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인터뷰입니다...역시 보통사람은 아닌 듯.. ----------------------------------------------------------------------------------------------------- 며칠 전 임재범이 새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음반을 내는 것은 4년만의 일이요, 공연 무대에 오르는 것은 솔로 데뷔후 처음이다. 솔로 데뷔가 1991년이니 13년간 한번도 무대에 서지 않은 것이다. 그의 마지막 무대는 88년 88체육관에서 열린 아시아나(임재범-김도균의 밴드)와 일본 메탈밴드 라우드니스의 합동 공연이었다. 라우드니스는 80년대 중반 우리나라 메탈 밴드들(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이 모두 으르렁거리던 라이벌 밴드였다. 심지어 부활 1집 커버에는 "라우드니스를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는 말까지 쓰여있었다.
하여튼 당연히 나의 관심은 임재범과의 인터뷰였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9월 23일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다. 이럴 때 죽기살기로 매달려 단독 인터뷰를 따내는 게 기자들 사회에서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능력>으로 취급받는다. 나는 능력있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엄청 매달렸다.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임재범을 구슬렀다. 그는 기자회견 전날 나를 만나주었다.
그는 솔로 데뷔 후 온갖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솔로 데뷔 직전 SBS FM에서 그가 <임재범 신애라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진행할 때, 그는 당시 프로듀서인 윤 모 PD에게 단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어느 날 사라졌다. 매니저도 그가 어디 갔는지 몰랐다. 또 1집을 내고 나서는 산 속에 들어가 1년을 살았다. 2집 내고도 조금 있다 사라졌고, 3, 4집 때는 아예 음반만 나오고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소문들(그 중엔 확인되지 않았으나 여러사람이 그렇다고 믿고 있는 소문도 꽤 있다)은 그의 이미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가 실력이 없다면 그의 奇行도 화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재범의 보컬은 한국 록 발라드의 새 지평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시나위 1집에서 불렀던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나 <비상>, <사랑보다 깊은 상처>, <너를 위해> 같은 노래를 그의 모습을 보며 듣고 싶어했던 팬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그는 "7년만에 처음 하는 인터뷰"라고 했다. 그것은 7년 전 그가 2집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간간이 활동을 했던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 7년만의 인터뷰를, 신문에 모두 싣기엔 지면이 너무 좁았다. 게다가 오늘 갑자기 지면에 변화가 생겨,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양의 기사만 쓸 수 있었다. 여기에 내 수첩에 옮겨 적은 그와의 대화를 가능한 모두 기록한다.
임재범은 "왜 그간 일체의 인터뷰나 방송출연을 거부했느냐"는 질문에 긴 대답을 했다. 그러나 대답 말미에 "이건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처음 그가 한 말은 옮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고 내가 있을 곳은 무대"라고 했던 말 만은 기록해두고 싶다.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인터뷰에도 응하고 기자회견도 자청했으며, 심지어 솔로 데뷔 후 처음으로 공연을 할 생각을 했습니까.
"사실 이번 기자회견도 처음엔 반대했습니다. 음반 냈다고 팔아달라고 하는 게 싫거든요. 그렇지만 이번 기자회견을 하기로 한 것도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활로 들어가고 있다고나 할까요. 나는 돈을 버는 행위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도 가난하죠."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모든 종교를 다 거쳤어요. 지금은 종파를 불문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게 된 건, 옷을 사고 음식을 먹고 또 생활을 유지하면서 사는 바쁜 세상에서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었습니다. 사실 음악에 진짜 빠져있던 것은 아시아나때가 끝입니다. 소리를 찾느라고 애쓴 건 그때까지라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밥 먹고 싸고 한다는 것이 모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에게 영(靈)이 있다는 데 그 영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이런 게 청소년때 오는 건데 또 오는 바람에 나를 흔들고...처음엔 음악이 그런 식으로 다가왔죠. 그래서 인도와 아랍의 종교음악 같은 제3세계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도대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족할 수가 없더란 거죠. 아무리 그래도 여기, 대한민국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마음의 도피처를 찾다가 행동으로 이어져버린 거죠. 그래서 불교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이슬람교에 또 빠졌어요. 경전을 모두 읽었죠. 저는 원래 천주교예요. 그런데 형식이 너무 딱딱해서 좀 자유로운 걸 찾은 게 기독교였죠."
--1집부터 워낙 인기가 있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음악을 하다보면 영혼을 건드리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레드 제플린과 비틀스 모두 인도에 갔었잖아요. 방황을 제가 만든거죠. 누가 하라고 한 적도 없고요. 그리고 한 편으로 제 자신이 두려움이 많았어요. 사실 너 노래 좀 하는구나 하는 인기에 착각해서 그걸 이용해 살았다면 편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죠. 후회는 안해요."
--그런 방황이 언제 시작된 건가요.
"고 2때부터 뭔가 진동이 왔어요. 그때 시작해서 아직도 사실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어느 순간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지더라구요. 사실 다 똑같은 거고, 다 어느 선쯤에서 공존해야 되는데, 그걸 못견디고 뛰쳐나간 거죠. 그 방황 속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리는 방법'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모르니까 내가 하는 일에 책임을 못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방황을 마무리하면서 대중 앞에 나서기로 한 셈이네요.
"왜 네가 하던 방식대로 하지 또 바꾸냐고 묻는다면, 현실은 현실로 인정해야겠더라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육체는 대한민국 서울에 있고 인간이 분류한 직업으로는 가수이자 서비스업이고, 세살 난 딸의 아빠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한 가정을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매니저가 너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음반 내놓고 기자도 안 만나고 내가 만든 정신적 공간에서 현실이 맘에 안 든다고 도피해있었으니까. 여지껏 내가 원한대로 살았으니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 보이는 사이 산 속에 있었다는 말이 가장 많았는데요.
"오대산에 간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1집 내고 매니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스케줄 빡빡하게 하기 싫다. 그렇지만 약속한 스케줄은 지키겠다고요. 그런데 한달 동안 하루 스케줄 3개씩 잡혀있었어요. 그렇게 하기 싫다고 했는데 말이죠. 물론 그때 누구나 다 그렇게 할 때입니다. 그래서 사라졌죠. 다들 미친놈이라고 했어요. 음반이 60만장이나 팔렸고 인기도 급상승하고 있는데 다 버리고 사라지니까. 그렇지만 버리면 어때요. 그래서 오대산에 가서 아는 분 소개로 한 농장에 1년간 살았어요. 빈 집이었죠. 거기서 밥 해먹고 그냥 혼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악산에도 가긴 했는데 밑에서 감자부침개 먹고 내려왔고, 계룡산 절에도 갔었죠. 지리산에 저와 동갑내기 스님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가기도 했었어요. 그렇지만 오대산처럼 오래 있지는 않았죠. 어떤 기자는 제가 외계인과 만났다고 쓰기도 했는데, 사실 만나고 싶어요. 물어볼 게 많아서요."
--방송 DJ를 하다가 생방송 도중 사라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솔로 데뷔하기 직전인 90년 가을일 거예요. 신애라씨와 함께 <임재범 신애라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이란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프로그램도 처음엔 내가 할 게 아니라고 고사했는데, 하도 부탁을 해서 한 겁니다. 생방송 도중 사라진 건 아니고, 담당 PD에게 아무 말 없이 어느날 그만 둔 거죠. 지금 같으면 이러저러해서 그만두겠다고 하겠지만 그때는 그냥 마음이 시키는대로 먼저 행동해버린 거죠."
--그럼 지금은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어디에 사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주 평범하게 삽니다. 애 기저귀 갈고 분리수거 꼬박꼬박 하고...누가 날 알아보는 게 너무 싫어요. 길에서 '쟤 임재범이래'라는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떨어져요. 유명해지고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건 사회가 만든 굴레죠. 거부한다기 보다 그냥 저는 음악만 좋아하는 거죠. 알려지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이젠 프로페셔널답게 음악도 하고 사생활도 하고 그렇게 사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단독 공연은 처음인데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88년 라우드니스와 합동 공연 이후 처음이죠. 그간 보여드릴 자신이 없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지금도 설 자신은 없어요. 그렇지만 더 늙기 전에 한번은 해야 될 것 같아서요. 많이 긴장됩니다. 그렇지만 안 그런척 하려고 합니다. 정말 잘 하고 싶어요."
--유명해지기 싫어하는 것은 자유지만, 팬들에겐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많이 기다려줘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공연장 와서 화를 내셔도 좋습니다. 그간 쌓은 것을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무대가 될 거예요. 거기 오셔서 답답하고 섭섭한 것 푸셨으면 좋겠어요."
--음반을 들어보니 헤비메탈에 대한 애착이 아직도 느껴집니다. 80년대 메탈 리프도 많구요.
"남아있는 앙금이 있죠. 아시아나때 도균이(김도균)와 영국에서 고생을 진짜 많이 했어요. 한국 라면이 너무 비싸서 일본 라면에 감자 썰어넣고 버터도 넣어서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죠. 차이나타운에서 파는 김치가 있긴 했는데 그렇게 썩은 김치는 세상에 없을 거예요.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죠. 저더러 공부하러 영국 갔다고들 하는데, 그건 아니구요. 도균이가 꼬셔서 간 거예요. 도균이가 거기서 카마인 어피스도 보고 지미 페이지도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사정해서 비행기표하고 달랑 200불 들고 건너간거죠. 그러면서 그쪽 친구들과 함께 연주도 하고...사실 헤비메탈계에서 솔로로 나온 것이 배신이라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것이 산 속으로 들어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어차피 돈 못 벌 거면 같이 고생할 걸...사실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게 된 것 같아요. 앨범 속에 메탈을 넣어서 내는 것이 그 사죄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연히도 시나위 출신의 서태지와 임재범 둘 다 언론을 기피하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서태지의 경우 컴퓨터 믹싱에 몰두해 한국에서는 아무도 내지 못했던 사운드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나요?
"서태지의 사운드는 정말 훌륭한 작업입니다. 저도 하드코어를 좋아하지만 내 능력이 못 미칩니다. 제가 흥찬이(크래쉬 보컬 안흥찬)를 좋아하지만 제가 흥찬이와 비슷한 소리를 내면 흉내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90년대 중반까지의 롹 보컬 밖에 안될 것 같아요. 창법이나 음악적 해석은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방송 출연을 기피하는 이유는요.
"저는 방송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어요. 어떤 면에선, 착각하기 좋은 무대가 방송이죠. 내 인기가 이렇게 높구나, 내가 이렇게 노래를 잘 하는구나 하고 말이죠. 저를 방송에서 보고 싶어하는 팬들에겐 잘못이 없죠. 자기 생활을 하면서 내 음반을 사고 듣는 분들은...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한다면 적절한 프로그램에 나가겠습니다."
--이번엔 몇 곡이나 쓰셨나요.
"전곡을 프로듀서(최남욱)와 함께 공동작업했습니다. 8, 9, 10번 트랙(Sixth Chapter, Key, 사람과 사람들)의 가사를 제가 썼구요.
--그간 여러 가수들에게 "임재범과 비슷한 보컬"이란 말을 칭찬 대신 썼는데, 그런 표현을 들었을 때 어떻습니까.
"그 질문을 언제쯤 할까 했어요. 솔직히 처음엔 기분이 좀 나쁘더라구요.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죠. 그리고는 그 가수들에게 관심이 가요. 김동욱, 박효신, 휘성 같은 후배들 말이죠. 어떤 부분은 저보다 낫기도 하구요. 김동욱은 재즈 냄새 나는 노래들이 좋구요. 박효신은 어린 나이에 그런 소리를 소화하는게 대단해요. 그렇지만 감정적인 오버는 좀 줄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중 휘성이 가장 돋보이는 것 같아요. 휘성은 가능하면 진성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해서 높이 평가해주고 싶어요."
--요즘 듣고 계신 음악은 어떤 게 있습니까.
"지금도 전통음악을 많이 들어요. 인도와 티벳의 전통 음악 같은 것 말이죠. 이제 요즘 음악도 좀 들어야죠."
--악기를 연주하는 게 있으세요.
"저는 악기를 다룰 줄 몰라요. 그냥 코드 진행 정도 하는 거죠. 무대 위에 올릴 수준은 전혀 아니구요. 그렇지만 누가 코드로 곡을 만들면 즉석에서 멜로디를 만드는 재주는 있어요. 그 멜로디가 거의 음반까지 살아남지요. 그게 제가 받은 달란트(재능)인 것 같습니다."
임재범을 만난 뒤 든 느낌은 그가 무척 밝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말수도 적지 않아 인터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스스로 느리고 불편하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가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쩌면 지금 그의 '변신'은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인터넷을 변소로 아는 이들이 그를 또 찧고 빻겠지만, 나는 그를 두둔하는 쪽에 설 생각이다. 참고로 이번 음반에 <사랑보다 깊은 상처> 같은 발라드 명곡은 도드라지는 게 없어 보인다. 다만 <Sixth Chapter>나 <Key>, <사람과 사람들> 같은 메탈 곡은 80년대 메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매우 반가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