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비판론자들에 대한 최병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의 정교한 해설입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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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논점] ‘허공에 주먹질하기’ - 이헌재 논란과 ‘관치(官治)’ 비판의 허구성 >
1) 김상조-정태인 그룹과 장하준-정승일 그룹의 ‘의결 일치’
안철수 후보의 대선출마 선언식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참여한 것에 대해서 야권의 경제학계를 중심으로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이들은 이헌재야말로 ‘관치금융’의 핵심 책임자였으며, 모피아의 대부라고 비판하고 있다.
최근 프레시안이 주도했던 ‘한국경제 성격논쟁’에서 서로 날 센 대립각을 세웠던 김상조-정태인 그룹과 장하준-정승일 그룹은 참으로 오랜만에 ‘이헌재 비판’이라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어찌 보면 ‘매우 예외적인’ 일이라고 보여질 정도이다.
물론 김상조-정태인 그룹과 장하준-정승일 그룹의 비판 지점은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전자 그룹은 “관치금융”에 비판의 초점이 놓여있고, 후자 그룹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신자유주의’를 주도했다는 것에 비판의 초점이 놓여있다.
원론적으로, 소위 ‘이헌재 논란’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첫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둘러싼 관치 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정치전략적 관점에서, ‘이헌재 카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짧게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나는 최근에 출판되었다는 이헌재의 <경제는 정치다>라는 책을 보지 못했다. 이후에 책을 보게 되면, 추가적인 이야기를 덧붙여볼 생각이다.
2) “허공에 주먹질”하는 용어 - ‘관치’라는 개념의 공허함
막스 베버는 근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관료체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 소위 진보진영의 경제학자들이 ‘관료체제’, 그 자체의 타파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관치(官治)’라는 말 자체가 “허공에 주먹질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모피아라는 말로 바꿔도 매 한가지이다. 이 질문이 얼마나 공허한 개념인지는 ‘실천적’ 관점에서 반문을 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질문을 던져보자. ‘관치’의 반대말은 뭔가?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관치’가 잘못된 것이라면, ‘옳은 것’에 해당하는 다른 개념은 무엇인가?
나는 ‘관치(官治)’라는 개념 자체가 다분히 (용어를 사용하는 분들의 선의와 무관하게)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치의 반대개념은 필연적으로 ‘시장자율’(=자유방임 시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계를 포함하여) 진보진영의 다수는 자유방임형 신자유주의와 국가사회주의 모두를 반대하며 <조정 시장경제 체제>를 대안으로 합의하고 있다. (*이 말도 어느정도는 막연한 말이지만..)
즉, 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을 용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관료체제’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시장개입은 다른 말로 <관료의 시장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의 시장개입을 용인하면서, ‘관료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마치 둥근 사각형처럼 논리적 형용모순에 다름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관치 비판’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용어가 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1970년 박정희식 경제발전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민의 통치’를 주장하던 재야가 ‘관치비판’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던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즉, 관치 비판은 ‘국가 개입 비판’ 그 자체이다. )
3) 번짓수를 잘못 찾은 비판 지점 - ‘관치(官治)’가 아니라 ‘정치(政治)’를 비판해야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경제적 행위자 집단을 편의상 시장-관료-정부로 구분해보기로 하자. 1) 시장은 기본적으로 자유방임이 작동하는 민간의 영역이고, 2) 관료는 ‘국가’에 복속된 공무원 체제를 의미한다. 3) 정부의 가장 큰 특징은 ‘선출된 권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조정 시장 경제 체제>를 지향한다면,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프로세스는 1) 선출된 권력이 2) 관료체제를 통해 3) 시장에 개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주체-수단-객체>를 구분하는 것이다.
관료는 엄밀히 말하면, ‘수단’에 불과하다. 관료 그 자체가 ‘최종 의사결정’을 쥐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여정부에 가담했으면서도 참여정부의 한계를 방어하는 일부의 논자들은 ‘모피아’ 때문에 참여정부가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출된 권력>이 ‘관료체제’를 통제하는 것이지, 반대로 관료체제가 선출된 권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판의 올바른 대상은 관료-모피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선출권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능한 선출권력>을 비판의 중심에 두지 않고, 관치-모피아 그 자체를 비판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것은 마치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문제점을 당 대표(혹은 당 지도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당직자’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즉, 이헌재-모피아-관치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던 <선출된 권력>의 최고 책임자였던 김대중-노무현을 비판하는 것이 올바른 비판이 되는 셈이다. (*당직자 때문에 새누리당-민주당이 위기라고 주장하는 것과 도대체 뭐가 다른가? )
4) 이헌재 카드 활용에 대한 ‘정치적’ 판단 지점
두 번째 질문을 던져보자. 선거 공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헌재 카드 활용은 적절한가? 원론적으로 살펴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선거캠페인 과정에서 ‘타겟 집단’을 어디로 설정하느냐와 맞물려 있다.
안철수 후보의 출마 전에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중 하나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현재 두 번의 계기를 통해 드러났다.
[장면-1] 9월 19일 안철수 후보의 출마선언식에 노출된 사람들 중에 ‘보수’ 인사는 사실 이헌재 한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체로 ‘진보쪽’의 인사들이었다. 그날 드러난 사람들이 약 15명이었는데, <1:14의 구도>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장면-2] 그리고 최근 박선숙 선대본 총괄본부장의 ‘캠프’ 인선 발표에 의하면, 그 멤버들이 주로는 민주당-진보개혁 쪽에서 있었던 40대 그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위의 [장면-1]과 [장면-2]에서 ‘이헌재’라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면, ‘중위투표자’ 집단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안철수 후보가 ‘진보 편향적’(?) 인물이거나, (40대의) ‘젊은 사람’ 중심으로만 캠프가 구성된다는 인상을 갖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헌재 카드의 실질적 의미는 진보중심 사람배치, 젊은 사람 중심 사람배치를 보완해주고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5) [모순된 주문] ‘중도층’은 견인하되, 이헌재는 멀리 하라??
나는 특히나 안철수 후보에게 ‘중도층-무당파층’을 견인하라고 주문하는 사람들이, 이헌재를 비판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실천적 관점에서 봤을 때) ‘정치적 형용모순’을 주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명의 유권자’로서 비판하는 분들은 비판할 자격이 있다.) 왜 그런지 살펴보면,
첫째, 안철수 캠프에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같은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과장된 비판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적’ 흐름.. 즉, ‘헤게모니’를 읽어내는 것이다.)
둘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역할은 ‘중도층’에게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헌재 카드를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중도층 공략을 포기하라고 주문하는 것과 같다. (*또는 ‘색깔이 센’ 진보적 인사들로만 갖고, 중도층 유권자를 설득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셋째, ‘관치’ 비판은 허공에 주먹질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선출된 권력’이 <정치>의 기능을 제대로 작동시키느냐의 여부이다. 즉, 안철수 후보가 만일 대통령이 되면, ‘안철수의 생각’이 이헌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만일 후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철수 후보가 <자기 생각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전제’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이전의 민주정부가 그랬다고 해서, 현재의 후보들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며, 근거도 없는 주장인 셈이다.)
[안철수 사용설명서] 카페 http://cafe.daum.net/acsm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