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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해적들의 시대(1)
게시물ID : humorbest_3566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eroSpera
추천 : 18
조회수 : 4651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5/22 12:36:44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5/21 11:56:48
======================================================================================================== 무작정 반대 누르기 전에 이 글이 무슨글인지는 보고 옵시다, 개념있는 사람은 리플로 말합니다 케러비안의 해적 4가 개봉했다는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히로준님) 때문에 한번 캐러비안의 해적 즉 카리브 해적들을 알아볼까 해서 그리고 SF판타지 '위대한 치우천황과 우리의 열라짱센 고대사, 그리고 멍청한 조선인과 근현대인들'로 채워지는 게시판을 좀 환기시켜볼까 해서 적어보았습니다. 더불어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흥미없는 영화지만 여자친구가 조니뎁일편단심인터라, 또 끌려가게 생겼습니다, 조니뎁보다 못한 인생이라니 orz(....) ======================================================================================================== 1717년경에 영국에서 제작된 카리브해 지도, 빨간 영역은 에스파냐령, 푸른 영역은 프랑스령을 의미합니다. 유럽인들은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엔리끄 왕자의 선단이 아프리카 서해안의 항로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항해했습니다. 바다를 통해 유럽인들은 낯선 땅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향신료와 금은보화, 그리고 노예를 수입했으며 이를 유럽시장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며 이로써 16세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는 너도나도 무역상 혹은 (모험을 빙자한) 도적질을 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에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사이에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이 항로는 편서풍지대에 위치해 있어 빠른속도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카나리아 제도를 통해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앞바다로 진입하는 남쪽 항로는 무역풍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항로는 중간에 서인도제도에서 식량이나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었으며 암초나 항해를 방해할 수 있는 바닷말같은 장애물이 없어 더더욱 각광을 받았는데, 이렇게 대부분의 배들이 안전한 정기항로로 이동하자 항로의 중간을 막고는 해적질을 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카리브해의 해적들은 이미 1580년경에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주로 무게가 1000톤씩 나가서 많은 짐을 적재할 수 있으면서도 느려터진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주로 털어먹으면서 번영했습니다. 해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에스파냐는 까르따헤나나 아바나, 플로리다등 무역거점에 요새를 구축해야 할 지경에 이릅니다. 보물을 놓고 싸우는 해적들을 그린 하워드 파일(Howard Pyle)의 일러스트(위)와 1691년 이전 포트로얄의 모습 (아래) 해적들은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약탈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들은 주로 영국이나 프랑스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493년 교황의 중재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또르데씨야스 조약에서 오로지 두 나라에게만 '신대륙과 아프리카' 식민지 경영 독점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특히 적국이었던 에스파냐 포로를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악명을 날렸는데,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의 공격은 해적들을 공공연히 비호하고 나선 영국정부에 대한 에스파냐의 불만이 표출된 사례입니다. 한발 앞서나간 일부 해적들은 여기에 신대륙에 사탕수수농장과 목화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한 아씨엔다(Hacienda) 농장주들에게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흑인노예를 공급해 막대한 이득을 보기도 합니다. 당시의 해적들은 '반 에스파냐 전선'을 결성해 이른바 '바다의 형제들' 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는데, 일부 해적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정부가 내주는 '사략허가서 (Letter of marque)'를 받고 합법적으로 적국 선박을 습격하고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버커니어(Buccaneer)' 라고 불리는데, '사략해적'을 지칭하는 이 단어는 카리브 원주민의 언어인 'buccan' (연기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합니다. 많은 선원들이 "돈도 벌고 애국도 한다." 는 생각에 사략행위를 했는데, 이들은 국가간에 전쟁이 터졌을때 막대한 유지비가 드는 해군보다 더 효율적인 전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함선의 유지와 전투, 선원들의 고용 및 임금을 모두 민간업체에게 위임해서 정부는 그야말로 손안대고 코푸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1655년에 영국이 에스파냐로부터 자메이카를 점령한 이후 섬의 수도인 포트 로얄(Port Royal)에서는 정부의 비호아래 장물을 거래하는 시장이 들어섰으며, 카리브 해적들의 공공연한 비밀본거지 역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8세기에는 이른바 '해적의 황금기' 가 이어지게 됩니다. 많은 사략해적들이 포트 로얄과 토르투가 항에서 장물을 거래했으며, 카리브해에 도처에 널려있는 무인도나 작은 섬을 거점으로 해서 해적행위가 나날이 증가하게 됩니다. 18세기 사략해적의 모습(위)과 사략해적을 모집하는 1796년 11월 12일자 버뮤다 가제트 신문의 광고(아래) 사략해적과 그냥 해적의 차이는 '면허증'을 받았느냐와 받지 않았느냐, 그리고 상대를 골라가며 약탈하느냐 아니면 닥치는대로 약탈하느냐에서 차이가 날뿐 본질은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무면허로, 그것도 자기나라 배까지 털어먹는 해적들에 대해서는 엄단했으며, 사로잡힌 해적들은 교수형당한채 항구나 광장에 몇 달씩 매달려있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해적행위는 끊이지 않았는데, 이는 약탈한 장물을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민주적인' 해적들의 '분빠이'가 가난한 선원들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폭풍으로 침몰한 에스파냐의 보물선이 가라앉아 있는 곳에 보물이 잠들어있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아서, 해적들은 부업으로 보물사냥도 겸했습니다. 해적들의 황금기 기간동안 해적들은 노예무역과 밀무역, 보물인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으며, 일부 해적들은 손을 털고 합법적인 무역상으로 성공하거나 헨리 모건과 같이 식민지의 총독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페인 계승전쟁 이후 해적들이 정부에서 무작위로 발부한 사략허가서를 믿고, 혹은 정부와의 계약을 배신하고 자국의 배를 털어먹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게 되자 각 정부는 18세기 중엽부터 해군을 보내 본격적인 해적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해적들은 작고 빠른 배를 타고 다닌탓에 육중한 정부의 전열함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고, 해적들의 약탈행위는 19세기 중엽까지도 이어져 카리브해를 '해적의 소굴'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특히나 많은 버커니어 가운데서 프랑스의 생말로 항을 본거지로 하던 프랑스 해적들은 코르세어(Corsair)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에스파냐인과 영국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행위와 막대한 부로써 명성이 높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신교도를 국내에서는 박해했지만 바다에서 만큼은 신교도 출신의 코르세어들을 받아들였는데, 비록 우스개 소리지만 코르세어들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100년전에 이미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했다는 말이 돌기도 합니다. 미국 초창기의 사략선인 볼티모어 2호를 재현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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