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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적금을 깨고서
게시물ID : lovestory_462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HakenC
추천 : 14
조회수 : 7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9/25 12:49:15

이제 몇달 안남으셨는데 해약하시게요...? 
은행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돈을 다시 어머니 통장으로 이체시켰습니다.

몇주 못버티실거란 병원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를 포함해 모든 치료를 포기했어도
아직 아버지는 괜찮으십니다. 오유 분들의 기도가 기적을 불러온거겠죠.

이제 약소하게나마 보내드리던 용돈 외에도 모든 생활비를 제가 책임져야 하기에, 마지막
하나 남아있던 적금을 깼습니다.

무거운 표정으로 적금을 깨야겠다고 하는 제 말에, 적금은 또 넣으면 된다고 흔쾌히 고개
를 끄덕인 제 아내가 참 사랑스럽네요.





어린 시절 부유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제 기억에, 가장 오래된 기억은 유치원 다닐
때군요.

집이 없어서 울산 이모집에 얹혀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유치원은 부산에 있어서 매일 아
버지 트럭에 타고 유치원을 오갔던 기억이 납니다. 울산-부산이란 거리 때문에 이따금 아
버지는 늦게 오시곤 하셨었는데, 유치원 놀이터 그네에 앉아 친구들은 먼저 집에 가고 저
만 홀로 있다가 아버지 품에 안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그래도 마냥 아버지 어머니가 좋았었지요. 

유치원비를 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유치원마저 그만두고선 한달에 보름은 남해 외할머니
댁에, 나머지 보름은 부산 친할머니 댁에서 지내야했고 부모님은 여관 달방에서 지내며 일
을 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군대 취사병이셨던 아버지는, 한달 30일 중 단 하루 부모님 옆에서 잤던 절 위해 도너츠를
구워주곤 하셨습니다. 석유 곤로가 생각나네요.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동그란 석
유 곤로요.

하지만 그 도너츠가 싫었습니다. 이걸 먹고나면 또 엄마 아빠와 헤어져 있어야된다는 걸
어린 저도 알았던 거겠죠.

그리고 초등학교 들어가던 때 단칸방 월세나마 세식구 모여 살 수 있는 집이 생겼고, 전
그게 참 좋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 어머니의 노력에 비하면 제 적금 쯤은... 전 아직 젊으니 아무 상관 없지요.



아버지는... 아직 투병중이십니다. 지난 8일이 아버지 생신이셨는데, 제발 생신까지만 살
아계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는데, 그걸 훌쩍 넘어섰네요.

잠들면서도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무슨 일이라도 날까 불안해하며, 회사 집 회사 집만 오
가며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지치면 안된다, 지치지 말자 혼자 독백하며, 누구보다 힘든 사람은 아버지 본인이라 생각하
며, 매일 퇴근길에 전화도 드리고 애써 좋은 말 기쁜 말만 하려 애를 씁니다.

이제 곧 추석이네요. 

이번 추석에는 비록 저장홍시라도, 아버지 좋아하시는 홍시를 좀 사가려고 합니다.
사가서 세식구, 아니 이제 네식구 둥글게 모여앉아 홍시를 까먹으며 추석 특집 프로그램도
보고, 맛난 것도 먹고 그러렵니다.

모두 지나고나면 어차피 후회만이 남겠지만, 이 순간순간만큼은 후회가 없도록, 그렇게 노력
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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