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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대.실.패.
게시물ID : iphone_130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hooseyou
추천 : 30
조회수 : 1810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2/09/20 14:46:34


어떤분이 도대체 왜 애플의 실패는 이야기로 쓰지 않느냐 강력히 항의하시어

마침 생각나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서 써봅니다.

이젠 뭐 거의 연재 수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ㅠㅠ

하지만 이번 글은 남자분들이 좀 재미 있어할것 같습니다.



0. 어떨결에 얻은 승리

2차대전중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흔히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떠오릅니다만,

저는 역시 독일의 주력이 완전히 붕괴되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낸

스탈린그라드야 말로 2차대전 최고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래식 무기와 패잔병으로 구성된 겨우 18만의 소련군이

독일, 이탈리아,루마니아, 헝가리의 기계화 27만 연합군을 맞아 반년동안 처절하게 버티다

결국 큰 승리를 하여 전세를 완전히 뒤집게 만들었던 전투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가 사실은 대단히 재미난 전투입니다.

원래 독일군의 목표는 스탈린그라드가 메인은 아니였습니다.



지도에서 처럼, 독일 군부는 제1 목표로 모스코바를 함락하여 소련의 사기를 떨구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전선 북부, 중부, 남부 골고루 파상적 전개는 하려했지만, 적의 수도 함락은 그만큼

전쟁 전체의 흐름을 바꿀수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독일은 모스코바를 목표로

강력한 기계화부대를 앞세워 순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순항에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소련군의 대병력이 키에프란곳에 80만 정도가 모여있다란 정보를 얻게 됩니다.

북부,중부,남부 파상 공격중에, 모스코바를 향하던 중부군과 유전을 얻기 위해 달리고 있는 남부군 이빨가운데,

커다란 고기 한덩어리가 끼고 만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적의 부대를 그냥 지나치고 원래 목표대로 공격을 해 간다는건 사실 무모한 짓입니다.

결국 독일 지도부는 현대기갑전술과 전격전 창시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에프를 공략하기로 합니다.

근데, 의외로 전투는 술술 풀려서 상대보다 적은 수의 부대임에도 그만 대박이 나고 맙니다.

전투는 한달만에 독일의 승리로 끝나버리고 독일은 무려 60만이라는 소련군 포로를 얻는 전과를 얻습니다.

(역사이래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기갑전술의 아버지 구덴리안도 은근히 좋아하며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었습니다.

소련은 어떨결에 집결시켰던 80만 대군을 싸그리 어떨결에 잃어 버렸지만,

독일은 그만 그해 중요한 가을 시기를 모두 키에프 공략에 집중하느라

추운 겨울을 맞아 제대로된 모스코바 공략을 하지 못했고,

시간을 충분히 번 소련은 더 많은 병력과 무기들을 생산하고 독일의 공격에 대비할수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다시 재정비하여 공격을 재개한 독일군앞에 소련군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어떨결에 대승을 얻게된다는 전사입니다.

File:Bundesarchiv Bild 183-W0506-316, Russland, Kampf um Stalingrad, Siegesflagge.jpg


도대체 먼서리를 할려고 전쟁이야기를 하는거냐 -_-;;;


인생을 살다보면 참 별별 일을 다 겪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하고 준비하여 덤벼들어도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도무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떨결에 그만 그렇고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

나도 모르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던 성공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밝히려 들지 않습니다.

단지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질 뿐입니다.

쫀심이 허락하질 않거든 -ㅂ-;;



1. 애플의 등장

애플컴퓨터의 등장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분명 놀라운 일이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애플이 만든 퍼스널 컴퓨터가 세계최초의 것이며

그로 인해 모든 시장을 장악하고(어떤분은 80-90% 장악하신것으로 알고 계시더군요)

득세를 하다가 IBM PC에 의해 망하게 된것이 아니냐 라고 생각들을 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애플컴퓨터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마켓을 휘어잡았던 적이 사실 역사이래 한번도 없었습니다.

단 경쟁자가 없던 1980년 혼자서 마켓쉐어 10-15%정도를 가졌던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라는 수치는 그저 와 이런것이 있네 재미있어하는 어얼리 아답터들의 놀이터 수치이지

마켓을 좌지우지할 막강한 숫자는 아닙니다.

그 이후 애플은 시장을 계속 잃어가며 맥킨토시를 발표하기 바로전인 1983년엔

겨우 시장의 8%만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응? 그럼 도대체 누가 피씨 마켓을 이끌었다는거야?

당근이지 IBM PC 아니겠어?

가 아니고

40.65% 마켓 쉐어를 누리던 코모도어64였습니다.

헉?? 모 40%가 넘어? 그..그럼 IBM PC는?

26.42% 였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뉴스냐. 그럼 애플은 애초에 마켓리더였던 적이 없었단 말이냐?

ㅇㅇ 적어도 미국시장에선 애플이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던적은 역사이래 한번도 없었습니다.

도..도대체 그럼 저 코모도어64란 누구란 말이냐 도대체 어떻게 코모도어가 40%가 넘는 엄청난 마켓쉐어를 누렸었고

무슨 이유때문에 그런 인기를 가졌단 말인가? 질문이 생기실겁니다.

보통 우리가 30% 마켓만 먹어도 독점이니 아니니 말하는데

40%면 그냥 시장 다 말아먹고 산겁니다.

거의 모 오늘날 타블렛 시장의 아이패드라고나 할까요.

잠..잠깐 그럼 이시점에서 더 궁금해지는것이 있다.

그렇다면 IBM PC는 언제 득세하게 된것이냐...

ㅇㅇ IBM이 득세를 하게 된것은 재미있게도 맥킨토시가 발표된 바로 다음해인 1985년 부터입니다.

85년 이후 IBM PC는 세상의 표준이 되다 시피 하며 사실상 삼국통일을 하고 2000년대 까지 세상의 90% 마켓을 독점하게 됩니다.

뭘까요? 왜 애플은 최초의 피씨를 만들고도 시장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퇴출되고 말았을까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그 해답을 이제 전해 드리겠습니다.



2. 그게 다 스티브 잡스 때문입니다.

뭐? 너 앱빠 아니였어? 어찌 그리 단도직입적으로 스티브잡스가 애플 퇴패의 원인이라고 짤라 말할수있냐?

ㅇㅇ 이건 순전히 제 의견입니다. 많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기 때문에

꼭 제말이 맞다고 보시지 마십시요. 그냥 저는 문제를 다르게 보고 싶을 뿐입니다.


잡스는 결정적으로 게임을 싫어했습니다.

그것도 참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히피는 히피입니다.

(잡스가 한때 아타리에서 일한적이 있는데 그건 인도가서 수행할 돈이 궁해서임 게임별로 안좋아함)

그래서 잡스는 자신이 만든 작품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손에 어우려 지는것은 즐거워했지만,

게이머들의 손에 놀리우는것은 대단히 싫어했었습니다.

잡스 스스로 나는 게임을 싫어해 라고 한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애플은 게이머들을 지원합니다란 말은 여러번했었습니다.

고로 그에게서 정말 게임을 싫어하는지 아닌지를 직접 들을순없지만,

잡스와 함께 게임에 관한 프로젝트를 하다 그의 게임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뼈저리게 깨달은 존 칼맥

분명히 잡스는 게임을 원하지 않았다고 증언을 합니다.(퀘이크만드신 분입니다 id사)



스티브는 처음부터 애플컴퓨터를 게임의 툴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기서도 볼수있는것 처럼,

확실히 스티브잡스는 이상가입니다.

그는 그가 만든 창조물이 이상의 상징이 되기를 원했지, 비즈니스의 툴로 받아들이지 못한겁니다.

잡스는 컴퓨터란 이러해야 한다란 바른 방향성을 보고 당시에 많았던 기술들의 총합을 훌륭히 잘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데아적 조형물이었지

당시 게이머들을 만족 시켜줄수있는 현실적 모델은 되지 못했었던것입니다.


먼소리야, 내가 애플2 있을때 했던 게임이 을마나 많은데,

ㅇㅇ 사실 그러합니다만, 애플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그 가격은 결코 게이머들을 만족시켜줄 사양이 된적이 없었습니다.

애플컴퓨터와 IBM 피씨가 스피커에서 빽빽 소리를 내고 있을때,

코모도어64는 전문신디사이저 디자이너가 개발한 3채널의 8비트 사운드로 화려한 음악과 그래픽을 즐길수있었는데다가

애플이 천불이 넘는 가격의 피씨였는데 코모도어64는 겨우 그 반값의 가격으로 동네 가게 진열장 어디서든 볼수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코모도어 없는 집이 없었고 미국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코모도어 게임팩이나 테이프를 얻기위해

있는 재롱 없는 재롱 다 떨던 시절이였습니다.

코모도어64 오리지널 기계를 통해 나오는 소리와 영상을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음, 로딩도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때 어린이들의 마음을 기억해보시면서

참을성있게 모두 들어봐주십시요. -ㅂ-;;



근데 거 이상하다 옛날에는 애플게임 밖에 우리나라에 없었다고 들었는데,

ㅇㅇ 근데 그것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해서

닥치는대로 불법복사를 해서 소프트웨어를 공유했습니다.

세운상가에 가면 정품도 아닌 불법복사한 게임을 버젓이 팔기도 했고

애플2플라스 복사품 컴퓨터 한대 세운상가에서 사면

아저씨들이 듬뿍 듬뿍 불복게임 담아주기도 했고, 나중에 또 찾아가

아저씨 저 여기서 컴샀는데, 겜좀 주세요 그럼

서비스 차원에서 이것저것 얻어갈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공짜로.

플로피가 나온뒤로는 더 심해져서

정품게임 본다는것은 도저히 미친넘이 아니고선 사는게 아니다라는 불문율이

널리 통용되던 시기였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인기있던 컴퓨터잡지에서 조차 겜교환해요 광고가 떳떳하게 실릴정도였으니깐요..

그러나 코모도어64 겜은 나중엔 팩으로 까지 나오며 복사도 골치아팠고,

이미 애플부품이 널리 퍼져있어서

미국에서 천불 하던 것이 한국에선 겨우 30만원에 살수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코모도어가 기를 피지 못했었습니다.

[아놔 이걸 어떻게 카피하라고 ㅠㅠ]


Macintosh 128k transparency.png

그후 1984년 그 유명한 맥킨토시가 나왔지만, $2,495 였습니다. ㅠㅠ

당시로는 엄청난 고사양에 서민들은 도무지 가까이 할수없는 고가인데다가

당시에는 듣도 보지도 못했던 3.5인치 플라스틱에 쌓인 플로피를 들고나와서

멋도있고, 마우스란것도 신기하고

GUI 난생 첨보지.. 와

신기하긴 한데, 이것은 저 안드로메다 너머의 오로라 공주일뿐 더도 덜도 되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맥보다 그때 같이 나왔던 애플 2C가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었고,

맥킨토시라는 이상적인 얼굴마담덕에 애플컴퓨터들이 갑자기 되래 더 많이 팔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실제로 맥보다 당시엔 애플2 시리즈가 더 많이 팔림. 왜인진 몰라염 갑자기 안팔리던 애플이 맥킨토시 발표이후 이상하게 잘팔렸었음)

File:Apple IIc with monitor.jpg

[아 이쁜 애플2c... 저거 나중에 휴대용으로도 나옴.]


한편 아이비엠 계열의 피씨들은 일찌감치 호환기종을 허락하며 가속도를 받으며 시장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애플은 1984년 이후 맥킨토시라는 이상향이 독특하고 유일하다고 판단했는지, 호환기종 생산은 중단되고

시장은 자연스럽게 돈벌수있는 피씨 호환 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널리 피씨가 퍼지니, 코모도어64도 아이비엠 호환 기종에 상대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너도 나도 아이비엠 호환 기종을 만들어대니, 게임 마켓도 자연스래

피씨 쪽으로 몰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985년 1986년 이후 세상은 게임과 함께 아이비엠 피씨의 세상이 되고 만것입니다.

아..갑자기 삼국지2 하고 시퍼졌다 ㅠㅠ



3. 애플의 노력

저도 엄마한테 컴퓨터 처음 사달라고 졸랐을때가 기억납니다.

엄마 친구들 다 컴퓨터 쓰는데, 요즘 컴퓨터 모르면 안된데, 나 공부 열심히 할테니 컴퓨터 하나 사줘 하고

사기쳐서 엄마랑 세운상가 가서 "학생 여기 빨간거 잼난거 있는데 함 봐바"하는 유혹을 뿌리치며

로얄이라고 써있긴 하지만, 완전 구라인 애플2플라스 복사판을 집에 가져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겜만 열심히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ㅇㅇ 마켓은 게임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게임회사들이 눈에 불을키고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우리들이 아는 유명한 게임들이(액티비젼, 코에이 짱)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맥킨토시는 게임회사들이 지원을 부탁해도

수준떨어진다고 무시하면서 우리는 격이 달라서....우아한척을 하며

적극지원은 망정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스티브잡스는 그리하여 아시다시피 여러가지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애플은 고가 맥킨토시전략을 유지하며

전문 출판, 그래픽 시장에 집중하게 됩니다.

게임은... 체스놀이가 유일했었습니다..

이후 세상은 게임세상이 되어 닌텐도, 플스,세가의 난립으로

컴퓨터 게임을 넘어선 전문 게임콘솔의 활약이 커졌지만,

여전히 피씨의 게임시장은 콘솔 못지 않은 인기와 독특함을 유지하며 마켓최고의 점유율을 자랑했습니다.


잡스가 없던 애플은 아. 이게 아니구나 그제서야 시장의 니드를 깨달고 정신을 차려서

우리도 게임을 신경써야 겠구나 뒤늦게 게임시장에 뛰어들며

1995년 플스의 명성이 세상을 뒤덮고있을때, 미친척 하고 반다이랑 손을 잡고 피핀을 발표합니다.


Set-top box Pippin: The concept of a device that offers more than a game console, fell through when the buyers


모 당연히 아무도 사지 않고 이 게임기는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은 사실상 애플의 게임시장을 위한 비참한 마지막 노력으로 1997년 스티브잡스가 되돌아오며

데스크탑, 노트북 시장을 제외한 다른 사업부는 몽조리 폐기처분될때 같이 사라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키에프전과 같은 애플의 완벽한 패배라고 할수있겠습니다.

이젠 애플에 게임시장에 들어가자고 말할수있는 용기를 가진 그리고 위치를 가진 사람은

한명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됩니다.



4. 스탈린그라드 같은 반전의 시작

잡스가 97년 애플에 되돌아와 다 무너져 버린 애플을 바라보며

문제가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국 결론에 이른것이 게임이였습니다.(아니 농담아니고 진짜로)

1998년 iMac을 처음 발표하면서 애플은 게임을 원활하게 돌릴수있는 여러가지 애플답지 않은 조치들을 취합니다.

우선 이전까지지 사용하던 ADB 인터페이스를 없애버리고 USB를 도입해서

여러가지 피씨용 게임용 조이스틱과 연동을 쉽게 해줬습니다.(당시 맥월드에 많이 나왔었습니다.)

동시에 맥월드 엑스포장에 처음으로 번지의 Myth 라는 게임을 애플이 직접 소개하며 시연을 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잡스가 번지사를 강단에 초대하며 이전에 안하던 적극적 지원을 약속합니다.


[번지사의 Myth라는 게임. 이 게임은 아직도 매니어들이 서버를 직접 만들어 하고 있습니다.]


번지사는 고무되었고 얼마후 다시 1999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Halo 라는 게임 프로젝트를 발표합니다.

단상에 스티브잡스와 함께 올라와 시연을 해보이며 얼마뒤에 출시될것을 약속하고

이 게임은 오직 맥에서만 돌아갈것이라고 단단히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잡스는 번지사의 Halo게임을 신형 맥들의 성능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드디어 잡스가 게임이 얼마나 컴퓨터 비즈니스에 중요한지 이젠 깨달았구나를 느끼게 해주었었습니다.


[열광속에 발표된 할로. 화면에는 안나오는데 그때 스티브잡스가 정말 흐믓해했었음 난 그자리에서 봤음]


그.런.데.


이듬해 2000년 여름 마이크로소프트가 번지를 합병하고 맙니다. ㅠㅠ

이때 스티브잡스는 엄청난 배신감과 충격으로 쇼크를 받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스티브발머에게 직접 온갖 열폭을 쏟아부었습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게임부서를 책임지고 있던 에드 프라이에게 발머는 연락을 합니다.

"야, 스티브가 완전히 뚜껑열렸다 니가 뭔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좀 가서 니가 좀 어떻게 해봐라 완전히 열폭이야

여기 전화번호 받아라 스티브 직통이다."-실제 내용임

아 우리의 스티브 아저씨는 왜 맨날 이렇게 백스탭만 당하고 사는걸까요 ㅠㅠ

그날이후 우리는 게임프레젠테이션을 맥월드 엑스포에서 영원히 볼수 없게 됩니다.

맥월드 엑스포는 이후 애플의 참여 없이 초라한 애플매니어모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전세계를 완전히 뒤집는 반전의 역사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5. 애플의 반격

스티브잡스가.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아이팟을 출시하게 됩니다.


아이팟은 아시다시피 대박이 나고 맙니다.

솔직히 번지 사건 이후 완전히 인생에 바닥까지 번지점프하고 올라온듯한 충격을 머금고 있던 스티브 잡스는

게임이라면 치를 떨었던것인지 이후 한동안 게임 프레젠테이션이란 존재하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그뒤로 보여졌던 모든것은 뮤직.뮤직.뮤직.뮤직. 그리고 뮤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저 작은 기기가 세상을 바꿀거라고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2007년 세상에 아이팟 터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스티브잡스도 아이팟터치가 게임시장을 뒤집을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팟 터치의 원조격인 첫 아이폰 프레젠테이션때도

스티브잡스는 아이팟과, 전화 그리고 인터넷커뮤니케이터 3가지의 조합이라고 알렸으며

키노트 내내, 아이폰으로 음악을 터치하는 재미를 선사한다고 떠들며

오직 뮤직 뮤직 뮤직 그리고 뮤직에만 촛점을 맞춰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합니다.

흔히들 게임을 위해 설치한게 아니냐란 프락시센서도

사실 바테리 라이프를 세이브하기 위한

조치로, 전화기를 귀에 대면 자동으로 화면을 끄고 내리면 키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스티브잡스가 설명했습니다.

게임을 위한것이 절대 아니였었습니다.


근데, 막상 시장은 스티브잡스의 바램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사람들은 프락시센서를 가진 새로운 뮤직플레이어에 관심을 가지며

음악보단 그 재미난 움직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에 게임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하며

우리가 알고있듯이 결국 당시를 주름잡던 모든 게임기를 눌러버리고

새로운 게임시장의 리더로 아이팟 터치가 왕좌를 차지하게 되어버립니다.


어떨결에

정말 어떨결에

스티브 잡스는

의도하지도 않았는데도

게임으로 다시 세상에 애플의 이름을 날리는

결과를 보게 된것입니다.

마치 2차대전, 바람앞에 등잔불 같았던 소련의 스탈린이

키에프의 대패로 온 나라가 절망에 빠졌을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의 고집 때문에 생긴 그 대패로 인해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오히려 다시회생할수있는 시간을 벌게 되고

결국 독소전에서 승리를 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았던 승리를

스티브잡스는 그야말로

어떨결에 경험하게 되어버린것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의도한것이 아니였다라고 말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신것 처럼, 스티브잡스는

애초에 이것이 게임기로 클것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처음 애플을 만들었을때나

그리고 죽어서 누울때까지도.

게임이 애플을 죽이고 살리는 중요한 팩터가 될거라는것을

못느끼고 사라져 갔을것 같습니다.


상당히 긴글 재미나게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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