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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전설. 故 정주영 신화.
게시물ID : lovestory_355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륜
추천 : 7
조회수 : 250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07/18 18:27:45
우연히 어떠한 역사에 관한 글을 읽어봄 -> 조선업 -> 현대 -> 故 정주영 회장 -> 지금 글 올리는중

여러곳에서 짜집기해서 링크는 따로없.. 뒷북 검사는 대충 함..

여러분은 故 정주영 회장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그분은 제가 존경하는 가장 위대한 경영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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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어린 시절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림.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뼈 빠지게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가출을 결심, 이후 4번의 가출을 단행함. 
마지막으로 가출한 곳은 서울 어느 쌀가게. 이곳에서 배달 점원으로 일하게 된 뒤, 
근면 성실함을 인정 받고 22살의 나이에 쌀가게를 물려 받아 운영하기 시작. 
그러나 정주영의 첫 사업은 일제의 미곡 통제령에 의해 허망하게 망함.
 
그는 근면성실한데다 영리해 주인이 가계 장부를 맡길 정도로 신뢰했다고 한다.
 
1941년 쌀가게 단골이었던 오윤근이란 사람으로부터 3000원을 빌려 자동차 수리공장을 매입, 
자동차 사업을 시작함. 그러나 공장화재로 사업장이 모두 불탐.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된 정주영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오윤근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
3500원을 더 빌림. (이 믿기 힘든 일화는 오윤근의 정주영에 대한 깊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함) 
정주영은 다시 신설동에 자동차 수리공장을 설립, 3년 만에 빚을 모두 갚고 상당한 재산을 모으게 됨. 
그러나 이 공장은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 흡수됨.
 
해방 후 1946년, 서울 충무로에 "현대 자동차 공업사" 설립. 오늘날 현대의 모태가 됨. 
원래는 자동차 수리점이었으나 자동차 개조업으로 확장함. 1947년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 뛰어듦. 
그는 건설업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나 단지 건설업자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이유로 시작함. 
"일단 뛰어들고 밀어붙인다" 이는 이후 정주영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사업 스타일로 굳어짐.
 
한국 전쟁 후의 건설 특수를 이용, 압도적으로 많은 건설 수주를 따냄으로써 일약 한국 제일의 
건설업체 중 하나로 떠오름. 정주영이 건설업으로 성공한 것은 그의 탁월한 지능과 초인적인 집념 
때문이었음. 1952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미군은 정주영에게 
양변기와 난방 공사를 맡겼다. 문제는 태어나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양변기. 
정주영은 용산 일대를 전부 뒤져 양변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물품과 정보를 찾아왔고, 
12일간 밤낮을 샌 끝에 기어코 공사를 끝마쳤다. 1953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UN 사령부는 사절단 참배에
앞서 부산의 유엔 군 묘지에 푸른 잔디를 깔아달라는 요청을 함. 때는 한겨울. 모든 건설업체들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부했으나, 정주영만은 공사비를 3배로 올려 받고 낙동강 근처의 겨울보리를 
떠다가 묘지에 심었고, UN군 묘지를 푸른 풀밭으로 바꿔 놓았다. 이 두 가지의 일이 있은 후 미군의 
대규모 건설 수주는 모두 정주영에게 떨어짐.
 

이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정주영에게 몇 차례의 시련을 안겨 줌. 1954년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6500만 환이 넘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본 것. 당시 국가가 발주한 공사 중 최대 규모였던 이 교각 복구는
지독하게 불리한 건설 환경, 열악한 장비, 거기에 인플레까지 겹쳐 정주영에게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안겨 줌. 정주영은 이 빚을 갚는 데만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음. 비록 적자는 보았으나 정주영은 정부의
신용을 얻어,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내는 등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음.
 
한강 인도교 공사 이후 승승장구, 1960년 이후 도급순위 1위로 한국 건설업계 평정. 
1965년엔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 내면서 해외진출을 시작. 
이후 1966년 전쟁 중의 베트남 복구사업, 메콩 강 준설공사에도 참여. 
정주영은 첫 해외시장 진출은 사실상 참담한 실패였음. 
극단적으로 열악한 기후와 건설 여건 덕에 현대건설은 다시 한번 엄청난 빚을 지는 등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음.
 
1970년엔 역사적인 경부고속도로를 완공. 총 공사비 429억원, 공사기간 290일, 공사 중 사망 인원 77명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과 가장 적은 비용, 
가장 짧은 시간으로 만들어진 길이 됨.
 
1967년 현대 자동차 설립. (정주영은 원래 20대부터 자동차 서비스 업으로 사업을 꾸렸으나, 
자동차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음.) 
1968년 미국 포드 자동차와 합작으로 현대 자동차의 첫 번째 작품인 "코티나" 시판.
이때까지 현대 자동차는 포드 자동차의 부품 조립 생산기지에 불과했음.
  
정주영은 100% 국산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 살길이라 판단, 
1억 달러를 들여 년간 5만대의 자동차 생산 공장을 건설함. 
이는 정주영 일생일대의 도박이었음. 당시 국내에 연간 판매되는 자동차의 수는 1천대도 되질 않았으며,
당시 현대가 갖고 있던 자금 규모로 년간 5만대의 자동차 생산 기지를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일이었음. 그러나 정주영은 "수출로 돈을 벌면 된다"며 밀어붙임.
자동차 개발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정주영은 아예 해외시장을 공략해 수익을 얻겠다는 기개를 보여줌.
 
1976년 대한민국의 첫번째 독자적 자동차 브랜드인 포니 출시. 그 해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 장악,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 수출되기 시작, 첫해에만 1만 대가 판매됐다.
1970년 말부터 년간 5만대에서 10만대로 생산을 늘림.
 
 
 
포니의 대대적인 성공에 힘입어 1982년 포니2 출시. 첫해 국내에서 4만대 판매, 1983년 캐나다 수출, 
1986년 한해에만 8만대를 판매함. 1985년엔 미국 현지 법인 설립,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3대 방송국에 
"Cars that make sense"라는 슬로건으로 TV 광고를 띄움. 
(당시 한국이 아직 원조물자로 연명하는 줄 알았던 미국 교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함.) 
1986년 또 다른 신형차 "엑셀"을 출시해 1987년 미국 시장에서만 26만대를 판매해 미국 수입 소형차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함.
 
1971년 조선소 건립을 추진,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을 위해 영국으로부터 8000만 달러의 외자 유치에 성공함. 당시 현대가 외자 유치를 위해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완벽하게 준비된 사업 계획서, 그리고 5백원 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이야기로 끝내 돈을 빌리는데 성공함. 그리고 그리스의 선박회사로부터 배 두 척을 선주문하겠다는 계약까지 따내는데 성공. 1972년부터 배를 생산하기 시작한 현대 조선은 1973년 세계 조선시장 점유율 2.64%를 차지하며 다시 세상을 한번 놀라게 함.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조선과 건설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이때 정주영은 석유 파동의 근원지인 
중동으로 가서 일을 해야 돈을 안정적으로 벌 수 있다는 생각을 함. 베트남과 태국에서의 악몽을 
떠올린 회사 중역들은 몸을 던져 정주영의 계획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주영은 이들을 모두 진압하고 
중동에 진출, 9억 3000만 달러짜리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냄. 세계 굴지의 건축 회사들이 모두 입찰했던 
이 공사 수주에서 현대가 이긴 것은 가장 저렴한 금액에 공사 기간을 8개월이나 단축시킨다는 약속 때문이었음. 
이때 현대가 벌어온 건설 수주액은 한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외화였음. 
이후 현대의 해외 건설 수주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1년 126억 달러를 기록, 한국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현대는 이로써 건설, 자동차, 조선 3개의 주력 사업을 세계 시장에 성공시킴.
 
1984년 서산 방조제 공사에서 극심한 조류로 공사에 난항을 겪자, 정주영은 고철로 팔기 위해 가져온 
스웨덴의 20만 톤급 유조선을 가라앉혀 파도를 막은 후 그 위를 메우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함.
정주영의 이런 기지로 공사비 290억원 절약, 이 일화는 이후 "정주영 공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짐.
  
1992년 정계 진출 선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정주영은 평소 정치적 불안을 가장 두려워했다. 
아무리 뛰어난 사업가라도 정치적 변동 앞에서는 순식간에 망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왔고,
이에 그는 자신이 경제를 지배하는 대통령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함. 그러나 정주영은 대통령 선거에 참패,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국회의원직까지 버리고 정계에서 영영 은퇴한다.
 
1998년 소 500마리를 몰고 방북.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최고 지도자 김정일을 만난다. 
이곳에서 정주영은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키고, 이후 현대의 개성공단 진출의 물꼬를 틈.
 
정주영 회장 최후의 업적이라 일컬어지는 남북 경협사업 체결 당시. 
젊은 시절 소 한마리를 훔쳐 야반도주했던 빚을 갚기 위해 소 500마리를 몰고 방북한 당시 에피소드는 
해외에서도 굉장한 화제였음.


 
정주영은 "난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입버릇처럼 말 할만큼 
사원들과 어울리길 즐겼음. 특히 현대 공채 1기 출신들은 정주영 회장을 "아버님"이라 부를 정도로 굉장한 
유대감을 자랑함. 정주영은 사원들과 술자리를 자주할 뿐만 아니라 운동도 노래도 같이 하는 등 
사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능했음.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음. 한번은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맥주 다섯 병에 안주 한 접시를 시켰는데 
나갈 때보니 맥주 두병을 마시지 않은 걸 보고 두병 값을 깎아 돈을 지불함. 
구두를 한번 신으면 뒤축을 갈아가며 10년 이상 신었으며, 언제나 외제차가 아닌 현대 중형차를 타고 다녔다.
  
2001년 86살의 나이로 별세. 극빈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83개가 넘는 사업체를 일으키고, 
130조원이 넘는 매출을 내는 세계적 기업을 세운 정주영의 마지막 청운동 자택에는 
낡은 구두, 구멍 난 면장갑,낡은 금성 TV 수상기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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