. 너랑은 이제 끝이야."


내 유일한 친구의 뒷모습에서 익숙하면서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목덜미를 움켜잡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단호했던 결심은 금새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난 미주의 뒤를 따라가서 팔을 잡았다.


"이것 놔!"

"알았어. 앞으로 다시는 진성이에 대해서 뭐라고 안 할께. 용서해 줘. 응?"


눈물이 어리고 있다는 걸 미주가 보았을까? 미주의 얼굴이 친구의 얼굴로 돌아왔다.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진성이나 나나 어린아이가 아니야.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진성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야. 얼마나 사려 깊고 착한데...그러니까 걱정하지마. 자, 눈물 닦아."


미주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지만, 어깨를 두드려주는 미주의 손길이 '그래,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감정이 가라앉은 후 자리에 앉은 나는 우리 둘에게 전혀 관심조차 보이고 있지 않는 반 아이들을 보았다. 급우 두 명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말던 상관없이 4월의 여왕 이야기만 하고 있는 그들이 유령으로 보였다. 모두들 말라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도시락을 먹거나 매점을 가는 학생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매점에서 빵이라도 먹고 있으면, 1학년 후배들과 3학년 선배들이 나의 2학년 명찰과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고는 역앞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를 보듯이 한다.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을 때는 반 아이들이 반찬냄새를 풍기는 나를 사탄 보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오늘도 미주와 같이 잔디밭에 앉아서 햇살을 받는 것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있다. 난 점심만 굶는다 치지만 미주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아예 곡기를 끊은 듯 했다. 퀭하니 움푹 패인 눈가와 깎아버린 듯한 볼.


4월 1일, 그 저주받은 날이 속히 와야 했다. 이런 날이 계속되다가는 4월 1일이 오기 전에, 누군가 4월의 여왕이 되기도 전에 몇명은 죽어나갈 것 같았다. 미쳐있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방송과 신문의 광기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적나라하게 공개된 역대 4월의 여왕들의 얼굴과 신체사이즈. 방송에서는 직계 가족의 동의를 모두 얻었다고 했고,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정당성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하나뿐인 친구 미주다. 살며시 잡아본 미주의 팔뚝은 마치 작대기 같았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잔디밭에서 일어나려던 미주가 휘청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부축을 했음에도 미주는 똑바로 서지를 못했다.


"안 되겠어. 양호실로 가자."


미주를 데리고 양호실로 들어섰을 때, 전쟁 중의 야전병원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침대에도, 바닥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 위에도 빽빽이 학생들이 누워있었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이사이 틈이 있는 곳에는 모조리 학생들이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어떻게 왔어?"

이런 상황에서도 양호선생이란 여자는 여유 있게 여성잡지를 읽고 있었다.


"얘가 좀 어지러워하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우리의 명찰을 한번 보더니 다시 보던 책으로 눈을 돌렸다.


"영양제 같은 거 안 먹을 거지?"

"예."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미주가 먼저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면 앉아서 좀 쉬다가 가."


어이가 없었다. 앉아서 쉴만한 자리도 없었거니와 양호선생이란 사람이 머리에 손도 한번 짚어보지 않다니...


"끝이에요?"

"뭐가?"


그녀는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할 필요를 느꼈다.


"아파서 왔잖아요? 근데 진찰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쉬라니요? 양호선생님이란 자리가 그런 자리인가요?"


그녀가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미안함 따위는 없었다.


"요즘 양호실에 몇 명이 오는 줄 알아? 지금 보고 있지? 그리고, 이 애들 중에서 주사나 약을 먹으려고 하는 애들이 있는 줄 알아? 그냥 쉬려고 오는 거야. 그 애들한테 '병원에 한 번 가봐라'라고 말하면 병원에 갈 애들이 있겠어? 상황이 이런데 뭘 할 수 있겠어?"


여기까지만 말했으면 나름대로 그녀의 행동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심각한 현기증에 빠뜨리게 하고 말았다.


"예뻐지는 게 쉬운 줄 알아?"


미주를 데리고 양호실을 나와서 교실로 돌아올 때까지도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 중인 교실의 문을 열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모습은 잔인한 현실을 제대로 각인시켜 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선생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수업 아닌 수업이 끝이 나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언제 엎드려 있었냐는 듯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4월의 여왕... 4월의 여왕... 귀를 막았다.


"전문가들이 뽑은 4월의 여왕에 뽑히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코 높이고, 턱 깎고, 지방흡입술을 한 설아가 TV에 나오고 있다. 안락한 소파에 부모님의 사이에 앉아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각 방면의 미(美)와 관련된 전문가들이 뽑은 4월의 여왕이라고... TV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너무 어이가 없어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기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네요."


설아야, 제발 웃지 마. 제발 그런 표정 짓지마.


"같은 여자이지만,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아버님의 기분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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