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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 [자작소설] 바람에 묻히다.
게시물ID : panic_354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12
조회수 : 226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8/27 15:56:44





고려 숙종 8년.




저녘노을이 지는 듯 하더니 금방 귓잔등으로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하루종일 논두렁을 기어다니며 피를 뽑았다. 웃도리 아랫도리 할 것 없이 흙먼지들이 들러붙어 땀에 범벅이 된체 끈적거렸다.

이빨이 거진 다 상한해서 잘 듣지 않는 낫 한자루를 덜렁거리며 발이 푹푹 들어가는 논두렁을 빠저나왔다.
논길 앞에있는 작은 바위 밑에 낫을 대충 던져 기댄체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몸을 식혔다.
정신 사나우리만치 더운 8월 중순의 저녘. 이따끔 부는 바람이라도 없었다면 땀이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점심때 쯤 노모(老母)가 챙겨줬던 밥 한덩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들끓는 파리들이 주저 앉아있는 식은 밥덩이들을 내려다보며

얼마간을 멍하니 있었다. 노모가 올해 환갑을 맞으신다. 환갑에도 지팡이 하나없이 걸음을 옮긴다는 것이 정말 여간 타고난 체질은 아니었다.

동네 진가댁 돌팔이 놈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환갑이 뭐여? 앞으로도 10년은 더 족히 팔팔할 법한디. 장수하시네 할멈!"

진가놈이 누런이를 들어내며 껄껄 거리는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속에 피어나는 작은 울분이 느껴졌다.
진가놈은 기뻐하는 척 나를 조롱하며 비웃었다. 이 근방에 오십을 넘긴 노인이 있는 집은 산넘어 최가댁과 우리집 뿐이었다.

해가 다 지고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논에서 부터 집까지 걷는길 내내 들려오는 개구리떼의 울음 소리가 정신이 사나와 귀를 틀어 막고 싶었다.
가슴속에 든 울분이 몽오리진 탓인지 죄없는 개구리를 붙잡아 양손에 붙잡아 쥐어짜는 상상을 했다. 허연배가 불룩히 솟아올라 붉으스레한 옆구리편이 찢어어지며 선분홍 내장들이 피비릿내를 풍기며 기어나오는 모습이 머릿가를 맴돌았다. 이런 상상을 하면 혹여 분이 좀 풀릴까 싶었다만 연신들려오늘 개리구의 울음소리는 한층 더 귀에 거슬려 올 뿐, 괜시리 없던 허망함마져 부풀어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동네어귀에 들어서자 히끄무리한 달빛에 빛춘 노모의 흰머리칼이 보였다.
하얗게 샌 머리칼들이 달빛을 맞아 유독 더 하얀것이 언뜻보면 마치 머리통의 형상만 공중에 붕 떠있는 듯 소름이 끼친다.

"무슨 벌써 돌아오누? 아직 달도 훤 하구먼"
"이 밤에 볏삭이랑 핏삭을 우찌 구별을 하요."
"핑계는! 느이 아부지는 해지고도 서너시는 더 논밭에서 있었어! 어찌 저렇게 게흐른가, 이!?"
"..."

거짓말. 아니, 노망.

아버지는 젊어 시절부터 술과 투전, 여자를 밝혔다.
언젠가 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와 어머니와 언성을 높혔던 기억이 있다.

깊은 밤 진한 술냄새를 풍기는 아버지가 말없이 슬그머니 들어오셨을 때.
잠든 줄 알았던 어머니가 소스라치듯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날이 바짝선 신경질에 손사례를 치며 내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나를 끌어 안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숨소리마져 조심하며 잠이 든 척을 하였다.

"아, 애 깨! 그만해! 늦게까지 논에 있었구만 허구헌날 햇소리이여 어찌된 여편네가!"
"그말을 누가 믿는가? 어? 누가 모르는 줄 알고, 내가 맹춘지 아는가 본데!"

어머니는 한참동안 앙칼진 목소리를 높혔다. 잠자코 그 소리를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머리맡에 깔고 베던
베개를 세차게 집어던지곤 살기어린 눈으로 뒤돌아 눈을 치켜뜬체 어머닐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만 좀 하드라고."

다시 등돌려 옆으로 누운 아버지의 뒷모습을 어머니는 분이 안풀린 듯 한참을 뚫어저라 노려보았다.
어찌나 힘주어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지 입술이 쪼그라들며 주름이 빼곡했다.

한참을 아버지를 노려보던 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과부년들 가랭이가 그렇게 좋으면..." 이라 읊조리곤 아버지와는 반대로 등을 돌려 누웠다. 아버지는 내 옆에 누워 못을은 척 조용히 잠을 청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숨을 뿜을 때 마다 느껴지는 짙은 술냄새가 역겨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북한 술냄새가 적응되며 이따금 아버지 숨결을 타고오는 은은한 분향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어머니는 늦게까지 잠들지 않은체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옹앙댔다.
술기운에 깊게 잠든 아버지에 대한 독설들.

그리고 매번 그렇듯 소리를 죽인체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


한동안 장맛비가 내려 길가 이리저리에 물웅덩이가 젔다. 오랜만에 열린 시장.
동네 꼬마들이 둥그랗게 모여앉아 물웅덩이에 떠오른 소금장이들을 툭툭 건드리며 신기해했다.

한동안 장마 때문에 열리지 못했던 탓인지 장이 한층 시끄러운듯 했다.
보따리 칭칭 동여맨 씨암탉이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옆에서 벼슬이 높게선 수탉들의 구구하며 우는 소리가 장터를 거니는 기분을 들게한다.

집사람이 길한켠에 놋쇠그릇이 수북히 쌓인 모습을 보곤 잠시 주춤하더니 금방 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따금 고운 주단들이 진열된 상점이나 노리개들을 힐끔거리는 집사람의 눈길이 마음에 걸렸다.
어릴적부터 장날 시장바닥을 몇바퀴식 빙글빙글 돌며 구경하는 것을 즐거워라 하던 사람이었다.

시집을 오기 전에는 함께 장에 찾는 날이 많았다. 한손에는 누르스름한 호박엿을 쥐고 갖가지 물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중에 우리가, 나중에 우리가..." 라는 식으로 웃음을 짓곤 했다. 혼례를 치루더라도 매달 하루는 둘이서 장에 들러 맛 좋은 점심을 골라 배를 불리고
두세시각은 주위를 노닐며 여유롭게 보내자고 약속했는데, 막상 지금에 들어 집사람은 옆에 발걸음 엉성한 노모가 자칫 발을 헛딪을까 신경이 쓰이는지 노모의 허리춤과 손목을 부여잡고선 행상들의 호객에도 묵묵부답인체 더딘 걸음만 이어갈 뿐이었다.

"야야 너 신 다 닳았지?"

내가 고개를 돌리며 집사람에게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아직 더 신지, 어머니 신이나 한번 보자."
"야야 나는 됐어. 무신 이제 잘 걷지도 못하는데 새신은... 쯧..."

노모가 잔득 얼굴을 찌푸린체 신경질조로 말했다.
집사람은 생각해서 한 소리라지만 노모의 입에서 돌아오는 냉대에 금방 주눅이 들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분을 걸었을까. 등뒤로 노모와 집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노모가 노점앞에 쪼그려 앉아 행상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아직 표정이 어두운 집사람이 선체 옆 행상이 늘어놓은 짚신짝들을 두리번 거렸다.

집사람옆에 다가서자 노모가 만지작 거리는 아가들 포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곱네! 이거 월매나 하는가?"

노모의 신이나 흥마저 느껴지는 말투에는 집사람을 향한 가시가 돋아있었다. 이런때면 노모의 목소리는 한단 높아지고 말씨마저도 더 선명해 지는 것 같다. 집사람의 눈치를 슬쩍 살피자, 집사람은 눈가에 맺히려던 눈물을 금방 훔쳐 내며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금방 또 한방울이 맺혀들어 이내 툭하고 한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애가 들지 않는 집사람에 대한 핀잔.

노모가 해맑게 웃는 얼굴로 포대기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며 신경질이 치솟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비벼 문대며 붉어진 얼굴을 쓸어 상기되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매, 가요. 뭣하러 그런걸 봐요."
"에구~ 그러게나 말이다. 아직 손주도 못봤는디."

노모는 자리를 털며 집사람이 내미는 손길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그리곤 집사람을 처다보지도 안은체 앞장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저노무 쥐새끼가 새냇물 다 버리것네 그냥! 얘끼 쥐새기 잡아라!~"

시장 큰 사거리에 노리패가 떠드는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온 시장통을 울리는 노리패 호령소리와 함께 인파들의 웃음소리도 그득히 밀려왔다.
그 모습을 본 노모가 한번 히쭉하더니 발걸음을 노리패들 앞으로 옮겼다. 인파가 노리패를 빙그르 둘러싼체 호호껄껄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어느세 나와 집사람, 노모가 노리패들 바로 앞에 자릴깔고 앉아 유쾌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흐뭇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한동안 흥을 돋구던 남정내들이 모습을 감추며 천막사 안으로 사라지자 한껏 분을 칠한 처자 하나가 양뺨에 붉은 연곤지하곤 세침히 사거리 가운데 들어섰다. 청자색 은은한 빛깔을 띄는 비단을 걸치고 기름을 바른 머리를 틀어 올려 매화봉오리 마냥 한껏 멋을 부린 것이 유곽의 기생들 처럼 세련되고 고왔다.

처자는 다소곳이 네방향으로 고개를 조아리더니 눈을 감고는 처음듣는 노랫소리를 읊펐다.

볏삭이 가을되어 나이들자 고개를 떨궈 넓든 들판 수확하는 재미에 즐거운 줄 알았더니, 나랏님 무거운 세금에 눈물 짓고,
대작농에게 가는길 짐수례가 말썽이라 쌀가마니를 손수 짊어지고 걷다 인생이 고달파 자리에 영영 주저앉았다는 이야기.

처음듣는 노랫가락이 었지만 진득하고 애처러운 목소리가 가슴을 아리게하여 머쓱해졌다.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감추곤 무안하여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아낙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좀전에 천막으로 사라졌던 남정들이 크다만한 바가지를 양손에 들고 인파들 앞에 굽씬거렸다. 그러자 짖궃은 아낙들은 남정내들의 몸을 더듬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엽전을 한닢씩 박에 담아주었다. 뒤에서 팔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노리패들에게 엽전을 던저주자 남정내가 이를 이마로 받아 박에 담아들었다. 사람들이 신기한듯 다들 한입씩 웃음꽃을 물었다.

한 아주머니가 인파를 밀치며 요란스럽게 노리패에게 다가서더니 인절미가 한웅큼 담긴 보자기를 박에 기세좋게 담았다.
입꼬리가 귓볼에가 다을 듯 함박웃음을 지어보이던 남정내가 그자리에서 능청스래 인절미를 반입 베어물며 맛이 별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주위 사람들이 그 모습이 보기 좋은지 큰소리로 웃어댔다.

싱글벙글하며 즐겁다는 듯 쪼그려 앉아 빼꼼히 고개를 들고있던 집사람에게 노리패 남정내가 베어먹고 남은 떡 반절을 내밀자 옆에서 아주머니들이 "먹어, 아 먹어!" 하며 웃음을 쳤다. 웃음기가 서린 집사람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니 노리패 남정내의 손에 들려있던 인절미를 한입에 받아 물고는 흣 하는 바람소리를 내며 코웃음을 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며 허허 호탕한 웃음을 첬다.

어제일은 다 잊었다는 듯 모두가 흥에 겨워했다. 집사람도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깊어져 가는 듯 했다.
노리패 아낙의 노랫소리가 후렴구에 들자 사람들이 그세 노랫말을 외운양 따라 불렀다. 장바닥 사람들의 근심이 영영 사라져 없어지는 것 처럼 좋은 기운이 일었다.

다만, 다만 한사람만이 흥나는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못한체 표정이 어두웠다.
노모는 웬 남정내의 손에서 떡을 받아 문 집사람이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 갑자기 욕지꺼리를 뱉었다.

"미친년... 기름에 머리부터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년."

순간 놀란 집사람은 오물거리던 입을 멈춘체 상기된 얼굴로 노모를 돌아보았다.
노모가 눈을 부릅뜨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이리 내 이년아."

노모가 거칠게 집사람의 입가로 손을 가져가 억지로 떡을 빼내려하자 집사람은 괴로운듯 얼굴을 찡그린체 입속을 헤집는 노모의 손을 받아들였다.
한손으론 집사람의 턱주변을 부여잡고 한손으론 입속을 헤집으며 노모는 일부러 얼굴이 상하라는 듯 더 거칠게 입가를 짙뭉겠다.
노모는 개걸스럽게 집사람의 입속에 들었던 떡을 끄집어 들어선 한 손으로 힘주어 짜부러 트리더니 더럽다는 듯 땅바닥으로 내 팽기쳤다.

인절미가 땅바닥에 구르며 흙먼지 옷을 입은체 멈춰서자 주변이 온총 싱~한 기운을 내며 정적이 일었다.
목청높혀 노랫가락을 뽑던 처자도 이모습을 보더니 점차 소리가 줄어들며 가만히 선체 집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망히 땅바닥만 처다보고 있는 집사람의 입가에 선분홍 핏기가 서린게 선명했다.
턱주가리 왼켠으로 노모에 손에 쓸려묻은 침과 함께 피가 맺혀 흐르지 못하고 고여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사람은 한손으로는 노모를 부축하며 한손으로는 내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이따금 옆구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옆구리를 호되게 꼬집혔다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걸음을 계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


***

동네 광석이네 수확날이 다가왔다. 점심때가 들어 그늘에 모여앉아 집사람과 다른 아낙들이 가져다준 참을 받아먹었다.
집사람이 전날 장봐온 계란을 삶아 한알씩 막국수 위에 얹어 둔 것을 보고는 광석이가 유난을 떨며 말했다.

"야~ 이거이 먹겄냐? 아까버서? 응? 마"

광석이의 우스갯소리에 다들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집사람도 노력에 보답받았다는 듯 입가에 기분좋은 미소를 띄었다.

광석이가 삶은 계란을 한입에 기세좋게 밀어 넣더니 아낙들을 향해 물을 달라는 듯 손짓을 했다.
집사람이 녹쇠가득 물을 담아 광석이에게 건내자 광석이는 대뜸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따, 곱구마잉? 옛날부터 손털만큼도 안변햐잉? 그제?"

그 소리를 들은 광석이네 안주인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광석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사람들이 그 모습에 웃음이 번지더니 광석이를 나무랐다.

집사람을 바라보았다.

무더운 여름날 남들과 똑같이 햇살을 맞았음에도 이상스러울 만치 얼굴이 희끄무리하고 뽀얀 것이 정말 어릴 적의 모습과 하등 변한 것 없어보였다.
괜히 자신을 처다보는게 이상스러운가 집사람이 눈을 멀뚱이 꿈뻑이며 나를 응시했다. 이 모습을 놓칠세라 광석이 놈이 삿대질을 하며 나를 비웃었다.

"저눔 저거, 지 마누라가 그렇게 좋을까. 어이구~ 마! 뚫어져 임마!"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또 광석이를 나무라며 나를 옹호했다.

"너 나 잘해 자슥아. 자기 마누라 좋아 죽겠다는데 니가 뭔 참견을 쌌냐 그래."

광석이네 안주인이 또한번 광석이를 쏘아보며 광석이의 옆구리를 쥐어짰다.
쥐어짜인 옆구리를 부여잡고 엄살을 피우는 광석이가 재미있다는 듯 다들 낄낄거리며 웃음기를 머금었다.

집사람은 볼이 발그스레 달아오른체 말이 없었다.

막국수 한사발을 금세 비운 옆집 용호녀석이 입을 열었다.

"야야 너그네는 그래 금슬도 좋아보이는 구만 왜 아직도 애가 읎냐 그래?"

용호의 물음에 다른 사람들도 이유가 궁금해 죽겠다는냥 일제히 시선을 나에게 옮겼다.
집사람의 얼굴이 점차 목석처럼 굳어가는게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눈빛이 내 대답을 갈구하며 희번뜩거렸다.

"노력하고 있, 아! 자식들 뭘 그런걸 물어보냐! 야! 국수나 처먹어."

나의 신경질조에 주위의 분위기가 일순간 싸해지는가 싶더니 그 사이를 틈타 광석가 또 능청을 떨었다.

"야! 노력같은 소리허구 자빠지구, 쯧 저게... 우리는 마 셋째 가즐때 까증만해도 마! 시도 때도 없고 막 임마!"
"?!"

광석네 안주인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체 한손으로 입을 가린체 급하게 광석녀석의 상투를 끌어 당겼다.
얼굴이 온통 시뻘게진 광석이네 안주인이 몸둘바를 몰라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에 개의치 않는 듯 광석이 놈이 말을 이어갔다.

"저거는 근데 아직 집에 할멈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어가가. 쉽지는 안을것이다 아무랭키로."

주위 사람들이 맞장구라도 치듯 고개를 끄덕이며 광석이의 말에 수긍을 하는 듯 보였다.
용호놈이 사발에 담긴 동치미 국물을 냉큼들이켜 입을 행구곤 꿀꺽 삼켰다.
급하게 털어넣은 동치미 국물이 턱주가릴 타고 가슴팍에 떨어지자 용호놈은 대충 입주변을 닦아내며 조용히 물었다.

"지게하나 새로 짜야하는 거 가닌가?"

용호놈의 말에 광석이 놈이 무심한투로 웅얼거렸다.

"저거이 어매는 빼밖에 안남아가. 그냥 대충 아무거로나 짊어져도 지게 안상한다."

광석이 놈이 사발에 남은 국물을 후루룩 다 들이키더니 거하게 트름을 뱉었다.

"햐~ 저거이 어매만 없으면 아주 신 나것네, 내가 너같았으면 마 너희 마누라는 기~냥 아주 밤낮으로!"
"야! 애새끼야 농도 적당히 해싸라 이새끼야. 입에 똥칠을 했나! 어서 저딴말만 저래 튀어 나오노, 쌍노무새끼 남의 마누라한테."

잠자코 국수만 들이키던 문주형님이 크게 고함을 쳤다. 문주형님은 듣는 내내 귀에 거슬렸다는 듯 귀까지 시뻘게 진체 눈을 크게 부라렸다.
광석이 놈이 되게 무안한 듯 얼굴낯이 순식간에 싸해졌다. 그리곤 자리에 남기 불편했는지 내 어깨를 툭툭치고는 논두렁으로 먼저 내려갔다.

"저 새끼는 문둥이 같은게 생각이 없나 저거는..."

문주형님이 한말씀을 더 하셨다.
가을바람 서늘한 그늘 밑, 그렇게 한참을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추수철 서늘해 진 날씨에도 때앙볕을 오랜시간 쬐었더니 등짝이 따끔거렸다.
부지런히 벼 목아지를 따올렸지만 오늘따라 낫질에 힘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의욕이 식는지 움직임이 굼떴다.
아직 저녘해가 산자락에 걸치기도 전에 광석이 놈이 오늘은 이만자릴 털자며 입을 열었다.
아직 몸이 그닥 피곤하지 않음에도 다들 그 소리가 반가웠는지 살살 표정이 풀리며 입꼬리가 슬쩍 들리는 듯 보였다.



광석이네 논을 벗어나 수분을 걸었을까, 집사람이 빨래터 쪼그려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흐르는 시냇물에 하릴없이 손을 담가 쓸어내며 손을 털었다 다시 담갔다를 반복하더니 일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낭군."

집사람이 반기며 생긋하며 웃어보였다.
그 옆으로 벌써 오래전에 마친듯한 빨래감들이 물을 먹은체 축 늘어져 있었다.

"아, 마님. 여서 세월낚고 계셨어라?"

내가 너스레를 떨며 집사람 옆에 털썩 주저앉자 집사람이 생글생글 미소진체 어깨를 기대어 왔다.
집사람은 시냇물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가만히 내 팔뚝 주변을 쓸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냄새 안나나? 죙일 땀흘리고 왔는데."

이따금 바람이 불때마다 땀에 젖어 눅눅한 어깨자락에서 비릿한 땀냄새가 느껴졌다.
집사람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댄체 절래절래 흔들었다.

주변이 고요한게 졸졸흐르는 시냇물고리만 귓가를 맴돌았다. 해가 뉘억뉘억 산자락에 걸리며 구름에 붉은 빛을 물들였다.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이제는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다 식어 조금 쌀쌀했다.

"니 안춥어?"
"춥어."
"그럼 일나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시늉을 하자 집사람이 내 팔뚝을 끌어내렸다.
집사람을 돌아보니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양 뺨으로 눈물자욱이 서려 허옇게 번저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말없이 자세를 다잡고는 다시 집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해가 지는지, 어둠이 오는지 집사람은 마음에 두지 않는듯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부여잡은 팔목아지에 따땃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 어디 좀 들렸다 가야겠구만."
"어데?"

해가 다 젔는데 어딜 갈곳이 있냐며 집사람이 물어왔다.
눈이 휘둥그래진 집사람에게 냉큼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데가?"
"일각도 안된다. 금방 올게 먼저 들어가."


동네를 다시 벗어나 나지막한 산자락에 들어섰다.
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들이 사르륵거리며 내가 온 것을 알아챈양 수선스러웠다.
산자락 초입에 들어서며 주위를 한방퀴 둘러보니 은은한 달빛에 어렴풋 주변은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사람에게는 일각이면 된다고 말했다만, 그보다는 조금 더 걸릴 듯해 보였다.


주변을 살피며 신중히 지게감에 좋은 나무들을 찾았다. 가지를 양손으로 잡아 당겨도 보고 매달려 보며 키 작은 나무들을 둘러보는데, 의외로 쓸만한 것들이 심심찮이 많았다. 한동안 제일 괜찮은 녀석을 선별하다가 그나마 좀 가벼워 보이는 오동나무에 풀잎을 꺽어 칭칭 동여매 표시를 했다.


노모를 태우고 산길을 오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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