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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베르트의 16번째 문제에 대해.
게시물ID : humorstory_358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ister
추천 : 4
조회수 : 1256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03/11/30 19:57:08
그 기사는 사실인 것 같네요.. 그래도 번역이 제대로 안되었고 문제의 난이도가 지나치게 부풀려 졌다는데 올인입니다. 요 며칠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학 기사가 있었으니, 유명한 힐베르트의 23 문제 가운데 하나를 22살의 대학생이 풀었다는 기사였습니다. "힐버트의 기본 문제 16번"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죄송한 말이지만 저는 그 문제가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문제의 내용이 알고 싶은 분은 힐베르트의 23 문제를 다룬 사이트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The Mathematical Problems of David Hilbert가 괜찮을 듯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영어로 된 사이트입니다.

최근에 유명한 미해결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거나 해결에 가까이 가는 큰 진보들이 많이 있었지만, 거의 뉴스로 다루어지지 않다가 이 기사가 갑자기 뜬 것은 아마도 22살의 여성 수학자가 화제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젊은 여성이 세계적인 천재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는 것만큼 장사가 되는 사건도 드물 테니까요.

언론의 이런 태도야 늘상 보아오던 일이니 넘어가기로 하고, 저 기사와 관련된 얘기나 몇 가지 하죠.

연합통신의 저 기사는 영국 BBC에 실린 기사를 토대로 번역한 것인데,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당연하게도(?) 수학 용어 번역에 틀린 곳이 있습니다.

"다항식 미분 방정식 한계 순환"이란 구절은 명사만 잔뜩 나열해 놓은 것이 척 보기에도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게 뭘까 하고 찾아보니 "boundary cycles for polynomial differential equations"를 번역한 것이더군요.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이 구절의 번역이 "다항식 미분 방정식 한계 순환"이 아니란 것은 알겠습니다. 물론 "여러 이름을 가진 특이한 균등화를 위한 한계 자전거"보다는 월등히 우수한 번역입니다만. ^^

우선 boundary는 "한계"가 아니라 "경계"이고 "cycle"은 뭐라 번역하기가 힘든데 그냥 "사이클"로 두는 게 차라니 나아 보입니다. 따라서, "다항 미분 방정식에 대한 경계 사이클" 정도가 그나마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게 뭐냐고요? 아까 말씀 드렸잖습니까, 저도 모른다고. ^^;

저 기사에 대해 또 하나 지적할 점은, "힐버트의 기본 문제"라는 구절에 쓰인 "기본"입니다. 마치 이 문제들이 대단히 elementary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 문제가 20세기 수학을 이끌어 간 바탕이 된 문제라는 뜻에서 기본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내용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죠.

현대의 수학은 수많은 분야들이 너무나 크게 발전하여 이쪽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저쪽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학자들이 게으른 것 아니냐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수학과에 입학하셔서 공부를 해 보시면 압니다. ^^; 아무튼 BBC 기사에는 "기본"에 해당하는 단어가 안 보이던데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넣은 걸까요?

이번에 풀렸다고 기사에 실린 문제는 "힐베르트의 23 문제" 가운데 16번째 것으로 이 문제들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힐베르트가 제시한 문제들을 말합니다.

19세기 말이 끝나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던 1900년.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다비트 힐베르트(독일 사람이니 데이비드가 아니라 다비트라고 읽어야겠지요)는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기조 연설을 부탁 받습니다.

보통 이런 곳에서 하는 연설이란 기존의 수학적 발견들을 언급하면서 최근의 수학 동향을 정리하는 것이 보통인데, 때가 때인 만큼 힐베르트는 독특한 연설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를 이끌어 갈 중요한 문제들을 제시하는 것이었죠.

요즘은 아무리 위대한 수학자라도 수학의 모든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21세기가 시작될 때 이런 이벤트(?)를 제시할 수학자가 사실상 없었지만, 힐베르트 시대만 해도 한 사람의 수학자가 수학 전 영역을 이해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 주인공이 힐베르트 정도 되니까 가능한 일이었지만요. 그리고 실제로 이 문제들은 20세기 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걸 보면 힐베르트가 과연 대가는 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힐베르트가 제시한 23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앞서 알려 드린 사이트를 이용하세요. 영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어차피 한글로 되어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집니다. 힐베르트의 문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일급 수학자들을 위한 진짜 전문적인 수학 문제니까, 중요한 것은 영어냐 한글이냐가 아니라 거기에 쓰인 용어가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도 제가 전공한 분야말고는 다른 문제들은 거의 아무 것도 모릅니다.

기사에서는 힐베르트의 16번째 문제에 대해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했는데, 저건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이 심합니다. 수학 역사에는 수많은 미해결 문제들이 있으며, 아직 풀지 않은 이상 그 모든 문제들은 이미 풀린 문제들에 비해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힐베르트의 문제는 20세기를 이끌어 갈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원론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제들이 "...인 값을 구하라", "...임을 증명하라"라는 식의 구체적인 질문이 아니라, "...임을 보이는 방법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원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매우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런 걸 "역사상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하기는 좀 이상하죠.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요구하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라기보다는 "심오한 문제"라는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기사 자체에 대해서는 대충 이 정도로 하고, 이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우선 "출제자는 이 문제의 답을 알았을 것 아니냐"는 의문이 아주 많더군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접하는 어려운 수학 문제란 대개 "문제집에 실려 있는 난이도 상인 문제"일 테니까요.

그러나 힐베르트의 문제는 문제집 같은 것과는 다릅니다. 그가 제시한 23 문제는 "20세기의 후배 수학자들아, 너희들 이 문제 풀 수 있겠니?"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재의 수학에는 이런 미해결 문제들이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성과물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그러니 출제자인 힐베르트가 16번째 문제의 해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수학자들이 문제를 푼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온 오해입니다. 수학자들이 하는 일이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긴 하지만, 이게 무슨 유명한 문제집 하나 갖다 놓고 누가 먼저 정답을 맞히는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또, "문제가 어떤 건지 알려주지도 않는 엉터리 기사"라는 반응도 있던데, 어쩔 수 없습니다.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방법이 없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아마 기사를 쓴 기자도 "boundary cycles for polynomial differential equations"를 번역하느라 골머리를 썩였을 것 같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반응 가운데 씁쓸했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이런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수학교육이 창의적인 사고보다는 계산 테크닉과 지식을 주입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의도이겠습니다만, 마치 우리나라 수학 수준 자체가 세계와 비교해 형편없다는 것처럼 들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수학이 그렇게 최하 수준일까요?

2001년에 열렸던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는 4위를 했습니다. 이걸 가지고 어떤 신문에서는 우리나라 수학교육에 문제가 있어서 1위를 할 수 있었는데 4위밖에 못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던데,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기사였습니다.

1위부터 3위까지가 어떤 나라였는지 아십니까?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이 나라들은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1~3위를 도맡아 하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이런 나라들에 이어 4위를 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1위가 아니라고 욕을 하다니, 정작 욕을 먹어야 할 것은 수학계가 아니라 그런 보도를 한 언론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현대 수학은 해방 직후부터 따져도 60년이 되지 않은 분야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결과가 나오려면 오랜 기간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이 쌓여야 나오는 법입니다. 기초 과학 분야는 더욱 그렇습니다. 일본의 경우,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 상을 받은 사람이 3명이나 됩니다. 일본의 현대 수학은 힐베르트에게 배운 테이지 타카기로부터 따져도 이미 100년이 넘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기초 과학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집중 육성을 해 온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도 많죠. 이런 곳이니 100년만에 3명의 필즈 상 수상자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학의 역사가 100년을 넘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고작 60년, 그나마 진정한 수학 연구는 그보다도 더 짧은 나라에서, 또한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공부할 여건도 만들어주지 못한 나라에서, "한국의 수학자들은 실력이 없어서 필즈 상 수상자를 못 내고 있다"라고 말을 하면 참으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수학자들도 이미 많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황 파악도 못하면서 오히려 수학 수준이 떨어진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 아닐까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4위라는 기적적인 성적에도 욕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나라이니 이공계 홀대 현상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기사를 보고서 "우리도 천재를 키우자"는 주장이 있던데, 물론 천재나 영재들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기사의 주인공인 엘린 옥센힐름이 뉴튼이나 오일러, 가우스 급의 천재일까요?

똑똑한 학생인 건 분명하겠지만, 아마 이 학생도 보통의 수학과 대학원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수학의 미해결 문제가 풀리는 것은, 한 명의 천재가 갑자기 나타나 순식간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배 수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결과를 바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수많은 동료들과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공부하던 도중 자연스럽게 문제가 풀리는 것이죠.

고작 수학 문제 하나 풀자고 천재를 키우자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천재가 자연스럽게 커나갈 수 있도록 주변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명의 천재 옥센힐름을 찾아내어 집중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옥센힐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면 그 가운데에서 누군가 중요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훌륭한 결과를 내놓은 엘린 옥센힐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lin Oxenhi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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