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인 새누리당과 세월호 유가족이 만난 지 30분 만에 특별법에 대한 입장차만 확인한 채 협상이 결렬됐습니다."
택시기사가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님은 세월호 특별법을 어떻게 보세요?"
"적당히 하고 이제 그만해야지. 지금 경제가 어려운데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거야. 자식 죽은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지금 다들 먹고살기가 힘들잖아요. 듣자하니 유족들이 받는 보상금만 수천억원이라는데, 그게 다 우리 세금이잖아요. 민주당도 국회에 들어가서 할 일을 해야지, 거리에 나와서 저러고 있는 게 정치인이 할 일이야? 지금 빨리 법안 통과 안 시키면 유병언이에게 돈 못 찾아서 또 수천억원을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한다며."
"유족들이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진상조사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 그만 나서게 정치인들이 제 할 일을 해야지. 거리에나 나오고 말이야. 이젠 좀 빨리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내 먹고살기가 바빠서 관심 가질 여유도 없어. 손님. 동부병원 다 왔어요."
택시기사와의 짧은 대화가 끝난 곳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6일간 단식을 했던 '유민 아빠' 김영오(47)씨가 입원한 서울시 동대문구의 서울시립동부병원 앞이었다. 요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2일 오전 이곳 3층 병동에 입원한 김영오씨와의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링거 주사를 팔에 꽂은 김씨가 병상에 누워 있었다. 미음을 먹기 시작한 지 6일째를 맞았지만, 김씨의 팔다리는 여전히 가늘었다. 김씨는 단식을 시작하고서 몸무게가 10㎏가량 줄었고, 단식을 멈춘 뒤에 1㎏이 더 줄어 현재 몸무게가 46㎏이라고 했다. 단식 중단 이후 의사가 하루에 물 1리터씩 섭취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도저히 마셔지지가 않아 몸무게가 더 줄어든 상태라고 했다.
-몸 상태는 어떤가? 인터뷰할 기력은 있는지?
"아직 식사를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미음을 먹고 기운을 꽤 차렸다. 빨리 회복해 다시 광화문으로 나가야 한다."
-아직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왜 다시 광화문에 나가려고 하나?
"지금은 내가 자리를 비워도 다른 분들이 채워주고 있다. 매일 수십명이 동조단식을 하며 지금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세월호가 점점 잊혀질까봐 걱정된다."
-세월호 침몰에 대해 많은 이들이 함께 슬퍼하던 때가 얼마 전이다. 그런데 어느새 세월호가 정쟁의 대상이 됐다.
"단식을 진행하며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글을 쓰면 응원 댓글이 많이 달렸다.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글을 보고 멀리 제주도, 부산에 사는 사람들도 광화문으로 찾아와 동조단식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지난달 22일 입원하고서 갑자기 악성 댓글이 도배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인사만 해도 매장을 하는 수준으로 댓글이 달린다."
-일부 보수 언론이 김영오씨에게 이혼, 노조원, 국궁 취미, 욕설 등을 거론하며 아빠의 자격, 단식의 진정성 등을 문제 삼았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음해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뉴스를 보니까 박영선 위에 문재인, 문재인 위에 김영오라는 이상한 말이 돌고 있더라.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정치도 모르고, 법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매일 특근하고 잔업하던 회사원이고, 그냥 시민이다. 아니, 일반 시민도 못 되는 영세민이다. 내 통장을 보면 10원도 없다. 마이너스 통장만 있다. 십수년간 계속 빚만 갚으며 살아왔다. 일반 시민도 못 되는 사람이 자식이 억울하게 죽어서 오장육부가 뒤집어졌는데, 욕도 못하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억울하게 죽은 딸이 왜 죽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질질 끄니깐,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런 내게 이제 와서 정치 성향이 있다며 음해를 한다."
-지금은 행동과 발언 하나하나가 뉴스가 되고 있다. 그만큼 주목을 받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진 모든 인터뷰에 응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어떤 말이 어떻게 꼬투리가 잡혀 공격이 들어올지 예상할 수 없다. 이 인터뷰도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나 개인이 욕먹는 것은 상관없다. 그런데 내가 말을 잘못하면 우리 유가족들의 뜻이 폄하되고,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조심한다."
지난해 7월 머리털 나고 나서 처음 정규직 되고 노조 자동가입 유민·유나에게 전화해 "대학 등록금 댈 수 있으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과 마음을 믿었다 유족들 위로하고 어깨 감쌀 때도 그 순수성 의심하지 않았다 6월4일부터 태도가 바뀌었다 7·30 이후 우린 떼쓰는 사람 됐다
매일 소주 한병과 담배, 그리고 국궁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소속인 것이 알려지면서 특정한 정치성향이 있어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충청남도 아산의 자동차 차체 조립업체인 명신에 2012년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젊었을 땐 장사도 해봤고, 건설현장 일용직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나이 들어서는 비교적 오래 머물 수 있는 직장을 찾았지만, 늘 비정규직을 전전했다. 정규직 한번 돼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7월22일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정규직이 됐고, 노조에도 자동 가입됐다. 회사노조가 그해 8월에 금속노조에 가입해 자연스레 금속노조원이 됐다. 내게 '금속노조 소속'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됐다는 정도의 의미다."
-금속노조가 주최하는 집회에 참여한 적은 없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주말특근을 빠진 적이 거의 없다. 주말특근 이외에 평일에도 거의 매일 잔업을 했다. 우리 회사는 하루 2교대로 일한다. 한 주는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고, 그다음 주엔 저녁 8시부터 오전 8시까지 근무다. 하루 8시간 정규 근무에 잔업 4시간을 합쳐 하루 12시간씩 근무했다. 그렇게 잔업, 특근을 꽉 채워야 비정규직일 경우 한달에 200만원 정도 받는다. 잔업, 특근을 빼면 월급이 180만원 정도다. 정규직이 되면 월급이 100만원 정도 오르는데 정말 인생이 피는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비정규직도 200만원 가까이 받지만, 불과 7, 8년 전만 해도 한달에 120만원을 겨우 받았다. 그 돈으로 빚 갚고, 양육비 부쳐주면 남는 돈이 없었다. 아직 갚을 빚이 남았지만, 정규직이 돼서 두 딸에게 그동안 못 해준 것들을 해주며 잘 살아볼 생각이었다."
-혹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투표는 했나.
"그날도 특근을 하느라 투표를 하지 못했다. 사실 최근 십수년간 투표를 한 적이 없다. 선거날에 근무를 해야 했다."
-자꾸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의혹 제기를 언급해 미안하지만, 이왕 시작한 해명을 이어가보려 한다. <조선일보>가 양육비는 주지 않으면서 비싼 여가활동인 국궁을 즐긴다고 보도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충청남도 궁도 아산정'이라고 검색하면 전화번호가 나온다. 거기에 전화하면 내가 얼마를 내고 운동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최소한의 사실관계 정도는 확인하고 기사를 썼으면 한다. 국궁을 시작한 시기는 2012년 7월28일이다. 그땐 지금 직장에 다니면서 매달 양육비를 보내고, 빚도 조금씩 갚아 나가고 있었다. 국궁에 대해 몇몇 언론은 입회비만 수십만원에 달한다고 보도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린 입회비가 없고, 한달에 3만원만 내면 아무 때나 와서 운동할 수 있다. 또 처음 가입하면 선배들이 활을 빌려주고, 자신들이 쓰던 화살도 나눠 준다. 그렇게 운동하다 돈 모아서 활 하나 샀고, 화살은 물려받은 것이 많고 쏜 걸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에 별로 살 필요가 없었다. 운동을 하려고 특별히 마음을 먹게 된 계기도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이혼하고서 10여년간 몸을 돌보지 못했다. 하루에 12시간씩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무척 피곤했고, 또 외로웠다. 그래서 자기 전에 소주를 한병씩 마셨다. 돈도 없으니 안주는 담배가 전부였다. 부끄럽지만 담배 안주에 소주 한병이 인생의 소소한 낙이었다. 나중엔 그게 습관이 돼서 매일 소주 한병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재작년에 회사를 옮기려고 아산에 와보니, 인근에 활터가 눈에 띄었다. 거기가 아산정이었다. 물어보니 한달에 3만원이면, 밤이든 낮이든 아무 때나 와서 운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하루에 소주 한병씩 마셔도 한달이면 3만원이 넘는다. 그럴 바엔 술 대신 운동을 해서 건강을 챙겨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에 한동안 빠져 지냈다. 틈틈이 활터에 들러 땀을 적시며 운동했다. 운동에 열중하면서 혼자 술 마시는 버릇을 고쳤다. 건강을 생각한 것은 딸들의 영향도 컸다. 유민이는 평소 아빠 건강을 많이 걱정했다. 만날 때마다 담배를 끊으라고 권유하는 유민이에게 '전교 50등 안에 들면 아빠가 담배 끊을게'라고 약속했다. 어느 날 유민이가 '아빠 나 전교 70등 안에 들었는데, 꼭 50등 안에 들어야 끊을 거야?'라고 물었다. 그래서 담배를 더 피우고 싶은 마음에 '약속은 약속이지. 다음에 50등 안에 들면 꼭 담배 끊을게'라고 답했다. 그렇게 내 건강을 걱정했던 딸이었다."
사고 당일부터 실종자 가족 행세 하던 경찰들
-인터넷에선 진도와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하는 동영상이 나돌고 있다.
"욕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있었다. 일단 남경필 (당시) 국회의원이 잡고 있던 마이크를 갑자기 뺏은 동영상이 있다. 사고 다음날이었다. 팽목항에 학생 시신 하나가 도착했다. 119구급차가 시신을 싣기 위해 팽목항에 가야 하는데, 정부 요원들의 차량과 취재차량들이 어지러이 주차해 길을 막고 있었다. 119구급차가 도저히 팽목항에 닿을 수가 없었고, 결국 시신을 싣고 병원 영안실로 가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그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울화통이 터졌다. 이런 상황이면 생존자가 나와도 병원에 가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구나 싶어서 그걸 알리려고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때 남경필 의원이 잡고 있던 마이크를 무작정 빼앗아 말을 한 것이다. 감정이 격해 있어서 욕설이 같이 나왔다."
-같은 날 대통령을 향해 욕을 했다는 동영상도 있다.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했다는 것은 오해이자 왜곡이다. 당시 영상을 잘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고 다음날 진도체육관에 와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구조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일어나려 했지만, 뒤에서 정보과 형사 네명이 계속 옷자락을 잡아 주저앉혔다. 정말 절박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걸 막는 형사들에게 뒤돌며 욕을 한 것이다."
-그때 대통령에게 꼭 하고픈 얘기가 무엇이었나.
"해군 해난구조대(SSU)나 전 특수부대(UDT) 잠수사, 민간잠수사들이 사고 해역에 모여들었지만, 해경이 통제해 구조 작업을 하지 못했다. 구조 장비도 없는 해경이 다른 잠수사들의 구조 작업마저 막고 있는 셈이었다. 구조 지휘체계의 완전한 혼선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그 혼선을 바로잡고,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구조에 나서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가족들의 공통적인 바람이었다. 구조 지휘체계의 혼선은 지금도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사안으로 남아 있다."
-정보과 형사들이 왜 말을 못하게 잡았나.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고 당일부터 실종자 가족 행세를 하는 경찰들이 있었다. 그날 우리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지만, 그래도 서로 싸우면 안 된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런데 가족 중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으면, 삿대질과 욕을 하면서 '내려와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상해서 누구 가족이냐고 캐물으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확인해 보면 유가족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서 신분증을 확인해보면 경찰이었다. 자원봉사 조끼 입고 정보 캐는 경찰들도 있었다. 정부가 실종자, 유가족들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이간질을 하고, 사찰을 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지난달 20일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했다는 논란도 있다.
"처음 3일만 하자던 단식이 38일째를 맞은 날,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하러 청와대에 갔다. 참사 한달 뒤인 5월16일 유가족 17명을 만난 자리에서 '언제든 다시 만나겠다', '진상조사에 유가족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대로 만나러 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 앞 분수에서 길을 못 건너게 막았다. 일반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도 다니는 길을 못 가게 막았다. 37일을 굶은 내가 무슨 위해가 된다고 길을 막을까. 청와대 민원실에 면담 신청서라도 내고 갈 테니 지나가게 해달라고 해도, 길을 막아섰다. 쇠약해진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 두 시간 넘게 길바닥에서 하소연을 해도 경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도 분통이 터지는데, 일선 경찰들 뒤에서 지휘하던 경호원이 유족들을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때 감정이 복받쳐 욕을 했다."
-46일간 단식할 거란 예상을 했나.
"그렇지 않다. 처음 7월14일 유가족 15명이 단식을 시작한 이유는 16일에 있을 여야 협상에서 특별법 통과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구가 묵살되자, 7월24일 세월호 참사 100일 위령제까지는 특별법을 제정해줄 거라 예상하고, 열흘간 단식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변화가 없었다. 유가족들 사이에선 이젠 단식을 멈추고, 릴레이 단식을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남아 단식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8월15일에 교황의 시복미사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니, 그 전까진 우리 요구를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 열흘간 단식도 너무 힘들어 22일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두렵고 겁이 났다.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단식이 연장되고, 교황이 방문한 뒤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오래 단식할 계획이 없었다. 그저 상황이 나를 이렇게 몰고 갔을 뿐이다."
유나가 혼자 경찰서를 찾아간 이유
-단식을 그만둔 이유가 둘째 딸인 유나에게 미안해서라고 했다.
"쓰러져 병원에 오기 전부터 유나가 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땐 괜찮다고 했는데, 병원에 와서 단식을 이어갈 때 유나가 '아빠랑 밥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도 내 걱정으로 쓰러지다시피 했다. 내가 5남1녀 중 막내라서 눈에 밟힌 모양이다."
-평소에도 유나에게 미안한 것이 있었는지.
"유민이뿐만이 아니라 유나에게도 잘 못 해줬다. 아무리 이혼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자주 보고 챙겨주며 살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남은 인생을 유나를 위해 살 거다. 그런데 그 전에 유민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야 한다. 그건 유나도 이해한다. 다만 내가 쓰러지고 나서 유나가 많이 걱정했다. 유나가 아빠랑 닭도리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식사를 할 수 없지만, 빨리 회복해 딸이랑 닭도리탕을 먹을 거다."
-아버지에게 두 딸은 어떤 존재였나.
"유나는 활달했고, 유민이는 조용했다. 용돈을 주고 보면, 유나는 용돈을 다 쓰는데, 유민이는 십원도 안 쓴 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달라서 그런지 한 살 터울의 자매가 사이좋게 잘 지냈다. 유민이는 옆집에서 놀다가도 밤이 늦으면 동생을 불렀다. 그러면 유나가 가서 '언니야 가자'며 집에 데려왔다. 유민이는 속이 깊은 아이였다. 엄마에게 '시집 안 가고 돈 벌어서 엄마랑 살 거다'고 했고, 내게도 '아빠 힘들게 사는데 대학 등록금 마련하려면 힘들 테니,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직장생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 무조건 대학에 가라고 말해도 잘 듣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정규직이 돼서 자녀학자금 지원을 받게 됐다. 정규직이 확정되자마자 유민, 유나에게 전화해 '아빠 정규직 됐어. 대학 등록금 공짜로 댈 수 있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꼭 대학 가라'고 말했다. 정규직이 돼서 제일 기쁜 순간이었다. 지난 추석 때 유나, 유민이를 만나서 장래희망을 묻기도 했다. 유나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고 했고, 유민이는 그때도 조용했다. 그래서 '아빠는 유민이가 은행 같은 곳에 갔으면 좋겠다. 수학 잘하니까 어울릴 것 같아. 대학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라고 말했더니, 유민이도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아빠를 음해하는 보도에 맞서 결국 둘째 딸마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며 언론에 직접 나왔다.
"성격으로 보면 유나가 유민이보다 아빠를 더 닮았다. 진도체육관에 있던 어느 날 유민이 엄마와 같이 있는데 유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대뜸 경찰서에 있다고 했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유나가 유가족을 비방하는 악성댓글을 쓴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고 경찰서에 간 것이다. 사실 그때 좀 혼냈다. 성격이 아빠 닮아서 걱정이 좀 된다. 하나 남은 딸마저 잘못될까 봐, 위험한 곳에 혼자 다니지 말라고 좀 혼냈다. 그렇게 유나는 성격이 좀 활달하다. 그런 유나가 언니 장례식이 끝나고, 성격이 바뀌었다. 특히 아침 일찍 일어나곤 했던 유나가 정오가 돼도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 엄마가 한두시에 겨우 깨워 학교에 도장만 찍고 돌아오곤 했다. 최근 아이 엄마가 유민이 생각이 나서 밤새 펑펑 우는 것을 보고, 유나가 다시 예전처럼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은 모양인데, 그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이혼을 하고서도 아이 엄마와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만났나.
"명절과 휴가, 아이들 생일 때 만났다. 연락은 한두달에 한번씩 하곤 했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자주 보진 못했지만, 휴가를 같이 보내곤 했다. 여행도 세차례 함께 다녀왔다. 아이 엄마와 두 딸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과 제부도, 포항의 구룡포에 갔었다.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신세이기 때문에 한번 만나거나 여행을 다녀오면 빚에 더 쪼들린다. 빚을 쪼개고 쪼개서 함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올해 5월3일에도 같이 놀러 가려고 충남 태안 신진도의 펜션을 예약했다. 유민이를 데리고 몇번 낚시를 데려갔더니 무척 좋아했다. 신진도에서 같이 낚시하고, 고기도 구워주려 했다."
-여행에 아이들뿐 아니라 이혼한 전부인도 동행했나.
"함께 다녀오곤 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함께 지내던 유가족들이 우리를 보고 이혼하지 않은 부부 같다고 말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일부 언론에선 우리가 십수년간 연락 끊고 지냈다고 보도했다. 그랬으면 사고 당일에 아이 엄마가 내게 바로 연락을 했겠나. 내 통장을 보면 양육비와 함께 유민이, 유나와 아이 엄마의 휴대폰 요금도 빠져나간 기록이 있다. 장사하는 아이 엄마의 휴대폰을 내가 사주고 통신요금을 2~3년간 내준 것이다. 서로 등지고 살았으면 아이 엄마의 통신요금을 왜 내가 내줬겠나."
대통령 향한 욕설은 왜곡이다 당시 할 말 있어 일어나려는데 뒤에서 정보과 형사 네 명이 계속 옷자락 잡아 주저앉혔다 형사들에게 뒤돌며 욕을 한 것 지금이야 모여서 싸우고 있으니 얼마나 아픈지 잘 모른다 나중에 혼자 남겨졌을 때가 문제 그때가 되면 완전히 미칠 거다 진상조사만큼 좋은 치료제 없다
세월호특별법 수사권·기소권에 대한 생각
-사고 소식은 어떻게 접했나.
"유민이가 수학여행을 간다는 얘길 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말하면 용돈 챙겨주고 그래야 하니까, 일부러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만큼 속 깊은 아이다. 그런데 4월16일 오전 야간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아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이가 탄 배가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깜짝 놀라 티브이를 켰더니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이 떴다. 너무 다행이었다. 아이 엄마는 자기가 유민이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 엄마에게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문자를 하고, 오후 두 시까지 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300명이 아직 배 안에 남아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오전에 본 보도가 오보였던 것이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진도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다. 유민이가 뒤집힌 배 안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고 있는 동안 안심하고 잠을 잤다니.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던지. 그때의 오보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비롯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낱낱이 조사를 해야 한다. 부모인 나도 안심하고 잠을 잤다. 정부와 구조 당국은 오죽했겠나."
-유민이 장례를 치르고 잠시 회사로 복직했다고 들었다.
"일을 하면 괴로움을 좀 잊을 수 있단 얘기를 듣고 다시 출근을 했다. 하지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꾸 배가 엎어져 안에서 아이들이 아우성치고, 엄마 아빠를 부르며 우는 모습이 그려졌다. 일하다 말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다가 누가 다가오면 울지 않은 척하려고 도망다녔다. 그게 너무 싫었다. 퇴근하면 바로 안산의 분향소로 가서 밤을 지새웠다. 거기에 있을 때가 유일하게 마음이 편했다. 분향소에 밤새 있다가 차에서 쪽잠을 자고, 바로 회사로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20여일을 보내다 휴직을 했다."
-세월호 구조는 총체적 난국이란 평가를 받았다.
"나는 대형 사고가 나면 정부가 구조를 제일 잘하는 팀들을 불러와 빨리빨리 구조해주는 줄 알았다. 실제로 정부는 사상 최대의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발표했고, 언론도 그렇게 보도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 가보면 쳐다만 보고 있고, 접근도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상황 파악도 못해 초기엔 조류가 약해지는 시기도 놓쳤다. 전직 구조대 요원들이나 민간잠수사들이 자발적으로 구조를 하겠다고 찾아와도 차단만 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해도 공중파 방송사들은 일절 다루지 않았다. 그때 처음 고립됐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사실 언론에 대해 잘 몰랐다. 혼자 살면서 접했던 언론이 공중파 방송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방송사가 보도하는 내용이 곧 사실이고 법인 줄 알았다. 간혹 신문을 보면 조중동만 봤다. 이런 언론인 줄 몰랐다. 언론이 제발 제대로 진실을 보도해줬으면 좋겠다."
-유민이가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는 어땠나.
"유민이 시신이 5월8일에 수습됐다. 명찰과 학생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빠져나오려고 힘쓰다가 손톱이 빠지거나 멍이 들곤 했지만, 유민이는 그런 흔적도 없었다. 상처 입은 곳이 하나 없었다. 오히려 살이 빠져 있었다. 물속에 있어 퉁퉁 불었을 거라 예상했는데, 정반대였다. 피부를 만지면 손마디가 부들부들했다. 그래서 부검을 해보려는 생각도 했다. 아이가 에어포켓 등에서 며칠 버티다가 죽은 것이 아닐까, 물에 빠지기 전에 저체온증이 걸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어두운 곳에서 엄마 아빠 불러가며 얼마나 고통스럽게 울고불고했을까. 살려달라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은 딸의 몸에 차마 칼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검은 포기했다."
-아까 법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세월호특별법에 수사권, 기소권이 꼭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수사권, 기소권이라는 용어 자체가 낯선 사람도 많다.
"유가족들이 변호사와 함께 당시 레이더나 무전기록 자료를 요청하면, 구조 당국은 제출을 거부하거나 일부 삭제하고 편집한 내용만을 전해준다. 국회에서 진행한 세월호 국정조사를 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진짜 중요한 자료는 확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사권이 있어야 한다. 수사한 내용을 재판에 넘기려면 기소권이 있어야 한다. 기존 검찰의 수사만 봐도, 독립적인 수사권한이 있는 진상조사위원회가 필요하단 것이 입증된다. 기존에 진행된 검찰의 수사를 보면, 유병언 회장 한명만을 뒤쫓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유병언은 청해진해운의 회장으로서의 책임만 있을 뿐이다. 그 배의 운항을 허가해준 책임, 구조 작업에 실패한 책임은 모두 정부에 있다."
교황을 만나던 감격적인 순간
-정부와 여당은 진상조사위 구성에 있어 충분히 유족의 뜻을 배려했고, 특별검사 등을 통해 충분히 진상을 밝힐 수 있단 입장이다. 결국 진상을 밝히자는 뜻은 같은데, 방법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신뢰의 문제다. 대통령이 임명한 특별검사가 정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까. 유족들을 대하는 자세만 봐도 그럴 의지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나는 대통령이 눈물의 기자회견을 할 때, 그 마음을 믿었다. 이 참사를 진심으로 슬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진상조사에 유가족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도 믿었다. 유족들을 찾아와 위로하고 어깨를 감싸는 행동도 그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6월4일(지방선거) 이후 태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7월30일 재보궐선거 이후엔 우리를 떼쓰는 사람, 억지를 부리는 사람 취급을 했다. 우리는 선거에 완전히 이용당했다."
-대통령과 여당은 지난 대선 이전에도 쌍용차 정리해고를 위한 기획부도 의혹에 대해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선거가 끝나고 돌아온 것은 대한문 앞 분향소 강제철거였다. 대형 참사의 유가족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구지하철 참사의 유가족들은 지금 암매장꾼으로 몰려 있다.(<한겨레> 5월10일치 보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몰랐다. 내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인 것 같다. 나도 처음엔 정부가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두달여간 거리에서 싸워보니까, 정부를 통해선 절대 진실을 밝히기 힘들 거라는 것을 느꼈다. 한번 감추기 시작하면 파헤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독립적인 수사권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민 아빠가 교황을 만난 것이 국제적으로 화제가 됐다.
"교황이 방한하면 광화문 대로를 따라 카퍼레이드를 한다고 들었다. 교황이 쓴 책을 읽어보니 약자의 편이더라. 그래서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카퍼레이드 도중에 차에서 내려 직접 만나러 와주셨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대통령도 외면한 세월호 유가족을 직접 만나서 안아주고 위로해주셨다. 방한 기간 내내 우리 유가족들을 보듬어주셨다. 사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성당에 가볼 생각을 하고 있다. 광화문광장에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많이 오셔서 동조 단식을 하신다. 도철 스님도 동조 단식을 하시고, 자승 스님도 찾아오는 등 다른 종교도 고맙지만, 천주교에 정말 큰 빚을 졌다."
"지금 상황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가 더 커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길바닥에서 굶고 자며 싸워도 들어주질 않는다. 진실을 밝히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온갖 음해를 한다. 지금이야 모여 있고 싸우고 있으니까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 혼자 남겨졌을 때가 문제다. 그때가 되면 완전히 미친다. 우리 유가족들에겐 제대로 된 진상조사만큼 좋은 치료제가 없다."
요즘 천명 넘는 학생들이 "아빠"라 불러
-그래도 광화문에 많은 연대의 손길이 보인다.
"보수 언론이 나에게 아빠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요즘 내게 아빠라고 부르는 학생들이 천명이 넘는다. 광화문에 있으면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다들 '아빠'라고 부른다. 자신들이 아들, 딸이 되겠다며 힘내라고 보내온 편지만 수백통이다. 아무 연고도 없고 정치성향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찾아와 동조 단식을 하고, 자원봉사를 한다. 재난으로 인해 서로를 보듬어주는 공동체가 형성이 됐다. 여기에서 희망을 얻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유민 아빠가 머물렀던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그곳에선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회와 국민대책회의가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를 향해 3보1배를 하고 있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485만명의 서명을 담아 청와대에 전달한다는 취지였다. 이날 3보1배는 50미터도 내딛지 못하고 경찰에 제지당했다. 경찰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3보1배를 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4시간이 넘도록 3보1배를 이어 나갔다. 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고 벽을 세워도 제자리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들은 제자리걸음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