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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 변호사의 군대이야기
게시물ID : humorbest_3578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그네
추천 : 139
조회수 : 20026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1/05/26 20:33:25
원본글 작성시간 : 2011/05/26 17:39:30

'국방일보' 기사중에서

휴가 하루도 안 간 10년半 “군대는 내고향” 

20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1991년 9월 30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전역신고를 위해 이발소에 들러 머리카락을 자른 뒤 군단장실로 올라갔다. 예하 사단장과 여단장들이 다 모여 계셨다. 

 평소 아껴주시던 여단장 한 분이 농담 삼아 말씀하셨다. “법무참모 한 사람 전역한다고 예하 사단장과 여단장을 불러 모아 전역식하는 군단장도 군단장이지만, 전입도 아니고 전역신고하는 날 머리에 각 세우고 오는 자도 범상한 인간은 아니야.”

 전역신고를 마친 뒤에도 평소처럼 결재도 받고 오후 5시까지 근무했다. 군문을 나선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정문 위병소를 통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집으로 오느라 창동 검문소를 지나는데, 내 차를 향해 헌병들이 ‘받들어총’을 했다. “아, 드디어 전원책의 군 생활이 끝났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하는 일이 적성이나 관심사와 잘 맞아 떨어질 때 흔히 “체질이다”라는 말을 한다. 나에게 군 생활은 ‘체질’이었다. 군 법무관 시험에 합격한 뒤 대부분의 복무 기간을 법무참모라는 보직을 맡아 보냈지만, 주변에서는 나를 두고 “보병 같은 놈”이라 부르곤 했다. 

 처음 광주 보병학교에서 16주간 훈련받을 때도 그랬다. 단기간에 장교를 만들어 내야 하니 훈련 강도가 속된 말로 ‘뻑시기’ 그지 없었다. 동기들 몇몇은 ‘법무장교를 보병장교처럼 훈련시키면 되느냐’고 불만도 털어놓았지만 솔직히 나는 재미있었다. 30㎏ 군장을 메고 60㎞를 걷는 행군도 ‘몸에 좋은 운동이다’ 생각하며 걸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생에 칼 쓰는 무인이 아니었을까.’

 자대배치를 받을 때도 그랬다. 머리 잘 돌아가는 친구들은 죄다 해군·공군을 지원했다. 육군과 달리 대도시 인근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으니 지원자가 몰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달랐다. 전역하면 어차피 대도시에서 변호사 생활을 할 텐데 군 생활을 굳이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대도시에서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소원대로 산 좋고 공기 좋은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전방으로 가면서 품었던 소망 가운데 하나는 지피(GP) 생활을 경험하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사단급·군단급 제대에서 일하다 보니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짬밥’이 쌓이고 선후배들이 좀 생긴 말년에 가서야 결국 소원을 풀었다. 군단 참모한테 협조를 구해 1989년 가을부터 1990년 초까지 3개월 동안 주말마다 지피를 한 군데씩 방문해 장병들과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을 것 같다. 군단 법무참모가 온다니 일선 지휘관들은 얼마나 긴장했을 것이며, 아침부터 대청소다 뭐다 시달렸을 병사들은 또 얼마나 심신이 고달팠겠는가. 

 어쨌든 군 생활을 하면서 무던히도 많이 돌아다녔다. 예하 부대를 돌아보면서 부대가 운영되는 모습이나 장병들이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2군수지원사령부에 있을 때 예하의 독립중대를 불시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해인가 설 연휴 때 독립중대 대여섯 곳을 기습방문했다. 그런데 부대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니 ‘개구멍’이 하나씩은 다 있는 것이었다. 일직 근무자들을 불러 혼쭐을 내고는 사령부에 보고해 구멍을 전부 막아 버렸다. 원성이 자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심 잃을 일만 벌이고 다닌 것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내무반이나 장병들 편의시설이 굉장히 열악했다. 그래서 30사단에 있을 때는 삼성전자와 자매결연을 맺어 병사들 내무반(지금의 생활관)에 TV를 한 대씩 설치해 줬다. 바깥의 사회단체나 변호사들한테 부탁해 전령들이 타고 다닐 자전거를 기증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함께 일했던 장교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꽤 있는 편이었다. 

 요즘은 인기를 전국적으로 누리는 편이다. 팬클럽이 몇 개 있는데, 가장 큰 곳은 회원이 1만 명이 넘는다. 운영진들이 가끔 찾아온다. 이분들 대부분은 군 가산점 문제 때문에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이다. 군 가산점 문제는 흔히 말하듯 예비역 남성의 권리 문제가 아니다. 이건 우리 공동체의 기본적인 법도를 세우기 위한 도덕재무장 운동이다. 나라를 위해 2년 동안 희생했는데, 그것을 두고 특별한 희생이 아니라니, 얼마나 기가 막힌가. 국가기관이 말장난해서는 안 된다. 

 군을 다녀온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특혜가 아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에게 공동체가 대우하고 배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외국은 그렇지 않다는데, 독일이나 다른 징병제 국가들을 보자. 군 전역자들을 가장 먼저 취업시켜 준다. 타이완에서는 군에 안 가는 사람에게 국방세를 받아 국방 재원으로 사용한다.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산림청이나 소방서의 경우 군필자가 아니면 들어갈 여지 자체가 없다. 군 가산점이 특혜·차별이라는 건 대체 무슨 논리에서 나온 것인가.

 물론 군이 일방적인 희생만 요구하는 조직은 아니다. 나 역시 소중한 많은 것을 군에서 얻었다. 절친한 벗과 선후배들뿐만 아니라 인내심·단결력·충성심 같은 소중한 덕목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다. 다시 말해 ‘군복을 입고 있는 동안은 가족을 위해, 정의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 이런 ‘사생관’이 바로 세워져야 비로소 죽음 앞에 당당해질 수 있다. 그러면 전역을 한 뒤에는 불의 앞에서 두려움과 타협 없이 맞설 수 있게 된다.

 내가 군에서 보낸 시간은 10년 6개월이다. 그 사이 단 하루도 휴가를 안 갔다. 군 생활을 진정으로 즐겼던 것 같다. 요즘은 군에서 강연 요청이 자주 들어오는데, 위병소를 통과하면서 경례를 받는 순간부터 편안해진다. 명절날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기다리는 고향집에 온 것처럼 말이다. 강연장에서 마주치는 장병들 하나하나가 전부 사랑스럽다. 지난달에는 문무대에서 학군사관 후보생 2000명을 상대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청춘들이여, 의기소침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여러분이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나.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자부심을 가져라. 여러분 하나하나가 위대한 대한민국을 일궈가는 진정한 영웅이다.” 



10년의 군복무동안 휴가를 안가셨다는게... ㅎㄷㄷ

이분이 군가산점 토론에 나와서 열을내시는것도
정말 군대, 군장병에대한 애착이 있기에 가능한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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