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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위해 재차 권하는 독도의 역사
게시물ID : sisa_302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7418523
추천 : 3/17
조회수 : 497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07/06/27 21:37:34
"평화의 해"로 바꾸자고 제안한 노 대통령의 숙취 해소를 위해
2007-01-09 11:21:05 기사돌려보기인쇄하기

먼저 본 글은 동해를 “평화의 해(平和海)”로 바꾸자고 일본 총리에게 제안한 노무현을 위해 2006년 4월 26일 데일리안에 실었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권하는 독도의 역사”라는 제하의 칼럼을 혀만 가지고 사는 노무현을 위해 원문 그대로 다시 전재(全載)하는 글입니다. 오늘 단군 이래 지켜오고 불러온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동해를 쓸개 없고 세치 혀뿐인 노무현이 일본 아베 신조 총리에게 “평화의 해(平和海)”로 부르자는 제의를 한 것은, 김대중에 이어 사실상 대한민국의 영토를 일본에 진상한 것으로, 현대판 이완용에 다름 아니다. 발표를 보면, 노무현 자신은 미래를 선도하는 평화의 선지자인양, 통 큰 정치랍시고 일본과의 선린우호를 위해 평화의 바다로 명명한 모양인데.......술 취한 노무현은 그렇다 쳐도, 대저 청와대 참모들은 뭣에 쓰는 물건들인가? 이것은 청와대 참모들이 원숭이들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동면에 든 개구리들도 벌떡 일어나 밥통들이라며 웃을 일이다. 대저 평화와 선린우호가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상호간 선린우호는 상대에게 어느 일방의 일방적인 강요는 물론 양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 정확한 실체를 알고 그 실체를 인정한 후 이해와 양보를 통해 공존하는 것이다. 특히 언젠가 국경이 사라지고,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될 한·중·일 삼국의 미래를 위해 정확한 역사에 의한 상호 인정은 선린우호의 든든한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식 선린우호는 당장은 물론 미래세계에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며, 노무현이 대통령의 자리에서 하야 일본으로 망명할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2006년 4월 26일 데일리안에 실었던 글을 다시 들어내 백악산(白岳山 청와대 뒷산 옛 이름)으로 보내노니, 술 취한 노무현의 숙취 해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동람도 팔도총도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팔도총도다. 동해바다 가운데 1,우산도와 2,울릉도가 두 개의 섬으로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우측으로부터 3,대마도 4,거제도 5,남해도 6,제주도 7,진도 8,흑산도 9,군산도까지 그려져 있다. 한강 입구에 있는 10,교동과 11,강화를 제외한 아래 기록된 섬들을 보면 사람이 사는 부속 섬들이 많이 있음에도 하나의 섬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유독 우산도와 울릉도만 두 개의 섬, 두 개의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독도와 울릉도를 별도로 표기한 것이다. 예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의 바다로 나가, 자국 일본열도는 물론 주변국들을 끊임없이 습격 양민들을 학살하며, 노략질을 일삼았던 해적에 다름 아닌 섬나라 일본인들은 그들의 배가 닿는 곳마다,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기록하였는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들이 의도했든지, 또는 표류했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배가 닿지 않는 땅이 어디 있을까? 오늘날 일본의 작태를 보면, 중국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은 물론 시베리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이 다시 우리 한반도를 병합하고,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여, 승리할 꿈을 꾸고 있다면 모르되, 그런 망상이 아니라면, 그리 멀지 않은 그날, 지금의 비자면제 차원이 아닌, 극동아시아의 경제가 통합되고, 그들이 꿈꾸는 최첨단 자기부상열차가 현해탄을 건너 대륙을 달려가고, 사람들이 자유로이 오고가는 국경이 사라지는 그날, 아시아의 국민들이 다 함께 누릴 평화와 행복 속에서, 자국민들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야만적인 패권주의를 버리고, 선린우호정책으로 공동번영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연하면, 내 말은 정당하지 않은 것을, 강대국의 아량으로 양보하라는 것이 아니다. 타국은 물론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으로 미래 세계에서는, 국가의 개념이 지금처럼 영토나 단일혈통이 아닌 문화가 국가와 민족의 기준이 될 것이니, 지금 자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뒤엎으며,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도발을 일삼고 있는 고이즈미를 대표로한 일본 우익들의 탐욕은, 미래에 살아갈 자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어리석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일본을 이끌고 있는 세력들은, 한국의 야구 선수 이승엽(李承燁)을, 일본인의 자존심을 접고,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로 기용한 “하라 다쓰노리(原 辰德)” 감독으로부터, 무엇이 자국민들을 위하고, 아시아 공동 번영을 위한 것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에 대하여, 주장하는 일본이나, 아니라고 반박하는 한국이나, 양국이 제시하는 역사적 자료들은, 이미 세상이 아는 이야기들이니, 새삼 일일이 열거하면서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간과해버리고, 혹은 묻어버리고, 혹은 왜곡시켜버린 울릉도 지명의 유래와 동여비고와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일본정부의 허구를 밝히고,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잘못 오도되어 자신들이 부정해버린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독도 전경
위 사진은 울릉도 독도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으로 독도박물관 “김하나 연구원”이 남서쪽 방향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우측이 동도이고 좌측이 서도다. 독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서 세 개의 봉우리가 되고 남쪽 봉우리가 낮게 보이므로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현장을 확인한 기록이다. 작금 독도에 대한 터무니없는 일본정부의 영유권 주장으로, 한일 양국의 우호는 물론이거니와 극동아시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데, 동여비고를 기준하면, 울릉도는 본래 사군이부한시분계지도(四郡二府漢時分界之圖)에서, 우산도(羽山島)라 하였고, 신라 백제 고구려 조조구역지도(新羅 百濟 高句麗 肇造區域之圖)에서는, 우산국(羽山國)이라 하였으며, 동여비고 강원도동서주군총도(江原道東西州郡棇圖) 울진현도(蔚珍縣圖)에는, 울진과 삼척 사이 동해바다에 무릉도(武陵島)와 울릉도(鬱陵島) 두 개의 섬으로 그려져 있고, 동시대 함께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에는, 우산도와 울릉도 두 개의 섬으로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사기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의 기록에서,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라 한 이후, 930년(태조 13) 고려사절요 기록에 우릉도(芋陵島)라 하였고, 1379년(신우 5) 무릉도(武陵島)라 한 이후, 조선으로 들어와,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우릉도(羽陵島)·무릉도(茂陵島)·삼봉도(三峯島)·죽도(竹島)·의죽도(礒竹島)·송죽도(松竹島)·송도(松島)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오다, 1900년(대한제국 광무 4) 10월 본도인 울릉도를 중심으로 송죽도는 울릉도 부속도서인 죽도(竹島 댓섬)로, 우산도는 석도(石島 독도)로 구분 확정하여, 오늘날 행정명칭이 되었다. 섬이 많은 우리 역사에서, 유독 울릉도에 관한 이름만, 이처럼 10여 가지로 불리면서, 뒤죽박죽으로 혼재된 것은, 빈발한 왜구들의 노략질로 섬이 살육되고, 그로인한 조선왕실의 쇄출(刷出)정책으로 행정이 연속되지 못하고 기록이 멸실된 연유로, 시대와 사람에 따라 개명하면서, 혹은 울릉도와 독도를 뒤바꾸었거나, 혹은 하나로 보았거나, 또는 일본과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며, 조선시대 울릉도에 관한 숱한 기록들은, 거의 대부분이 울릉도를 약탈하거나,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그에 대한 조선의 대책과 반박 기록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기후가 따뜻한 남해안에서, 주변에 사람이 살고 있는 부속 섬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마도(對馬島)·거제도(巨濟島)·남해도(南海島)·제주도(濟州道)·진도(珍島)·흑산도(黑山島)에 비하여, 유독 별 쓸모도 없는 동해 해중에 있는 울릉도만 두 개의 섬, 두 개의 이름으로 표기한 것은,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이는 곧 우산도와 울릉도는 한 개의 섬을 혼동한 것이 아니고, 동해바다 가운데 있는 두 개의 섬으로 표기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특히 동여비고에 표기된 무릉도와 울릉도를 기준으로 보면, 무릉도는 태종, 세종, 성종, 삼조(三朝)에서 1511년(중종 6)까지 조정에서 사용한 공식 지명이었고, 누차 관리들을 파견 관측 조사했으며, 이때 조정의 기록을 보면, 무릉도(武陵島)를 사람이 사는 중심으로 논의했을 뿐, 울릉도는 언급이 없었는데, 이는 동여비고에 표기된 무릉도가 울릉도이고, 울릉도가 독도라는 명확한 물증이다. 다음은 울릉도(鬱陵島)를 무릉도(武陵島)라 하고, 독도(獨島)를 울릉도로 표기한 동여비고의 기록이다. ※동여비고는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제작된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동여비고는 1499년 연산군 당시 수정 보완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데일리안 2006년 4월 18일 “간도·독도·대마도는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다.”는 기사 참고 바람※ 요약하면, 울릉도를 무릉도라 한 것은, 정확히 언제 개명되어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헌에 나타난 무릉도는 1379년(신우 2) 7월 “왜적이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서 반달을 머물다가 물러갔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 처음 나타난 이후, 조선으로 들어와 태종, 세종, 성종, 삼조(三朝)를 거쳐 1511년(중종 6)까지 조정에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다 이후 사라진 지명이다.
◇ 동여비고 강원도동서주군총도 울진현도
동여비고 강원도 울진현 지도에, 무릉도(武陵島)와 울릉도(鬱陵島) 두 개의 섬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위 동여비고의 기록은 태종 세종 성종 삼조(三朝)에서 관리들을 파견 조사 관측한 결과물이고,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들이 이들 왕들의 실록에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어 독도의 옛 이름이 울릉도였다는 명확한 증거이며, 동시에 이 동여비고는 1511년(중종 6)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물증이다. 여기서 무릉도와 울릉도로 표기된 동여비고와는 달리 동국여지승람 울진현 기록과 함께 수록된 동람도에 우산도와 울릉도라 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을 개정한 목적에서 밝힌 대로 연산군 당시 행정개편으로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동여비고가 동국여지승람과 같이 바뀐 우산도와 울릉도로 표기하지 않은 것은, 동여비고에 무릉도(武陵圖)라 해놓고, 그 옆에 일운우산(一云于山)으로 부기해 놓은 것으로 보아, 기존의 지도를 수정한 것이다. 따라서 동여비고 강원도동서주군총도(江原道東西州郡棇圖) 울진현 지도에 그려진 무릉도(武陵島)가 울릉도(鬱陵島)이고, 바깥쪽 먼 바다에 있는 울릉도가 지금의 독도이며,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 팔도총도에서 강원도 동해바다에 그려져 있는 우산도와 울릉도 역시 같은 것이며, 이는 울릉도의 이름이 독도였다는 명확한 기록이다. 다음 아래에 제시된 문헌의 기록들과 지도에서, 울릉도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들은,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 관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다음은 512년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3년의 기록과 동여비고 삼국 당시의 지도다.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 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이하 생략∼ (지증왕)13년 6월 우산국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강릉)의 정 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 이름을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하며 땅 둘레는 백리이다. ∼이하 생략∼ 삼국사기에서 발췌 다음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 울진현의 기록과 함께 수록된 동람도 강원도 울진현의 지도다. 于山 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개의 섬이 현의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는데,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이라 하였고, 하나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발췌 다음은 동국여지승람 강원도 울진현에서 우산도와 울릉도에 관한 기록이다.
◇ 동국여지승람 울진현 산천편
동국여지승람 제45권 강원도 울진현의 기록이다. 위 동국여지승람에서 보듯이,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는 각각 독립된 섬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설명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발췌 于山島 鬱陵島 一云武陵 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岌嶪撑空 南峯稍卑 風日淸明 則峯頭樹木及山根沙渚 歷歷可見 風便 則二日可到 一說 于山 鬱陵 本一島 地方百里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 : 우산도는 무릉도(武陵島)를 말하고, 울릉도는 우릉도(羽陵島)를 말한다. 두 섬이 고을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 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땅의 둘레는 백 리 라고 한다. ∼이하 생략∼ 위 조선의 정사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과 동일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동람도, 그리고 동여비고는, 조선의 조정에서 누차에 걸쳐 관리들을 울릉도에 파견 조사한 결과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일운(一云)은, 하나의 사물을 두고, 다른 이름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며, 또한 “일설 우산 울릉 본일도(一說 于山 鬱陵 本一島)”는 하나의 섬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우산도와 울릉도라는 두 개의 섬이 본래는 하나의 섬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동여비고에 무릉도(武陵圖)라 해놓고, 그 옆에 일운우산(一云于山)으로 부기해 놓은 것이 이러한 사실들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일설우산울릉본일도(一說 于山 鬱陵 本一島)” 즉 “일설에 의하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었다 한다.”라는 가설(假說)을 근거로, 일본은 우산도와 울릉도가 하나의 섬이라고 주장하고, 독도를 죽도(竹島)라 하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이며, 잘못된 식민사관이다. 다시 말해서 “일설 우산 울릉 본일도(一說 于山 鬱陵 本一島)”는, 본래 하나였던 섬이, 상전벽해(桑田碧海) 천지개벽(天地開闢)이 되어, 두 개의 섬으로 나누어 졌다는 전설상의 의미이지, 하나의 섬을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려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조정에서 누차에 걸쳐 관리들을 울릉도에 파견 조사하여, 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하고, 동람도와 동여비고에,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섬으로 그려 놓고, 하나의 섬을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의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문법에도 맞지 않는 잘못된 해석이며, 이것이야말로 식민사관이다. 다음은 울릉도에 대한 어원을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울릉도는 여타 다른 섬들과는 달리 유사 이래 독도와 울릉도가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혼용되고, 그 위치가 서로 뒤바뀌면서, 뒤죽박죽이 돼버린 연유로, 어느 것을 기준하기가 불가능 하지만, 조선의 정사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동람도에 수록된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 그리고 동여비고의 무릉도(武陵島)와 울릉도(鬱陵島)를 기준으로, 안정복(安鼎福 1712∼1791(숙종 38∼정조 15))이 쓴 동사강목 제3상(上) 신라 지증왕 13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 근거가 있다. 6월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우산국은 아슬라주(阿瑟羅州)의 동해 가운데 있고,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하며, 지방은 백리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우릉도(亏陵島)라고 되어 있다. 지금의 우릉도(羽陵島)이며, 동해안 가운데 있다. 순풍(順風)이면 이틀 길이고 주위는 2만 6천 7백 30보이다. 지세의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었다. 안(桉) : 습유기(拾遺記)에 이르기를 ‘봉래산(蓬萊山) 동쪽에 울이국(蔚夷國)이 있다.’ 하였고, 또 왕유(王維)가 일본의 조감(晁監)을 송별하는 서문(序文)에 ‘부상(扶桑)은 냉이[薺]와 같고 울도(蔚島)는 마름[萍]과 같다.’고 한 것은 모두 울릉도(鬱陵島)를 가리킨 것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땅이 되었는데, 고기잡이의 유리함이 많음으로 왜인(倭人)이 늘 와서 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 동사강목에서 발췌 우산도(于山島)는 동국여지승람 동람도에 표기된 위치로 보아 지금의 울릉도를 말하고, 그 의미는 위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에 우산도(于山島)를 우산도(羽山島)라 하였고,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지명을 보면,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울릉도의 산을 성인봉(聖人峰)이라 하고, 폭포를 봉래폭포(蓬萊瀑布)라 부르는 것으로 보건대, 아마도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동해바다에 있다는 봉래산을 뜻하고, 그 봉래산에 날개를 달고 사는 선인(仙人)들, 즉 신선(神仙)들이 사는 산이라는 뜻이며, 동여비고에 표기된 무릉도(武陵島) 역시 이 신선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같은 의미다. 울릉도(鬱陵島)는 우산도(于山島) 바깥 동해 먼 바다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서 지금의 독도를 말하고, 그 의미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위 글에 ‘부상(扶桑)은 냉이[薺]와 같고 울도(蔚島)는 마름[萍]과 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해뜨는 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울릉도를 무릉도라 하고, 독도를 울릉도로 표기한 동여비고는 지명의 자연연기 법칙에서 정확한 것이며, 오늘날 울릉도로 통칭한 것 또한 이 법칙에 충실한 것이다. 참고로 울릉도에 관한 여러 이름 가운데 눈여겨 볼 것은, 돌과 대나무의 섬이라는 의미를 가진 의죽도(礒竹島)라는 이름이다. 이 의죽도(礒竹島)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이 유학(儒學)의 시각으로 개명(改名) 죽도(竹島)로 바뀌었고,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돌섬인 독도(獨島)는 우뚝 솟아오른 산에 있는 돌 모양을 뜻한 초사(楚辭)의 잠금기의혜(岑嶔碕礒兮)에서 의(礒)자를 가져와 죽도와 합쳐 의죽도(礒竹島)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독도는 조선 말기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로 분리 개편하면서, 이 의죽도(礒竹島)를 분리 하여, 죽도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울릉도로 바꾸고, 돌 모양의 의(礒)는 돌섬 즉 지금의 독도(獨島)라 한 것이다. 아울러 구한말 울릉도와 독도라는 두 개의 섬으로 개편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행정지명은, 울릉도라는 하나의 행정지명 속에 독도를 부속시킨 것이니, 이는 때에 따라서 두 개의 섬으로 표기하고, 하나의 이름으로 불러온 역사의 기록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는 물증이다. 무엇보다도 독도의 옛 이름이 울릉도였다는 기록은, 중국의 전설에 발해(渤海) 동쪽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있다는 신선사상(神仙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동쪽 바다 해가 뜨는 섬이라는 뜻이니, 독도의 동쪽에 있는 일본의 주장은 섬 이름의 어원이나 지형적 위치는 물론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음은 독도(獨島)를 죽도(竹島 : 일본어, 다케시마)라 하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허구를 짚어보자. 조선의 역사와 일본의 기록에 등장하는 죽도(竹島)는 모두 지금의 울릉도를 말하는 것으로, 일본이 울릉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모르되,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죽도는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일이다. 울릉도에 관하여 조선시대 예조의 법례(法例)와 사례를 모아 편찬한 책으로 1744년(영조 20) 이맹휴(李孟休)가 왕명에 따라 편찬하였고, 1781년(정조 5) 이가환(李家煥) 등이 소략한 내용을 보충, 완성시킨 춘관지(春官誌)에 “섬이 울진현의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끝이며 산 뿌리를 역력히 볼 수가 있다. 지역이 넓고 땅이 비옥하며 대나무를 생산하므로 죽도(竹島)라고 이르고,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삼봉도(三峯島)라고도 하며, 우산·우릉·울릉·무릉·의죽(礒竹) 등은 모두 와음(訛音)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하였는데, 이 기록에서 보듯이, 과거 한일 양국이 주장하는 죽도는 어부들이나 관리들이 찾아와 배를 만들고 집을 지을 대나무와 목재를 베어갈 정도로 넓고 비옥한 섬이다. 다음 1882년(고종 19) 6월 5일자 승정원일기에서, 울릉도를 검찰하라는 명을 받고 다녀온 이규원(李奎遠)과 고종황제가 문답한 내용을 보면, 과거와 현재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시각을 잘 알 수가 있다. 상이 이르기를, “왜인(倭人)들이 푯말을 세워 놓고 송도(松島)라고 한다는데, 저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규원이 아뢰기를, “저 교활한 무리들이 심지어 송도라고 써서 푯말을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송도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전부터 서로 힐난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차례 화방의질(花房義質)에게 공문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일본 외무성에도 서한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뜻으로 총리대신과 시임 재상들에게 말하겠다. 지금으로 보면 한시라도 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한 뼘의 땅이라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하였다. 이규원이 아뢰기를, “이 전교를 일일이 총리대신 및 시임 대신들에게 전유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한 치의 땅이라도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어찌 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 승정원일기에서 발췌 위 1882년 고종황제와 이규원의 대화를 보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송도(松島)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목재들을 노략질해간 상황에서, 지금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며 내세우는 죽도와 송도가 울릉도였으며, 일본이 울릉도에 자국 영토의 섬 명칭인 죽도와 송도를 붙인 것은, 조선인들을 속이고, 울릉도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탈취해 가기 위한 기만(欺瞞) 수단으로 만든 술책(術策)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일본이 죽도(竹島)라고 주장하는 독도는 단순한 바위산으로, 배를 만들고, 집을 지을 소나무와 성호사설에서 말한 서까래와 같은 대나무는커녕, 난파한 뱃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뗏목을 만들어 띄울 재료하나 구하지 못할 돌섬이니, 일본의 주장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허구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고, 천 가지의 설명과 만 가지의 사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려면, 먼저 자신의 조상들이 기록한대로, 독도를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살 수 있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대나무와 소나무는 물론 온갖 나무들이 우거진 파라다이스(paradise)로 만들어 놓거나, 아니면 천지개벽이 있어 그런 낙원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다.
◇ 독도 전경
일본이 주장하는 역사 속의 죽도(竹島)는 그들의 기록에서 보듯이, 소나무와 대나무들을 약탈해가던 섬이었으니, 설사 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 해도, 이 돌뿐인 섬을 산림자원이 풍부했던 죽도라 하는 것은, 일본 스스로 자신들의 허구를 드러내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울릉도와 독도는 처음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한일 양국의 역사 속에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돌뿐인 독도를 숲이 우거진 파라다이스(paradise) 자신의 조상들이 평화로운 조선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온갖 기만술책으로 조선 관리들을 속여 가며, 소나무와 대나무들을 약탈해가던 죽도(竹島)라 하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구이며, 자자손손(子子孫孫) 세상의 조롱거리일 뿐이다.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전에, 역사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항차 일본을 이끌어갈 후손들에게, 오늘 자신들이 부정하고 왜곡시켜버린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끝으로 오늘 일본으로 하여금, 이러한 반문명적인 도발을 유발케 한 책임은 일제가 남기고 간 식민사관이라는 달콤한 알사탕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우리의 학자들과 우리 내부에 암약하는 친일세력들이 그 원인이다. EEZ의 기준점을 독도가 아닌 울릉도로 잡은 것은, 전형적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이었고, 그것이 오늘의 독도 영토분쟁을 가져온 원인이었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번 2006년 4월 22일 일본과의 협상에서 북위 37도 동경 130도 인근 바다 해저 분지를 “울릉분지(Ulleung Basin)”라 하고, 독도 동쪽 북위 37도 동경 132도 부근 바다 해저산(海底山)을 “이사부해산(Isabu Tablemount)”으로 명명(命名) 국제수로기구(IHO) 해저지명소위원회에 상정 등제하려던 계획을 철회 ‘양보’했다는 것은, 분명한 우리 영토인 독도수역의 주권을 포기한 것이며, 이는 EEZ의 기준점을 독도가 아닌 울릉도로 잡은 식민사관에 기초한 것으로, 굴욕적인 양보이며 패배이다. 우리사회 제반분야에서, 아직도 추려내지 못한 친일세력들이,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친일사관으로 일본을 위해 엎드리는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1998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의 작태는, 친일의 차원을 넘어 친선과 보은(報恩)을 가장한 매국노의 짓이었다. 일구월심 꿈꾸던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마치 최우수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에게 달려가듯, 제일 먼저 일본으로 달려가 세계의 이목이 주시하고 있는 앞에서, 60여 년 전, 암울한 식민지통치하에서, 조국을 버리고 일제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일본인 교사를 보은(報恩)이라는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명분으로 찾아가 “스승님 제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입니다.”하고 엎드리며, 전 세계의 인류 앞에 일본의 조선침략과 창씨개명을 정당화 시켜준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매국노의 작태였다. 이러한 매국노 김대중의 작태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은 백 년 전 자신들이 저지른 조선침략과 반문명적인 창씨개명을 미개한 조선인들에게 현대문명을 교육 전수해준 시혜(施惠) 즉 은혜를 베풀었다는 당위성을 확실하게 담보하게 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이후 일본의 은혜가 뼈에 사무친 김대중은 마침내 1999년 1월 22일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우리의 영토인 독도와 그 주변수역을 무주공해(無主空海)으로 만들어 일본천왕에게 진상하여버렸는데. 이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한·일 어업협정 수역도(水域圖), 해양수산부 홈페이지에서 발췌
위 그림은 친일 매국노 김대중 정부가 1999년 1월 22일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우리의 영토인 독도와 그 주변 수역을 주인 없는 섬과 바다로 만들어 일본천왕에게 진상하여버린 독도와 그 수역도(水域圖)다.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의 영해로 철저히 보호되어 있는 대마도와 그 주변 수역과 한·일 공동어로수역으로 만들어버린 독도를 비교하여 보면, 김대중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한눈에 알 수가 있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가장 민주적이고, 최고로 청렴하고, 평화적인 정권이라는 등, 온갖 미사여구로 국민들을 기만한 김대중 정부가 작성한 한·일 어업협정 수역도를 보면, 지도에서 “한·일 중간수역”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우리가 무엇으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할 것인가? 더 늦기 전에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친일 매국노 김대중과 그 일당들을, 반민족의 죄로 다스리려, 한민족의 분명하고 단호한 의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친일파들의 일본에 대한 보은의 잔치가 김대중으로 끝났는가? 했더니, 다시 줏대 없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 6월 6일 현충일에 일본으로 달려가 고이즈미 총리와 축배를 든 것은, 즉 이른바 자기 부모의 제삿날에, 그것도 부모를 욕보인 원수를 찾아가 술잔을 부딪치며 축배를 든 것은, 술 취한 기생도 혀를 차며 돌아설 작태였다 한마디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남한 응원단이 사용한 한반도기에 독도를 표시하지 못하게 했던 김대중과 고이즈미 앞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며, 적당히 하자고 재롱을 떤 노무현이 저지른 한심한 작태는 우리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조선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다시없는 기회제공이었으며 즐거움이었다. 생각해보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6∼70여 년 전, 암울한 식민지통치하에서, 조국을 버리고 일제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일본인을 보은(報恩)이라는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명분으로 찾아가 스승이라며 엎드렸는데,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 식민지 시대 만났던 일본과 일본인들을, 보은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서 엎드릴 만큼, 그들이 은혜로운 존재였는가? 또 우리가 영토를 포기하면서까지 먹어야할 생선이 무엇이며, 그 알량한 생선이나마 제대로 먹기나 하고 있는 것인가? 대저 온 나라 국민들이 호국의 영령들을 위해 엎드리고 있는 그날, 곧 죽어도 자존심뿐이라는 노무현이 하하거리며, 일본으로 달려가 고이즈미를 부둥켜안고, 술잔을 부딪혀야할 시급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이런 쓸개 빠진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을, 호시탐탐 다시 아시아를 제패(制覇)할 꿈을 꾸고 있는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우리 정부를 얕잡아 본 일본의 태도는, “4월 14일부터 6월30일까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해역에서 해저측량조사를 실시한다.”고 슬쩍 운을 띄워놓고, 해상보안청 소속 측량선 2척을 출항시키는 척, 엿장수가 동네 아이들을 가지고 놀듯, 적당히 변죽만 울리며, 우리정부의 항복을 받아낸 이번 사건에서 잘 나타나 있다. 참고로 2006년 4월 이 굴욕적인 사건에서, 우리가 맹세코 잊지말아야할 것은, 일본이 우리 한국이 강력하게 반발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도해역 해저측량 조사를 시작하겠다는 D데이 4월 14일의 의미다. 1592년 4월 13일 21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조선 침략 선봉 제1군 18,700명의 대군이 700여척의 병선으로 부산포(釜山浦)를 내습 다음날 4월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 조선침략을 위한 해안 교두보를 확보한 기념비적인 승전의 날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이 치밀하게 사전 준비된 침략임을 금석(金石)에 새겨 자자손손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일본의 집요하고 간교한 술수를 간파하지 못하고, 십여 척의 전투경비함을 띄우고, 초계기를 출동시키며, 마치 태산이라도 무너지는 듯이 요란을 떨다 제풀에 알아서 엎드려버렸는데, 이는 친일사관에 중독 된 매국노들이 아니라면, 변명의 여지없는 쓸개 빠진 짓거리였다. 오늘 2006년 4월 25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발표한 대국민 담화를 보니, 이제라도 철이 들어 다행이다 싶지만, 친일 매국노 김대중이 맺은 굴욕적인 신한일어업협정을 즉각 파기하지 않고 재검토한다는 노무현식 논법으로 보아, 아마도 다음달에 있을 선거를 대비하여, 우리 국민들을 기만하는 헛소리인 듯싶다. 바라건대 차기 대통령은, 친일 매국노 김대중이 맺은 굴욕적인 신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독도를 사수할 쓸개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정해년 1월 8일 성출산에서 박혜범이 노 대통령에게 재차 권하는 독도의 역사. 추신 :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본문은 2006년 4월 26일자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습니다. ---------------------------------------------------------------------------------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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